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72

72화 흑기사 (2)

72화 흑기사 (2)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봤다. 쿠훌린의 등을 뚫고 삐져나온 흑기사의 검. 그때, 무언가가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른손에 차가운 마력을 머금은 채,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그 사람은 엘리샤였다. 주문을 영창하는 그녀의 입에서 주룩주룩 피가 쏟아졌다. 그러고는 마치 전력투구하듯 손 안의 마력을 쏘아냈다.

차아아앙!

엘리샤가 발현한 빙결의 창이 흑기사의 손짓에 막혔다. 엘리샤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질렀고, 그러자 빙결의 창의 기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그녀의 마력과 흑기사의 혼돈이 허공에서 경합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루나의 비명과 발소리와 들렸지만 뒤돌아볼 틈조차 없었다. 생각해라. 어떤 혼돈을 발현할 것인지. 세계수의 혼돈은 이미 막혔다. 늪지의 혼돈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는 무리다. 남은 것은 눈새의 정신을 침식하던 미지의 혼돈과, 별의 샘터에서 얻은 혼돈.

미지의 혼돈을 발현해 운에 맡겨야 할까. 아니다. 쿠훌린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나는 보다 확실한 것을 원한다.

【혼돈을 발현합니다.】

나는 발현할 혼돈을 선택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더욱 강하게 증폭시켜야 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성공한 적이 있으니까.

내 머릿속에서 바윗덩이가 갈리는 듯한 소음이 일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17도 기울어집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한계까지 기울었습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무언가가 환각처럼 떠올랐다. 마치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은빛의 저울대. 저울대의 오른쪽 끝에 매달린 혼돈의 접시가 균형을 잃으며 수직으로 떨어졌다. 하늘 끝에서 지면을 향해 내리꽂히는 종말의 단두대처럼.

쿠쿠쿠쿠쿠쿵······!

혼돈의 접시가 지면을 파고들며 더욱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깊게.

더 깊게.

그리고 나는 느꼈다.

【■■ 속의 ■■가 리메이커를 응시합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혼돈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 혼돈을 어느 한 곳으로 집약했다.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브류나크으으으!”

내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나는 은빛의 늑대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검에서 은월의 기운이 솟아났다. 쿠훌린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차앙!

나의 은월검이 엘리샤의 마력과 흑기사의 혼돈이 경합하는 허공 어딘가를 베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샤가 발현했던 빙결의 창이 탄환처럼 흑기사에게 쏘아졌고,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비틀거리는 흑기사를 향해 나와 먼지가 달렸다. 흑기사가 쿠훌린의 몸에 박힌 검을 뽑으려 했다. 그것을 쿠훌린이 막았다.

“루시엔······. 왜······.”

쿠훌린은 입에서 주룩주룩 피를 쏟으면서도 흑기사의 칼날을 놓지 않았다. 검을 뽑는 것을 포기한 흑기사가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가공할 혼돈이 쇄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혼돈은 우리에게 적중하지 않았다. 먼지가 놀라운 몸놀림을 보이며 회피했기 때문이다. 흑기사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혼돈을 발현했다. 먼지도 그 모든 공격을 피하며 흑기사와 거리를 좁혔다.

“으아아아아!”

나는 흑기사를 향해 힘껏 은월검을 휘둘렀다. 흑기사가 망토 속에서 새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파지지짓······!

그의 검신에서는 은빛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은월검과 같은.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 나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내 몸이 먼지에게서 떨어져 지면에 처박혔다. 먼지가 사나운 울음소리를 내며 흑기사에게 맹공격을 퍼부었다. 흑기사의 몸이 뒤로 밀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엉금엉금 쿠훌린에게 다가갔다.

“쿠훌린······!”

쿠훌린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나는 수통의 액체를 쿠훌린의 입 안에 부었다. 이것은 평범한 물이 아니다. 별의 샘터에서 뜬 물이다.

다행히 쿠훌린은 샘물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삶을 향한 강한 의지였다. 떨리는 그의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루나를 보고 있었다.

“루······나······.”

눈물을 펑펑 흘리며 달려온 루나는 쿠훌린의 가슴에 박힌 칼날을 보며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나는 루나에게 쿠훌린은 내게 맡기라고 말한 뒤, 엘리샤에게 수통의 샘물을 먹이라고 했다. 엘리샤는 저만치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피가 흥건했다.

쿠훌린이 힘겹게 눈짓하자 루나가 엘리샤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고개 돌려 먼지를 봤다. 지금까지 본 중 가장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 녀석은 저돌적으로 흑기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버티세요 쿠훌린. 루나를 위해서라도.”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끝까지 기운 덕분인지 나의 감각은 송곳처럼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나는 쿠훌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느껴졌다. 그의 몸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과, 생명력과, 그것을 집요하게 파괴하려는 어두운 혼돈이. 혼돈의 주체는 쿠훌린의 몸에 박힌 검이었다. 저것부터 제거해야 한다.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아니, 해내야만 한다. 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 안에 뿌리내린 세계수의 혼돈. 그 힘은 이그드라실이 지녔던 생명, 성장, 치유의 기운을 담고 있다. 거기에 더해 별의 샘터에서 얻은 안정의 기운까지.

나는 그것을 이용해 쿠훌린의 죽음을 막을 것이다. 물론 완벽한 회복은 불가능하겠지. 지금은 어떻게든 숨만 붙여놓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치할 방법을 찾을 테니까.

“살 수 있어요 쿠훌린.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리아논과 디네베, 그리고 루나를 생각해요.”

내 손을 매개체로, 나는 쿠훌린의 몸 깊숙이 감각을 확장했다. 그의 심장이 위태롭게 고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촉수처럼 뻗어나간 나의 감각이 고통받는 육체의 속삭임을 들었다. 부러진 뼈, 터진 혈관, 찢어진 근육, 망가져 가는 장기까지도.

나는 그 모든 것의 원흉인 어두운 칼날에 집중했다. 신중하게 힘을 조절하며 세계수의 혼돈을 주입했다. 쿠훌린의 몸속을 타고 이동한 무형의 에너지가 그것을 몸 밖으로 밀어냈다.

푸슈슛······!

칼날이 뽑히며 피가 솟구쳤지만 세계수의 혼돈으로 막았다. 새하얀 뿌리에서 생명과 치유의 에너지가 흐르며 상처를 감싸고, 피의 방출을 멈추게 했다. 나는 뿌리를 더욱 깊숙한 곳으로 침투시켰다. 실처럼 가늘게 변한 그것이 망가진 조직을 감싸고, 결합했다.

마치 수술용 메스를 다루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욱 섬세하게 나는 혼돈을 조작했다. 이 모든 과정은 뗏목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폭풍우를 항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나는 위태로운 바닷길을 건넜다.

쿠훌린의 숨소리가 점차 차분해졌다.

그의 가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때였다.

스륵.

내 목에 차가운 기운이 닿았다. 나는 그것이 쿠훌린의 가슴에서 빠져나온 어두운 검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든 나는 흑기사의 후드 속에서 빛나는 푸른 눈을 봤다. 순간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린 것 같았다. 그에 맞춰 내 목에 드리운 칼날도 흔들렸다.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루나였다. 흑기사는 내 목에 드리운 검을 유지한 채, 다른 손의 검으로 루나의 공격을 막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해 어두운 검을 포박하고, 그를 공격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혼돈이 아닌, 검을 사용해 루나의 공격을 방어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흑기사는 나에게도 혼돈을 발현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것이겠지.

저만치에서 몸을 일으킨 먼지가 으르렁대며 달려왔다. 그러자 크게 검을 휘둘러 나와 루나를 떨쳐낸 흑기사가 훌쩍 흑마에 올라탔다. 그를 향해 재차 세계수의 혼돈을 뻗었다. 그러나 칼질 한 번에 절단됐다.

우리의 얼굴을 내려다본 그가 말머리를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브란델!”

흰 새 여관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본 브란델이 루나의 표정을 보자마자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이게 무슨······!”

브란델은 시체처럼 말 위에 늘어진 쿠훌린을 보고 경악했다. 쿠훌린을 등에 업은 그가 방으로 달려갔다.

나와 루나, 엘리샤가 그 뒤를 쫓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엘리샤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피폐한 얼굴로 쿠훌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몸도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어떻게 된 거냐.”

브란델이 물었지만, 루나는 쿠훌린이 침대에 눕는 것을 보자마자 기절했다. 루나는 잠들었다. 우리는 그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루나를 침대에 눕힌 엘리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브란델의 옷을 움켜쥐며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오열했다. 그러고는 수 분도 지나지 않아 브란델의 품에서 잠들었다. 나도 눈앞이 희미해졌다. 거부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다.

.

.

.

눈 뜨니 이른 아침이었다.

흰 새 여관에 도착한 것도 이른 아침이었는데,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던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장 먼저 쿠훌린의 상태를 확인했고, 다음으로 엘리샤를 살폈다.

곤히 잠든 루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세 사람의 몸에 이불을 덮어 준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브란델이 나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나는 브란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고는 혹시 ‘루시엔’이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루시엔······?”

브란델은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쿠훌린이 흑기사를 루시엔이라고 불렀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란델에게 흑기사의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다. 엘리샤에게도 물었지만 그녀는 모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브란델은 말을 아꼈다. 이 이야기는 쿠훌린이 정신을 차린 뒤에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먹거라.”

브란델이 음식을 차려줬다. 알고 보니 나는 하루가 아니라 이틀 동안 잠들어 있었다. 엘리샤는 어제 잠시 깨어났지만 곧바로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루나를 데리고 와 자리에 앉혔다. 음식을 권하자 루나는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래도 먹어야 해. 루나.”

루나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커다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안 먹으면 나 혼자서 갈 거야.”

루나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도 알고 있다. 애초부터 이 여정은 리아논과 디네베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목표를 추가했다.

“얼른 먹어. 오늘 바로 출발할 거야.”

“······데미안.”

“말 안 들으면 후회할걸?”

나는 쿠훌린을 흉내 내듯 루나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었다. 루나가 멍한 얼굴로 나를 봤다. 그런 루나를 향해 나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확신은 없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할 거로 생각한다.

“나는 쿠훌린을 구할 치유제를 알고 있으니까.”

‘해의 엘릭서’라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