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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5

65화 꼭두각시 (3)

65화 꼭두각시 (3)

카인에게는 생각보다 다정한 면모가 있었다. 노숙할 때마다 카인은 손수 모닥불에 불을 붙이고, 세실의 잠자리도 챙겨줬다.

“예전에 기사단과 훈련할 때 배워뒀지.”

히죽 웃은 카인이 은월섬에서 챙겨 왔다며 등짐에서 간식을 꺼냈다. 두 사람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사이좋게 간식을 먹었다.

세실은 카인과의 여정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동안 세실은 카인을 어려워했었다. 아니, 무서워했다. 지금이라고 카인이 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나아졌다.

“적어도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나와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 세실.”

세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야.’

지난번에 카인이 했던 말.

‘데미안이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거든.’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보면 카인이 그때와 같은 표정을 지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카앙!

말을 타고 달리던 카인을 무언가가 습격했다. 카인이 말에서 떨어져 지면에 처박혔다.

세실은 말에서 뛰어내려 카인에게 달려갔다. 그때, 카인의 주위로 반투명한 구체가 생성됐다. 그것이 시커멓게 변하며 카인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카인!”

세실은 저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처음 카인을 습격했던 것도 저 구체와 비슷한 것이었다. 세실은 그림자 결속으로 몸을 덮었다. 영력을 숨길 때가 아니다. 지금은 카인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

세실은 시커먼 구체를 단검으로 그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반발력에 튕겨져 뒤로 날아갔다.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생각했다. 칼날로 베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 구체는 물리력으로는 타격할 수 없다.

“카인! 카인!”

세실은 다시 구체를 향해 달렸다. 그러면서 블레이드를 발현하려 했다. 그러나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날 이후, 마치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세실은 블레이드를 발현할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세실은 몸 안을 흐르는 영력을 붙잡아 손끝으로 집중했다. 거기까지는 되었다. 그런데 몸 밖으로 실체화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실은 재차 단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과 같은 반발력은 없었다.

검은 구체가 사라졌다. 카인과 함께.

“세실.”

세실의 두 발이 얼어붙었다.

사라진 구체 너머에 긴 그림자가 있었다.

그 안에서 볼이 움푹 팬 홀쭉한 얼굴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피처럼 붉은 눈을 뜨고서.

“······네몬.”

저절로 입술이 떨렸다.

세실은 네몬이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카인을 찾아야 한다.

팟! 파파팟!

그림자 도약을 발현한 세실의 몸이 잔상을 그리며 질주했다.

세실은 순식간에 네몬의 뒤를 잡았다. 세실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단검을 뻗었다.

“재미있군.”

그 순간 세실의 눈에는 네몬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세실의 가슴에 날카로운 충격이 가해졌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세실은 나무 기둥에 부딪힌 뒤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흑······! 끅······!”

숨을 쉬기 힘들었다. 몸을 덮었던 그림자 결속도 해제됐다.

세실은 고개를 들어 네몬을 노려봤다. 네몬은 블레이드를 꺼내지 않았다. 단검조차 들지 않았다. 세실은 맨손 공격에 당했다.

실력 차는 완연했다.

“네 친구는 찾을 수 없을 거다. 잠시간은.”

“······그게. 무슨.”

네몬의 눈이 초승달처럼 굽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들으니 색다른 기분이구나. 네가 말더듬이가 되다니.”

세실은 이를 악물었다.

말더듬이라니.

저자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지금의 넌.”

네몬의 눈빛에는 잔잔한 흥미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기대하듯.

“······나를. 어쩔. 셈이지?”

“너는 뻔한 물음을 하는구나.”

네몬의 눈빛이 살기로 채워졌다. 세실의 눈에 비친 네몬의 그림자가 열 배는 커다랗게 보였다. 목 위로 솟구치는 무엇을 억지로 삼키며 세실은 몸을 일으켰다.

침착해야 한다. 저자는 아버지도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던 자다.

“그런데 말이다, 세실.”

살기로 채워졌던 네몬의 눈빛이 돌연 평온해졌다.

“하센베르크의 꼬마 말이다. 녀석도 알고 있나? 자신의 가족이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네몬의 동공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호오. 그 꼬마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

벌어진 붉은 입술이 뱀의 혀처럼 말을 토해냈다.

“기억을 돌이켜 보자꾸나 세실. 네가 크쉬와 훈련했던 날. 그래, 네 어머니가 죽었던 그날 말이다. 그때 네 아버지가 그 사고뭉치 계집과 나를 데리고 어디에 다녀왔을 것 같은가.”

보이지 않는 손은 이제 목을 지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끝까지 숨길 수 있을까? 너의 본모습을.”

“······카인에게. 손. 대지. 마.”

“하센베르크의 꼬마는 ‘그 여자’가 상대하고 있을 거다. 걱정하지는 말거라. 그녀의 실험 재료는 따로 있으니까. 그것도 열 명이나.”

세실은 네몬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꼭두각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세실.”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꼭두각시에게는 제 의지가 없지. 그저 주인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는 하등 존재일 뿐.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무엇인지 아나? 그 생활을 오래 지속할수록 꼭두각시는 저도 모르는 사이 희망을 품게 된다는 거야. 마치 제 의지로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거지. 주인이 손을 놓으면, 그 즉시 허물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서.”

세실은 기분이 이상했다.

네몬이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은 팔다리에 보이지 않는 실을 매달고 살아가지.”

세실의 시야가 붉어졌다.

어느새 다가온 네몬이 세실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말해보렴 세실.”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서.

“나는 누구의 꼭두각시지?”

***

드넓은 황야.

카인은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말을 타고 달리던 중 무언가에 타격당했고, 말에서 떨어졌다. 놀란 세실이 달려오는 모습을 어렴풋이 봤다. 이어 주위가 새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이곳에 와 있었다.

“왜 그리 멍한 얼굴이죠?”

카인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봤다.

검은 후드를 눌러 쓴, 시커먼 로브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당신인가.”

“그렇다면요?”

여자를 향해 몸을 날린 카인이 검을 그었다. 어이없게도 여자의 몸은 그대로 반으로 쪼개졌다.

분수처럼 치솟는 검은 피가 수많은 까마귀로 바뀌었고, 저만치에서 합쳐졌다. 그곳에는 처음과 똑같은 모습의 여자가 있었다.

“성미가 급하군요. 당신은.”

카인의 눈이 파릇하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카인이 발현한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에게 쏘아졌다.

“어머?”

퍼엉! 그녀의 몸에서 바람의 폭발이 일었다.

그러나 카인이 발현한 무형의 힘은 여자를 타격하지 못한 채 그녀의 마법에 상쇄됐다. 카인은 놀랐다. 여자의 마법이 강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자는 주문 영창을 하지 않았다.

“너는 누구지?”

“이제야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나요?”

매혹적으로 미소하는 검붉은 입술은 그 안에 비밀을 감춘 것처럼 보였다.

“제 이름은 ‘모르가나’랍니다.”

“조금 전의 마법은.”

여자, 모르가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주문 영창이 없어서 놀란 건가요? 당신도 그리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는 킥킥 웃기 시작했다.

“영창 없이 마법을 발현하는 방법은 몇 가지나 있답니다? 마법 스크롤을 쓴다든지, 아니면 마법진을 그린다든지.”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말장난하고 있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예쁜 아이는 다시 만날 수 있답니다?”

“녀석은 안전한 건가.”

“물론이에요. 조금 위험한 남자가 곁에 있기는 하지만.”

“왜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카인 하센베르크와.”

카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당신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나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이군.”

“함께 있던 아이, 세실은 어떤가요. 소중한 사람인가요?”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셀이라는 소년은?”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모르가나가 짝! 손뼉을 쳤다.

“그 이름에는 반응하는군요! 그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인가요?”

“고작 그런 것을 묻기 위해 날 끌고 온 건가.”

“이건 아주 중요한 물음이랍니다? 지금의 당신은 알 수 없겠지만.”

모르가나가 질문을 쏟아냈다.

“당신의 바람은 뭐죠? 생존인가요? 전쟁을 통해 명성을 얻는 건가요? 부를 거머쥐고 싶은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가 변했다.

“살해당한 가족의 복수인가요.”

콰드득!

모르가나가 서 있던 지면이 움푹 파이며 갈라졌다.

모르가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제가 너무 아픈 곳을 건드렸나요?”

콰득! 콰드득! 연이어 지면이 붕괴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쇠공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그때마다 모르가나는 한발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유령 같은 움직임이었다. 수개월 전, 일루산이 보였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당신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일 것 같네요.”

모르가나가 우아하게 한쪽 팔을 저었다.

“어차피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답니다. 당신을 부른 것은 그저 잠시의 유희에 지나지 않으니. 그러나 아쉬워하지는 말아요.”

카인의 주위로 어두운 구체가 생성됐다.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카인의 시야가 새까매졌다. 잠시 후, 어둠이 사라진 풍경은 더 이상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카인은 조금 전까지 말을 달리던 숲길로 돌아왔다. 저만치 나무 아래 누군가 쓰러진 것이 보였다. 세실이었다.

***

말을 달릴수록 추위는 짙어졌다.

우리는 슈타인탈 왕국의 북쪽 국경을 넘었다.

점차 인적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눈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눈뿐이었다.

“와. 무슨 흰색밖에 없네. 재미없게.”

엘리샤가 뿜는 입김도 하얬다.

난생처음 이런 강추위를 경험한 루나는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떨었다.

모닥불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기회를 포착한 쿠훌린이 콧구멍을 벌름대며 루나를 안아주려 했지만, 루나는 빽! 고함을 치며 도망쳤다.

“어이 엘리샤! 마법사인 주제에 이런 추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냐!”

쿠훌린은 공연히 엘리샤에게 화를 냈다.

“모르셨어요? 저는 빙결 속성 전문이잖아요. 뭐, 워낙 재능이 넘쳐 화염 계열도 쓰려면 쓸 수 있지만요.”

어깨를 으쓱한 엘리샤가 나직이 주문을 읊었다. 그녀의 검지에 촛불만 한 불길이 생성됐다.

“자요. 이 정도면 좀 따뜻하시겠어요? 불이 작으니 가까이······ 어이쿠 꺼져버렸네. 그러게 빨리 좀 오시지.”

엘리샤는 정말로 쿠훌린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 같았다. 쿠훌린이 보지 않을 때마다 몰래 빙결 마법을 발현해 쿠훌린의 얼굴로 흘려보냈다.

그때마다 쿠훌린은 재채기했고, 코흘린이 됐다. 엘리샤가 웃음을 참느라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아아. 엘리샤가 없었으면 나는 벌써 얼어 죽었을 거야.”

루나는 엘리샤를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인간의 체온은 추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엘리샤와 한 몸이 된 루나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나아졌다.

“데미안. 이리 와.”

모닥불 너머에서 루나가 손짓했다. 왜 부르나 했더니, 셋이 함께 끌어안고 있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두 여자 사이에 끼어있는 상상만으로도 어색하고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쿠훌린의 살기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안고 있으면 따뜻해.”

은빛의 실이 흩날렸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루나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음악 같은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혔다.

“데미안. 너 정말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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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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