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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7

67화 혼돈 (2)

67화 혼돈 (2)

“데미안. 이게 뭐야?”

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아공간에서 꺼낸 것은 폭이 좁고 기다란 나무판 네 개였다. 그중 하나를 엘리샤의 발밑에 고정해 묶으며 말했다.

“스키야.”

“스키?”

“이걸 신발에 부착하면 눈 덮인 경사로를 빠르게 내려갈 수 있어. 미끼가 도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우리는 하얀 산맥에서도 상당한 고지대까지 올라왔다. 즉, 미끼들이 한참을 내려가며 달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

“아, 아니 나는 아직 미끼 한다고 안 했······.”

“잔말 말고 해. 단장 명령이다.”

쿠훌린의 말에 엘리샤는 중얼중얼 욕설을 뱉으며 스키를 신발에 고정했다. 쿠훌린도 스키를 착용했다.

한 번도 스키를 타본 적은 없겠지만 나는 쿠훌린의 운동신경을 믿었다. 엘리샤는 조금 걱정되지만 뭐, 쿠훌린이 잘 끌고 다니겠지.

저 스키는 트리스탄이 만든 것이니 내구성은 문제없을 터였다. 소설 속의 트리스탄은 손재주가 무척 좋았다. 그래서 나는 녀석과 대련할 때마다 조건을 걸어 스키와 스키 폴을 만들게 했다. 아울러 우리의 신발 밑창에 부착된 스파이크도 트리스탄의 솜씨다.

‘다음은.’

나는 아공간에서 다른 물건을 꺼냈다.

눈처럼 새하얀 로브.

성의 빈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이런 상황을 대비해 챙겨뒀었다.

“어, 어떻게 그런 작은 주머니에서 계속 물건이 나오는 거야? 데미안 너 마법사였어?”

“얼른 입어 루나. 이 로브가 우리 모습을 감춰줄 거야.”

“자, 잠깐 금발! 나도 줘!”

“두 벌밖에 없어요. 그리고 미끼가 이걸 입으면 안 돼죠. 눈에 띄어야 눈새가 쫓아갈 거 아녜요.”

“너, 너 지금 나더러 죽으라는 거지!”

엘리샤의 입을 틀어막은 쿠훌린이 우리를 향해 히죽 웃은 뒤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

루나가 쿠훌린에게 손을 뻗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죽기 싫어어어어! 엘리샤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산맥을 울렸다. 잘했다 엘리샤. 눈새도 귀가 있으면 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었겠지.

“가자. 루나.”

동굴을 벗어나자마자 보인 것은 방향조차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눈보라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방향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미니맵이 있으니까.

[미니맵(Lv.5)이 6레벨로 진화합니다.]

미니맵은 40레벨의 벽을 넘었을 때 6레벨로 업그레이드됐다.

추가된 능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시적으로 표식이 지워지는 대신 더 넓은 범위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고도(高度)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쉽게 말해 나는 산맥의 등고선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별의 샘물이 있을, 하얀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찾을 수 있다.

“데미안! 앞이 안 보여!”

“날 따라와!”

거센 눈보라 때문에 우리는 외치듯 말해야 했다.

나는 루나의 손을 붙잡고 경사진 눈길을 걸었다. 쿠훌린과 엘리샤가 걱정되어서인지, 아니면 눈보라가 무서워서인지 루나는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자그만 손이었다. 이렇게 작은 손으로 검을 쥐고, 그렇게 빼어난 검술을 발휘한다니.

어쩌면 내 손이 커져서 루나의 손이 더 작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은월섬에 머무르는 동안 키가 많이 자랐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170센티미터에 가깝지 않을까. 반면 루나는 나보다 한 뼘은 작았다.

“와! 데미안 손 크다!”

나는 괜히 조금 부끄러워졌다. 의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루나를 볼 때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이것은 제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마치 내가 혼돈을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쿠훌린과 엘리샤는 무사해!”

두 사람이 미니맵 끄트머리로 사라질 즈음 내가 말했다.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그 뒤로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다.

추위로 경직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저기서 잠깐 쉬자.”

눈보라가 잦아들며, 저만치 되다 만 동굴처럼 움푹 팬 공간이 보였다.

우리는 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으으······! 손이 안 떨어져······!”

계속 손을 잡고 걸었기에 그 상태로 굳은 듯했다.

맞잡은 우리 손에 루나가 후우, 입김을 불었다.

따스하고, 또 간질간질한 느낌.

“근데 데미안 손 진짜 많이 커졌다. 원래는 요만했던 거 같은데.”

“원래도 너보다는 컸어.”

“그런가?”

바람 소리가 작아졌기에 우리는 더 이상 크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쿠훌린과 엘리샤가 눈새를 잘 끌고 간 것 같은데, 솔직히 걱정된다.

나는 아공간에서 두꺼운 담요를 꺼내 루나와 함께 덮었다. 루나의 눈이 또 휘둥그레졌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겠지?”

“응. 확실해.”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나가 웃었다.

“데미안.”

“응?”

“너는 늘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아.”

“내가?”

“응. 그래서 조금 멋있어.”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함께 있으면 안심이 돼.”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아공간에서 육포를 꺼내 루나의 입에 물려줬다.

루나가 오물오물 육포를 씹으며 말했다.

“카인도 그렇던데. 그러고 보면 너와 카인은 참 비슷한 것 같아.”

“내가 카인과 비슷하다고?”

“응. 꼭 형제 같아.”

“그럴 리가.”

나도 육포를 씹었다.

아공간에서 꺼낸 육포는 차갑지 않아 좋다.

“세실은 어떤 것 같아?”

“세실은 너무 예뻐!”

루나가 두 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지금도 믿기지 않아. 어떻게 남자아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있지? 피부도 하얗고, 손도 작고, 그런데 점점 늘씬하게 키는 커지고. 가끔 웃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녹아버릴 것 같아!”

“하지만 너는 세실과는 많이 대화하지 않잖아.”

“세실이 워낙 말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조금 무서워. 세실은.”

“세실이?”

“응. 가끔이지만 정말 무섭게 눈을 뜰 때가 있어.”

아.

“그치만 절대로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루나가 배시시 웃었다.

소설 속의 루나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

“데미안.”

“응?”

“고마워.”

“뭐가?”

“엄마랑 디네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 줘서.”

“고마워할 것 없어.”

“왜?”

“리아논과 디네베는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루나가 흑,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급기야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데미안. 나는 언제나 네 가족이야. 알지?”

얘가 정말 많이 외로운가 보다.

나는 아공간에서 새로운 물건을 꺼내 루나에게 건넸다.

루나는 정말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얼른 먹어. 금세 차가워질 거야.”

내가 꺼낸 것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였다. 먼지의 아공간에서는 뜨겁거나 차가운 음식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상하지도 않는다.

“너무 멋있어······!”

루나의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오빠······!”

내가 심장을 부여잡는 동안 정신없이 수프를 먹던 루나가 퍼뜩 놀라더니 함께 먹자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사실 아공간에는 이런 수프가 몇 개 더 있다.

그러나 루나는 고집을 부렸다. 얼른 먹지 않으면 자기도 안 먹겠다고 했다. 시시각각 수프의 온기가 사그라들고 있었기에, 그리고 루나가 다시 한번 나를 오빠라고 불렀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릇을 받았다.

“여기.”

아공간에서 새 숟가락을 꺼내려는데, 루나가 헤헤 웃으며 제 숟가락을 내밀었다.

“······.”

나는 아공간의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이 또한 제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내가 혼돈을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숟가락 하나로 사이좋게 수프를 나눠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그치?”

혹한의 땅에 들어선 후 루나가 지은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데미안은 마법사였구나.”

짧은 휴식을 마친 우리는 다시 걸었다.

따뜻한 수프 덕분인지 한결 몸 상태가 좋았다.

“데미안.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나는 미니맵의 범위를 넓힌 뒤,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곳을 찾아봤다.

“이틀은 더 걸어야 할 거야.”

물론 저곳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니맵의 범위를 최대로 넓혀도 산맥 전체를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별의 샘물이 눈새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저곳일 확률은 매우 높았다.

“······두 사람은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도주하는 거니까. 엘리샤가 적절히 마법을 쓰면 달아나는 속도를 높일 수도 있을 테고.”

“눈새는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걸까? 아르테미스가 둘이나 있는데······.”

나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이곳의 눈새는 소설 속의 눈새와 반응이 다르다.

더구나 눈새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것도 아니기에 더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

.

.

우리는 무려 닷새 만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눈으로 뒤덮인 산맥을 대충 거리로만 계산했던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갑작스레 무너지는 눈더미에 갇히기도 하고, 몇 번이나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중간에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어두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다.

“이게 별의 샘물이야?”

“응. 맞아.”

눈앞의 풍경과 소설 속의 풍경을 비교한 나는 확신했다.

게다가 이런 추위에 얼어붙지 않은 물이라면 별의 샘물 말고는 없겠지.

“양이 엄청 많아!”

루나가 반색했다. 그녀의 말대로 샘물의 양은 많았다. 목욕해도 될 정도로.

그러나 저 많은 샘물은 한 해의 마지막 날 극소량으로 압축된다.

그것을 이야기하자 루나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어쨌든 성공이다. 그치?”

여기까지 오는데 닷새나 걸리는 바람에 조금 걱정했었다. 만약 이곳에 별의 샘물이 없으면 다른 봉우리를 찾아야 하는데, 올해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샘물을 조금 떠 마셨다. 이 샘물은 별의 샘물로 변하기 전에도 마법적인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무려 눈새가 목을 축이는 샘물이니까. 소설 속의 루나도 마셨었고.

“마셔도 돼?”

“응. 우리가 마시는 정도는 나중에 별의 샘물이 되었을 때는 티끌보다 적은 양이니 걱정할 것 없어.”

그제야 루나는 안심하고 샘물을 마셨다.

우리는 수통에도 샘물을 담았다.

“사흘간 머무를 곳을 찾아보자.”

우리는 되도록 샘터에서 먼 곳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혹여 눈새와 만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눈새가 나타나면 별의 샘물을 얻는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유에서도 눈새와 마주치지 않기를 기원했다.

눈새가 이곳에 나타난다는 것은 즉, 쿠훌린과 엘리샤의 사망 가능성을 암시했으니까.

“여기가 좋겠어.”

적당한 장소를 찾은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사흘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몸 안에서 묘한 변화를 느꼈다. 굳이 설명하자면 헐겁게 풀어진 나사못이 조금씩 조여지는 감각. 그 감각은 샘물을 마실 때마다 중첩됐다.

육포로 끼니를 해결하던 우리는 마지막 날만큼은 수프 한 그릇을 꺼내 나눠 먹었다.

“가자.”

공기는 맑았다. 금세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무리를 보며 우리는 샘터를 향해 걸었다. 루나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샘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미니맵에서 변화를 포착했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적대적 표식.

고개를 든 나는 날개를 활짝 편 거대한 생명체를 발견했다. 그것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부리를 벌렸다. 빙결의 폭풍이 쏟아졌다.

키요오오오오오!

이상하게도 나는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순간, 감정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나는 내 눈이 푸른 광채를 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 마법 같은 눈동자가 눈새의 몸 곳곳에 얼룩진 검은 깃털을 발견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루나를 보호하고, 다른 손은 눈새를 향해 펼쳤다. 몸 안의 나사가 더욱 단단히 조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나는 이 감각을 보다 명확히 표현할 수 있다. 내 몸 안을 휘돌던 혼돈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날 보았던, 아득한 밤하늘 속으로 뻗어가는 세계수의 줄기처럼.

그 광경이 재현됐다.

【혼돈을 발현합니다.】

눈새를 향해 펼쳐진 나의 손에서 새하얀 줄기들이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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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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