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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1

71화 흑기사 (1)

71화 흑기사 (1)

“물러나 있거라.”

쿠훌린의 말에 나와 루나는 즉시 후방으로 빠졌다.

쿠훌린이 최전방에서 말을 달렸고, 그 뒤를 엘리샤가 추격했다. 나와 루나는 수 미터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을 따랐다.

“······데미안. 불길한 느낌이 들어.”

루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불안해졌다. 소설 속의 루나는 검술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 내 옆의 루나도 그렇겠지.

흑기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누구일까. 저자는.

나는 소설 속 쿠훌린의 운명을 떠올렸다. 말고삐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은월병의 치유제를 구하기 위해 대륙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이유만은 아니다.

‘나는 쿠훌린도 지켜야 해요.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쿠훌린은 위험을 마주할지도 몰라요. 그의 삶에서 가장 큰 고비가 될 거예요. 그걸 막을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잠든 리아논의 앞에서 했던 말이다.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쿠훌린을 지킬 것이다.

[대상이 통찰에 저항했습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격통이 나를 습격했다. 오랜만이고, 또 낯익은 감각.

광산의 숲에서 소드마스터 에티엔에게 통찰을 발현했을 때와 같다. 아니 그 이상이다. 더 깊고, 더 선명하고, 나의 내면을 뒤흔들고 있다. 회오리치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나를 부르는 루나의 외침이 들렸다. 마치 멀리서 전해지는 물결 소리 같았다. 그 목소리가 흐려지는 내 의식의 끝을 붙잡았다. 코앞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 그제야 나는 내가 낙마할 뻔했다는 것을 알았다. 루나가 나를 붙잡고 있다.

“무슨 일이야! 금발!”

엘리샤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에티엔에게 당했을 때도 나는 몸의 제어력을 잃고 쓰러졌었다.

빌어먹을. 어리석었다. 쿠훌린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순간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었다.

“루나. 데미안과 함께 뒤로 빠져 있어.”

“하지만······!”

“상급자의 명령이다! 루나프레나!”

루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루나는 결국 엘리샤의 말을 따랐다. 루나에게 몸을 맡긴 채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내가 지켜줄게. 데미안.”

루나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불안이 숨어있었다. 루나는 위험한 미래를 내다봤다. 그것이 나를 더욱 조급하게 했다.

루나가 내 몸을 말에서 끌어 내렸다. 지면에 누운 나는 힘겹게 눈을 굴려 쿠훌린을 봤다. 그는 흑기사와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엘리샤의 손에서 차가운 마력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 흑기사가 엘리샤를 향해 왼팔을 뻗었다.

구우우웅!

엘리샤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의 손에 응집됐던 마력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엘리샤는 둔탁한 소음을 울리며 협곡의 벽에 부딪혔다.

엘리샤의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다. 엘리샤는 다시금 마력을 응집하려 했으나, 재차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엘리샤!”

루나가 달려가려 했지만 엘리샤가 고함을 지르며 막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흑기사는 소서러였다.

분노한 쿠훌린의 외침이 들렸다. 다행인 점은 쿠훌린이 흑기사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압도하고 있었다.

“대, 대단해······! 아빠는 정말로······!”

루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아빠’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녀는 놀란 모습이었다. 아마도 루나는 쿠훌린이 진심으로 싸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어느새 염색이 날아가 은빛 머리카락이 된 쿠훌린은 정말로 강했다. 원래도 괴물같이 강한 그였지만 지금은 유독 더했다. 이유는 있었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하늘 위로 보름달이 보였다. 아르테미스가 가장 강해지는 시간인 것이다.

스르륵.

쿠훌린의 몸놀림이 거센 파도처럼 변했다. 그는 은월무를 발현했다.

루나의 은월무가 붓 선처럼 아름다웠다면, 쿠훌린의 은월무는 탱크처럼 저돌적이었다. 쿠훌린이 숨 쉴 틈 없이 흑기사를 몰아쳤다. 흑기사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렸다. 눌러쓴 후드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카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은월무를 견디지 못한 흑기사가 뒤로 날아갔다. 바닥을 구르고 일어난 그의 후드가 바람에 흔들리며 일순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고, 이내 쿠훌린의 등에 가려졌다.

“너는······!”

나는 쿠훌린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봤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쿠훌린이 흑기사의 얼굴을 알아봤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불길한 기운이 해일처럼 다가왔다.

“위, 위험해······!”

루나도 그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쿠훌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지금의 루나는 쿠훌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쿠훌린의 가장 큰 약점이 될 뿐이다. 거기에 더해 쿠훌린은 흑기사의 얼굴을 보고 평정을 잃었다. 루나가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다.

아득! 나는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꺼내 왼팔을 찔렀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정신이 깨어나고 있다.

[리메이크를 시전합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흑기사의 팔이 루나를 겨냥했다. 나는 생각했다. 흑기사는 손동작만으로 엘리샤를 밀어냈었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 않을까.

[리메이커가 세계의 현상에 간섭합니다.]

구우웅! 루나의 몸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흑기사에게로 당겨졌다. 나의 예측은 맞았다. 하지만 나는 흑기사의 혼돈을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리메이크 스킬의 위력은 83퍼센트 감소한 상태다.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주위의 풍경이 흑백으로 변하며 세계가 진동했다. 눈앞으로 튀어나온 활자들이 불규칙하게 뛰어다녔다.

【······데미안은 지금의 리메이크 스킬로는 흑기사를 상대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루나를 구하는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 데미안은 아주 잠시만 흑기사의 시선을······】

펄럭! 흑기사의 검은 후드가 흔들리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면 되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나는 목이 터져라 루나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으니까.

“루나아아아!”

쿠훌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루나’라는 이름에 반응했고, 루나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쿠훌린의 몸에서 눈부신 광채가 일었다. 흑기사에게 쇄도했다.

카아앙!

은월송환에 강타당한 흑기사의 몸이 크게 뒤로 날아갔다. 그가 루나의 목을 움켜쥐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품에 안은 루나를 지면에 내려놓는 쿠훌린의 옆얼굴을 보며 나는 충격을 느꼈다. 지금까지 쿠훌린의 저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루시에에에에엔!”

쿠훌린이 흑기사에게 질주했다. 흑기사가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경악했다. 흑기사는 시야가 가려진 채, 은월송환을 정통으로 맞았다. 게다가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곧바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자가 대륙에 몇이나 있을까. 아니, 존재하기는 할까.

나는 달렸다. 리메이크 스킬을 발현한 뒤로 나는 몸의 제어권을 되찾았다. 엘리샤는 아까부터 일어서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며 무릎을 꿇었다. 엘리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 그대는 병들어 가고 있다. 이미 그대도 알고 있겠지.

라바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흑기사의 공격이 엘리샤의 취약한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다. 만약 루나가 그의 손에 잡혔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루나는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쿠훌린을 도울 수 있을까. 엘리샤도 하지 못한 일이다. 차라리 흑기사는 쿠훌린에게 맡기고 루나와 엘리샤를 보호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루나를 지나쳐 쿠훌린을 향해 달렸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지금 쿠훌린에게 가지 않는다면, 그가 소설 속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금발!”

나는 엘리샤의 외침을 무시했다. 커다란 보름달 아래로 두 사내가 폭풍처럼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흑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런 협곡에서, 우리를 보자마자 검을 꺼내 들었으니까. 게다가 쿠훌린은 흑기사의 얼굴을 확인하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일순 주위의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 쿠훌린과 흑기사는 안면이 있는 사이다. 아니, 상당한 친분이 있는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다. 그렇다면 흑기사는 높은 확률로, 쿠훌린이 오늘처럼 보름달이 뜨는 밤에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를 습격한 거지?

구우우우웅.

순간 밤하늘이 진동한 것 같았다. 내 몸이 느려졌다. 아니, 나의 인지 속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쿠훌린의 은월검과 흑기사의 어두운 검도 느릿하게 움직였다. 칼날이 부딪친다. 불꽃이 튄다. 먹먹한 소음을 울린다.

마치 물속을 달리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며 나는 발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나는 하늘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키이이잉······!

날카롭지만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소음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수많은 감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쿠훌린이 흑기사의 검을 밀어냈다. 그들의 검이 다시 부딪친다. 호각이다. 한 번 더 부딪친다. 이번에는 쿠훌린이 뒤로 밀려난다. 전세가 뒤집히고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흑기사가 지금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달이 지워지고 있다.

그그그그그그······!

달의 은은한 빛이 윤곽을 잃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계의 종말을 고하는 듯, 한 줄기 그림자가 서서히 보름달을 삼켜갔다. 영롱한 달빛이 어둠으로 스며들며 쿠훌린이 발하던 은빛도 희미해졌다.

월식(月蝕)이 시작되며 흑기사의 발걸음은 확고해졌다. 그의 어두운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고, 거침없이 쿠훌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쿠훌린은 저항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

이윽고 월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달은 마치 붉은 눈처럼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길한 붉은색이 전장을 지배하며 흑기사의 그림자를 더욱 사나워 보이게 만들었다.

흑기사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쿠훌린의 방어를 찢고 들어갔다. 이 모든 경합은 내가 혼돈을 발현하고, 내 손에서 뻗친 새하얀 가지들이 흑기사에게 도달하기 전까지 벌어진 일이었다.

콰드득!

쿠훌린을 보호하듯 펼쳐진 나의 혼돈을 흑기사의 검이 부쉈다. 이어 칠흑을 머금은 그의 검이 쿠훌린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쿠훌린의 입에서 피가 솟았다. 그때, 루나의 비명이 들렸다.

그림자는 마침내 달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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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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