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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0

70화 혼돈 (5)

70화 혼돈 (5)

라바다는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퀵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라바다가 지면과 멀어질수록 속도감은 옅어졌다. 폭풍 같던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라바다는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와······.”

루나가 탄성을 지르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별빛과 달빛이 비쳤다. 멍하니 루나를 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루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지금껏 나는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라바다의 깃털도 눈부시게 빛났다. 그 속에 파묻힌 루나의 자그만 손이 보였다. 문득 그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예쁘다, 데미안.”

루나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눈앞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에 꼭 들어맞는 음악 같았다. 나는 내 손이 루나의 손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란 내가 손을 치우려는데, 루나가 내 손을 잡았다.

“역시 데미안의 손은 따뜻해.”

루나가 내 몸을 끌어안았다. 지난 며칠간 함께 추위를 견디며 몇 번이고 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나는 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 돼. 들킬 것 같은데.

“이러고 있으니까 따뜻해서 좋다. 그치.”

루나의 속삭임은 형상이 없는 요정 같았다. 그 자그맣고 귀여운 요정들이 살금살금 나의 어깨를 타고 귓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간지럽게.

라바다의 몸이 엷게 들썩였다. 이어 크게 하늘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 탓에 나는 라바다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야. 라바다는 자신을 괴롭히던 정신의 침식에서 벗어났어.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것뿐이겠지.

라바다가 나선처럼 비행하며 조금씩 달과 가까워졌다. 나와 루나의 몸도 더욱 밀착했다.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 흩날리는 은빛의 향기. 루나가 내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악기처럼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 뒤로 우리는 얼마나 더 하늘을 날았을까.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

.

.

“루나! 데미안!”

쿠훌린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아침이 되어서야 라바다는 지상에 발을 디뎠다. 라바다의 날개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오는 우리를 보며, 쿠훌린과 엘리샤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몰골을 보니 알만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죽음의 문턱을 수십 차례는 넘은 듯한 행색이었다.

“무사했구나!”

쿠훌린이 나와 루나를 끌어안았다. 이런 날씨에도 쿠훌린의 얼굴에서는 열감이 느껴졌다. 이때만큼은 루나도 쿠훌린을 밀어내지 않았다.

저만치에서 엘리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서 있을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엘리샤를 보며 내가 히죽 웃었고, 엘리샤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비명을 질렀다.

“히익! 왜! 왜!”

엘리샤에게 접근한 라바다가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엘리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주문을 영창하는 것인지, 기도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중얼중얼 내뱉었다.

– 그대도 이그드라실이었군.

“엥?”

엘리샤의 손에 맺혔던 마법의 기운이 사라졌다. 역시 그녀는 주문 영창을 하고 있었다.

라바다의 옥빛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 그대는 병들어 가고 있다. 이미 그대도 알고 있겠지.

엘리샤가 병들어 가고 있다고?

– 통증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라바다의 몸이 밝게 빛났다.

그 빛이 엘리샤에게 전해졌다.

엘리샤의 몸이 잠시 반짝였고, 사그라졌다.

.

.

.

카인과 세실은 페르디나에 도착했을까.

다들 휴대폰을 하나씩 들고 있으면 편할 텐데. 화면 몇 번 터치하고, 잘 도착했느냐고 묻고, 세실에게 인증샷 찍어 보내라고 하고.

세실은 셀카를 잘 못 찍을 거 같다. 카인 녀석은 더하겠지. 분명 증명사진처럼 카메라를 정면에 놓은 채로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을 거다. 루나는 셀카 기술이 뛰어날 것 같다. 가장 예쁘게 찍히는 각도에, 다양한 표정과 포즈에, 보정까지도. 아니, 보정은 필요 없나.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과 SNS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나는 부질없는 생각임을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나는 지금 불침번을 서고 있다. 모닥불 주위에는 루나, 쿠훌린, 엘리샤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엘리샤를 내려다봤다.

– 그대는 병들어 가고 있다. 이미 그대도 알고 있겠지.

라바다는 엘리샤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후 우리는 엘리샤에게 몸이 좋지 않은 것이냐고 물었다. 특히 루나가 졸졸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나 엘리샤는 깔깔 웃으며, 이렇게 추운 곳을 돌아다니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냐며 엣취! 재채기했다.

이후 쿠훌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엘리샤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때도 엘리샤는 ‘왜 단장답지 않게 그런 얼굴을 하느냐’며 깔깔댔다.

우리 중에 엘리샤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라바다가 한 말이다. 엘리샤는 병을 앓고 있다. 그 병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70도 기울어 있습니다.】

나는 생각의 화제를 돌렸다.

라바다에게 혼돈을 발현하며 보았던 머릿속 메시지.

【리메이크의 위력이 70퍼센트 감소합니다.】

······심각한 수치다.

그러나 저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는 라바다와의 대결 중에 추가로 천칭을 기울였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13도 기울어집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 의지로 천칭을 기울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으로 나의 리메이크 위력은 83퍼센트 감소했다. 심각을 넘어 위험한 수치다. 83퍼센트의 위력이 감소한 리메이크 스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댓글도 달리지 않는다.

◎ RP: 43

즉, 나는 앞으로 리메이크 스킬을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천칭을 왼쪽(픽션)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얼마큼이나 기울여야 다시 RP를 모을 수 있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댓글을 본 날은 입단 시험일이었다. 그때의 천칭 기울기는 오른(현실)쪽으로 54도. 그렇다면 50도가 댓글을 보이지 않게 하는 기준이 되는 걸까.

아니다. 달빛나무 축제일에 천칭은 또 오른쪽으로 기울어 70도가 됐다.

60도나 70도가 기준일 수도 있다.

————————

– 수달■■■팡: 뭐■ 세실 ■■였음?

└ Flap■l■m■o: 뭔가 ■■ 뉘■스가 계속 느껴지기는 했는데 ㄹㅇ■네

【RP가 ■■■ ■■합■다.】

– 세■■랑: 세실이 ■■라니! ■■■니! 더 좋아! ㅋㅋㅋㅋㅋ

└ 박■■간: 넌 세■커 자격이 없다 ■ 진■■터 암

└ ■■전사: 박■■끼 잘난 척 ㅋㅋㅋ

└ 박■■간: ㄲㅈ

【RP가 4■■ ■■합니다.】

.

.

.

– ■■리바라기: 근데 카인 ■■는 뭐임?

└ ■■전사: 몰루

└ 강아지■■옹■옹: 카■ ■■ 거임? ■ ■임?

【■■가 ■■큼 상■■■다.】

.

.

.

머릿속에 각인된 댓글을 살펴봤지만, 가려진 부분이 많아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댓글을 단 닉네임과, 그들이 세실과 카인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것뿐.

【■■의 파편을 포식합니다.】

나는 라바다를 만나 두 차례 혼돈을 포식했다.

한 번은 라바다의 정신을 침식시키던 혼돈을 물리쳤을 때. 다른 한 번은 별의 샘터를 둘러싼 미지의 기운을 흡수했을 때.

얼마 전까지 나는 포식한 혼돈은 한 번 발현하면 사라지고 마는 힘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닌 듯하다. 라바다를 만난 후, 나는 내 몸 안에서 여전히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혼돈을 느끼고 있다.

투트틋······.

의지를 집중하자 내 손에서 새하얀 나무줄기들이 올라왔다. 그동안 나의 내면을 떠돌기만 했던 세계수의 혼돈은 샘물을 마신 후 내 몸 안의 어딘가로 안착했다. 마치 비 내린 뒤의 식물이 더욱 단단히 뿌리 내리는 것처럼.

눈앞의 나무줄기를 봤다. 라바다를 상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힘이지만, 나는 이 혼돈에서 생명과, 성장과, 치유의 기운을 느꼈다. 추가로 별의 샘터에서 얻은 혼돈에서는 안정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혼돈을 제어하고 있다.

***

우리는 혹한의 땅을 벗어났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극적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계절은 겨울이고, 이곳은 북쪽이었다.

쿠훌린이 휘익, 휘파람을 불자 저 멀리에서 스트라이더가 말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스트라이더는 사실 말의 가죽을 뒤집어쓴 인간이 아닐까.

“추워······.”

말 등에 올라탄 루나가 덜덜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데미안······.”

나는 루나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다.

내심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루나를 마주 봤다.

“오빠······.”

그제야 나는 아공간에서 수프를 꺼내줬다. 반색한 루나가 두 손으로 공손히 접시를 받았다. 엘리샤가 외쳤다.

“오빠! 나도! 나도 줘! 오빠!”

······엘리샤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엘리샤는 몇 살이지. 원래 세계에서의 나와 비슷한······ 아니, 누나가 분명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쿠훌린도 오빠 소리를 할 것 같았기에 나는 잽싸게 수프 두 그릇을 꺼냈다. 엘리샤와 쿠훌린이 만족한 얼굴로 수프를 먹었다. 이제 아공간에 수프는 남지 않았다. 내가 먹을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데미안. 여기.”

루나가 헤헤 웃으며 접시와 숟가락을 건넸다. 우리는 이전에도 그랬듯 사이좋게 수프를 나눠 먹었다.

의외로 쿠훌린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씩 웃기만 했다. 따뜻한 수프를 먹어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데미안. 다음에 찾을 재료는 뭐야?”

다시 말을 타고 이동하는데 루나가 물어왔다.

“검은 백합.”

“혹시 추운 곳에 있어?”

“그렇지 않아. 여기보다 훨씬 따뜻하고, 풀과 나무도 무성한 곳이야.”

“와······!”

루나는 크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번에도 라바다 같은 생명체가 지키고 있어? 싸워야 해?”

“싸워야 하긴 하는데, 위험하지 않을 거야. 라바다보다는 훨씬 약한 녀석이니까. 쿠훌린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이번에는 이 듬직한 아빠에게 맡기고 푹 쉬거라 큰 공주! 으하하하하!”

“흥! 괜히 다치지나 말라고요, 아저씨.”

은월병의 치유제를 만들기 위한 세 가지 재료 중 가장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이 별의 샘물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루나에게 말했듯이, 쿠훌린과 엘리샤의 힘이라면 나머지 두 재료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응?’

돌연 미니맵에 적대적 표식 하나가 떠올랐다.

피해서 가고 싶었지만, 마침 우리는 폭이 좁은 협곡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일행에게 전방에 위험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 즉시 쿠훌린과 엘리샤의 표정이 변했다. 표식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곧 우리는 육안으로 그 존재를 확인했다. 커다란 흑마의 등에 올라탄, 검은 후드를 눌러쓴 사내.

“······흑기사?”

엘리샤의 목소리였다.

나는 흑기사에 대해 몰랐지만 쿠훌린과 엘리샤는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흑기사는 미동조차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새까만 바위를 조각해 만든 석상처럼.

그런데 그것이 변했다. 흑기사가 검을 뽑아 아래로 늘어뜨렸다. 기다란 검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데도 검 끝이 바닥에 닿을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칠흑처럼 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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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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