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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9

69화 혼돈 (4)

69화 혼돈 (4)

나는 라바다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내가 포식한 세계수의 혼돈이 이그드라실의 힘이 아니었다고?

– 말하지 않았는가 라플라스. 내가 정신의 침식을 겪은 이유에 대해.

라바다는 ‘혼돈’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설 속 라바다의 정신은 온전했었다.

그렇다면 왜 이 세계의 라바다는 정신의 침식을 겪고 있었을까.

답은 하나였다.

‘이 세계가 덧씌워졌기 때문에.’

– 혼돈은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힘이다. 그것이 고대 시대에 어떤 이유로 등장했고,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혼돈이 대륙 곳곳에 흩어진 것은 맞다. 나 역시 그중 하나를 카론 늪지에서 포식했으니까.

원래는 카인이 가졌어야 할 혼돈. 소설 속의 카인은 그 외에도 여러 혼돈을 손에 넣는다. 그가 소서러이기 때문에.

“너는 소서러에 대해 알고 있어?”

– 재미있는 물음이군.

라바다가 엷게 몸을 들썩였다.

그 모습은 웃는 것처럼 보였다.

– 그대가 바로 소서러가 아닌가.

라바다의 말은 맞다.

나와 카인은 동일한 결과를 내는 힘을 갖고 있다. 주문 영창도, 술식 실행의 과정도 없이 발현되는 마법.

– 소서러는 혼돈을 제어하고, 발현하는 존재다. 그대처럼. 나와, 나의 형제들처럼. 그리고 세계수의 신녀처럼.

라바다가 루나를 돌아봤다.

– 그대는 자신의 운명을 거슬렀다. 스스로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운명?”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나는 모른다. 자신이 이 세계의 신녀가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굳이 사실을 알게 할 필요는 없다. 디네베가 부탁하기도 했었고.

“너는 혼돈을 제어하고 발현하는 존재가 소서러라고 말했어. 그리고 너 자신을 소서러라고 칭했지. 그런 네가 왜 혼돈 때문에 정신의 침식을 겪은 거지?”

– 대륙의 이상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나 알아!”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루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쿠훌린은 흰 새 여관에서 우리에게 대륙의 이상 현상에 대해 알려줬었다.

“대륙 곳곳이 병들어 가는 거잖아. 물이 마르고, 동식물이 죽고, 땅이 황폐해지고.”

–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가.

루나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를 모르니까 이상 현상 아니야?”

– 혼돈의 영향이다. 말했듯이, 혼돈은 원래 이 세계의 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너는 혼돈이 먼 고대 시대에 등장했다고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부작용을 드러낸다고?”

내 의문은 타당했다.

더욱이 쿠훌린이나 라바다가 말하는 대륙의 이상 현상은 소설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 그동안 많은 혼돈은 일종의 잠복기를 보내고 있었다. 감지되지도, 이 세계에 부작용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혹한의 땅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오랜 시간 이곳의 혼돈을 제어하고, 흡수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짙어지며 나를 침식시켰다. 지금까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브류나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세계가 덧씌워졌다는 것을.

역시 그것 때문이었나.

“많은 혼돈이 잠복기를 보내고 있었다는 건, 그렇지 않은 혼돈도 있다는 거야? 그 혼돈들은 어떻게 됐지?”

– 여러 존재가 흡수했다. 대부분은 혼돈을 견디지 못해 죽었고, 살아남은 존재는 소서러가 되었다. 브류나크도 그중 하나다.

어느새 먼지는 자그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나는 혹한의 땅을 벗어날 수 없다. 이그드라실 또한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기에 대륙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 형제는 브류나크뿐이었다.

먼지가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카론 늪지의 혼돈을 발견해 내게 알려줄 수 있었구나. 먼지야.

– 나와, 이그드라실과, 브류나크와, 그리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몇몇 존재는 본래 하나였다. 나는 우리가 하나였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그드라실과 브류나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러 조각으로 찢기며 많은 것이 변했다. 우리는 약해졌고, 기억을 잃었고, 혼돈과 대립했다. 우리는 각자의 혼돈을 제어하는 것에 성공했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대륙의 혼돈이 깊어지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세계에는 큰 재앙이 닥칠 것이다.

라바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상상했다.

아스트레아 대륙은 인체.

혼돈은 인체에 침투한 바이러스.

소서러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면역 세포.

대륙의 이상 현상은 잠복기를 거친 혼돈의 발현기.

– 재앙을 막아야 한다. 미약하게나마 힘을 회복한 브류나크가 도움이 될 것이다.

먼지가 나를 보며 헥헥 혀를 내밀었다.

먼지야. 너는 라바다처럼 말할 수는 없는 거야?

–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루나와 함께 샘터로 달려갔다.

그 많았던 샘물이 정말로 주먹만 한 크기로 줄어, 바닥 한가운데 고여 있었다.

– 별의 샘물이다.

나는 아공간에서 유리병을 꺼내 별의 샘물을 담았다. 샘물에는 점성이 있었기에 남김없이 유리병에 넣을 수 있었다. 루나가 환히 웃으며 나를 봤다. 나도 루나를 보며 웃었다.

그때, 샘터를 둘러싼 미지의 기운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내 몸에 흡수됐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 느꼈다.

【■■의 파편을 포식합니다.】

– 일행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

뒤를 돌자 라바다가 우리 앞에 한쪽 날개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와 루나는 신나는 얼굴로 날개를 밟고 올라갔다. 퀵피를 타는 것에 이어 눈새까지 탈 수 있다니.

라바다의 깃털은 미끄러질까 염려될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러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걱정은 사라졌다. 마치 놀이기구의 안전장치처럼 깃털이 두 다리를 감싼 것이다.

내 앞에 앉은 루나의 동그란 뒤통수를 봤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사락, 흔들리는가 싶더니 거센 바람 소리가 귀를 채웠다.

***

랑베르 잡화점의 유능하고 친절한 종업원 리즈 플랑빌은 요즘 걱정이 많았다.

오를리안 왕국과 티롤 왕국과의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듯했기 때문이다.

“그 예쁜 종업원은 아직인가?”

태평한 손님들은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느냐며, 오늘도 세실을 찾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덜 태평한 손님은 페르디나는 전쟁의 영향이 없을 거라고 했다.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면 도시가 더 부유해질 거라며 낙관적인 전망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테오 점주의 얼굴이 어두운 것을 보면 상황이 그리 낙관적으로 흐르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테오 점주 있나.”

푸른 매의 부단장, 마르셀은 수시로 잡화점을 찾아왔다.

리즈는 왜 저 사람이 단장이 아니라 부단장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많은 단원이 그에게 단장의 직위에 오르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마르셀은 자신은 부단장일 뿐이며, 단장이 돌아올 때까지 단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답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꽉 막힌 사람. 에휴.

“조아킴 있나.”

그런데 오늘 마르셀은 테오 점주가 아닌 조아킴을 찾았다.

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아킴, 아니 조를 왜 찾는 거지? 조는 잡화점에서 요리와 청소 같은 잡일만 하는 사람인데.

“조는 해 질 무렵에나 들어온다고 했어요.”

“그렇군. 이따가 다시 오지.”

다시 온다고 말할 정도면 꽤 급한 용무인 듯한데, 리즈는 그 용무가 무엇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혹시 푸른 매의 단도 참전하려는 건가? 그래서 잡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 거고?

“나 왔어 리즈! 배고프지? 금방 요리해 줄게!”

노을이 드리울 즈음 조가 잡화점에 왔다. 언제나처럼 활과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테오! 덩치! 나 왔어!”

아무도 없는 벽을 향해 크게 외친 조가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즈는 요즘 조가 자신에게 치근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실실 웃고, 가끔은 다음 식사 때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 묻기도 했다. 물론 조는 테오 점주와 휴고 점주에게도 그랬다. 하지만 여자의 촉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고백하면 뭐라고 하며 거절하지? 테오 점주 때문에라도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은 싫은데.’

조가 테오 점주와 죽마고우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하면 테오 점주에게 밉보이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까. 일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이런 고민까지 해야 한다니. 정말 예쁜 것도 죄라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리즈는 어느새 테오 점주와의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와, 화려한 음식과, 수많은 하객의 박수 소리를 상상하고 있었다.

“조아킴 있나?”

마르셀 부단장이 찾아왔기에 리즈는 조를 불렀다.

얼룩진 앞치마를 두른 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며칠 내로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정보다. 조아킴.”

“물자 호송에 관한 일이라면 테오에게 물어봐. 나는 잘 몰라.”

“잡화점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푸른 매의 단은 참전을 준비하고 있다. 테오 점주에게도 전해 두었다.”

“참전? 단장도 없이? 아, 드디어 네가 단장이 되기로 한 거야?”

“단장은 돌아온다.”

조의 눈이 커졌다.

“연락이 온 거야? 그, 그럼 데미안과 세실은? 쿠는?”

“아니. 연락은 오지 않았다.”

조의 얼굴에 실망이 번졌다.

“뭐야. 연락도 안 왔는데 너희 단장이 돌아오는지 어떻게 알아.”

“전쟁 소식을 들었다면 단장은 돌아온다. 반드시.”

“······그럼 나는 이만 요리하러.”

“조아킴.”

마르셀이 조의 어깨를 잡았다.

“이번 전쟁에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겠나.”

리즈는 속으로 웃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푸른 매의 단은 참전한다.

그리고 조를 잡일 담당으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철의 늑대와 회색 칼바람, 그리고 황혼 불꽃 측에서도 제안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그쪽으로 갈 생각인가. 우리는 그들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다. 두 배. 아니 세 배까지도.”

리즈는 많이 놀랐다.

철의 늑대, 회색 칼바람, 황혼 불꽃.

모두 페르디나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용병단이다.

저들 모두가 조를 데려가려 한다고? 조의 잡일 능력이 그렇게 뛰어났었어?

“네가 카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는 데미안과 세실을 기다리고 있어. 나와 덩치는 ‘디펜더스’의 임시 부대원으로 들어갈 거야. 거기서 페르디나와 랑베르 잡화점을 지키며 친구들을 기다릴 거야.”

리즈는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디펜더스(Defenders)는 페르디나의 최고 권력자인 ‘용장 루카스’가 직접 지휘하는 도시 수비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데미안과 세실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푸른 매의 단에 합류해 줄 수 있겠나.”

“그건 친구들과 상의해 봐야······.”

그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부서질 것처럼 출입문이 열렸다.

“마르셀! 여기 있나!”

리즈는 처음에 웬 늑대 한 마리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흑청색 머리카락. 그 아래 드러난 사납지만 수려한 얼굴. 낯이 익다. 누구였더라?

아, 기억났다. 푸른 매의 단장. 카인.

“단장!”

마르셀이 놀란 얼굴로 카인에게 달려가는 동안, 리즈는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느꼈다.

“꺄악!”

리즈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제 빼앗았는지, 자신의 앞치마를 제 몸에 두르며 웃는 인형처럼 예쁜 얼굴.

‘아······! 안 돼······!’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리즈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전신거울을 향해 돌아갔다. 조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귀를 울렸다.

“세, 세실!”

리즈의 뺨 위로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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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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