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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3

73화 검은 백합 (1)

73화 검은 백합 (1)

전쟁의 불꽃이 타올랐다.

오를리안 왕국에서 가장 먼저 전쟁의 불길이 번진 곳은 브리앙스 백작령.

그 안에서도 루베르 자작령이었다.

“전군 진격! 티롤의 침략자를 막아서라!”

“우오오오오!”

루베르 자작령을 이끄는 이는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코앞에 두었다고 평가받는 기사, 앙리 몽포르.

그는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티롤 왕국군을 벌써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그의 곁에 뛰어난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맙네. 라이칸.”

라이칸이 이끌고 온 은월의 단.

앙리는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쿠훌린과 엘리샤가 오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라이칸에게 사정을 전해 듣고는 바로 납득했다.

“푸른 매?”

전쟁의 불꽃이 짙어지던 어느 날, 앙리는 페르디나의 용병단 ‘푸른 매’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단장을 포함해, 단원 대부분이 성년이 되지 못한 어린 용병단.

티롤 왕국은 전선의 남부에 위치한 페르디나를 먼저 점령할 생각이었던 듯했다. 그렇게 되면 오를리안 왕국을 공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거점을 손에 넣는 거니까.

그러나 실패했다.

‘푸른 매’의 활약 때문에.

“푸른 매의 단장, 시니야스트레.”

본명은 카인.

성씨는 모른다.

라이칸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지만 말을 아꼈다. 애초부터 라이칸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사내다.

푸른 매의 단장은 ‘시니야스트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어원은 알지 못한다. 가장 먼저 그렇게 부른 이가 적군의 어느 엘프 용병이라는 것만을 알 뿐이다.

“푸른 매! 돌겨어어억!”

푸른 매의 단은 전장을 휩쓸었다. 시니야스트레는 놀라운 검술을 지닌 검사이면서, 또한 마법사라고 했다.

정보통에 의하면 시니야스트레에게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살수가 있다.

그자가 적진으로 잠입해 적의 지휘관을 암살하면, 지휘 체계가 무너진 적군을 푸른 매의 단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략을 구사한다고 한다.

“우오오오오!”

“우우우!”

최전방에서 짐승처럼 포효하는 거구의 두 전사도 주목받는 인물들이었다.

하나는 거대한 도끼를 사용하는 푸른 매의 부단장 ‘마르셀’.

다른 하나는 창을 쓰는 ‘덩치’라는 별명의 전사.

“초, 초록잎의 활잡이다!”

“모두 피해!”

단의 후방에서 소리 없이 적의 이마에 화살을 꽂아 넣는 활잡이도 유명했다. 그의 화살에는 초록 잎사귀의 문양이 그려져 있어, 적병들은 그를 ‘초록잎의 활잡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앙리는 알지 못했다.

시니야스트레의 그림자 살수와, 창을 쓰는 거구의 전사와, 초록잎의 활잡이를 그가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

“카인과 세실은 괜찮을까?”

모닥불 앞에서,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며 루나가 물었다.

“괜찮을 거야. 확실해.”

내 대답에 루나가 웃었다.

“데미안.”

“응?”

“어떻게 늘 그렇게 확신에 차 있을 수 있는 거야?”

알고 있으니까.

용병단장으로 많은 전쟁에서 활약했던 소설 속의 카인과, 그를 따르는 세실에 대해.

거기에 더해 카인은 소서러의 힘까지 각성했다.

“그냥 알아.”

“와······. 또 저 소리. 너 무슨 예언자 같은 거 아니야? 마법도 엄청 신기하고.”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여전히 눈은 웃고 있었다.

나는 안다.

내 확신에 찬 말투가 그녀를 안심하게 한다는 것을.

“고기가 많이 남았어. 아깝다.”

남은 고기를 보며 루나가 중얼거렸다.

쿠훌린과 달리 루나는 많이 먹지 않는다.

“더 먹어. 그래야 키가 크지.”

루나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 키 안 작거든?”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작잖아.”

“그야 너희들은 남자아이니까 그렇지!”

“케일라도 너보다 큰데?”

“그, 그건······.”

“그러다가 너, 디네베한테 추월당한다?”

두 눈을 부릅뜬 루나가 와구와구 고기를 집어 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보다 작아지는 것은 조금 두려운 모양이다.

잠시 후, 루나가 배를 만지며 죽는소리를 했다.

“아······. 괜히 먹었어. 정말 배가 터질 것 같아.”

루나의 배가 저렇게 볼록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올챙이 같다.

놀리기는 했지만 소설 속의 루나는 지금보다 키가 크다. 무한회귀 설정집에 등장했던 그녀의 키는 163센티미터였다.

나는 남은 고기를 꼬치처럼 나뭇가지에 꿰어 아공간에 넣었다. 먼지가 꿀꺽꿀꺽 꼬치를 삼키는 것을 보며 루나가 짝짝 손뼉을 쳤다. 먼지는 이제 루나 앞에서 편하게 몸을 드러낸다.

“먼지야! 너 대단하다!”

보기에 따라 지저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루나는 마냥 신기해했다. 루나는 먼지와 노는 것을 좋아했다. 먼지도 루나가 싫지 않은지 헥헥 혀를 내밀며 잘 놀아줬다.

흰 새 여관을 떠난 후, 우리는 한 번도 쿠훌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엘리샤도 흰 새 여관에 있다. 그녀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 보였다.

“데미안. 엘리샤는 어디가 아픈 걸까.”

흑기사가 그렇게 사라진 뒤, 나는 쿠훌린에게 했던 것처럼 엘리샤를 치유해 보려 했다. 그러나 내 안의 혼돈은 고갈됐고, 그래서 그녀의 몸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어느 정도 혼돈이 회복된 뒤 다시 치유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사실 내가 쿠훌린을 치유했을 때가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을 한계까지 기울이며, 나의 감각과 혼돈이 수십 배는 증폭한 것 같았으니까.

“은월병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다르다.

엘리샤는 빛을 보는 데 거부 반응이 없었고, 몸에 은색 반점도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은월병이면 우리가 낫게 할 수 있는데. 그치.”

아니다.

엘리샤는 은월병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얻은 별의 샘물로는 별의 엘릭서를 세 개까지만 만들 수 있다. 나는 그중 두 개를 리아논과 디네베에게 쓰고, 남은 하나를 미래의 루나를 위해 남기려 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나는 ‘별의 엘릭서’ 두 개와 ‘해의 엘릭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엘리샤가 은월병이라면, 우리는 네 명의 환자 중 누군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엘리샤는 은월병이 아닐 거야.”

내 말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왜지. 또 불길한 미래를 감지하기라도 한 걸까.

.

.

.

남쪽으로 이동해서인지 날은 점차 따뜻해졌다. 아니, 덜 추워진 건가.

루나의 얼굴도 점점 밝아졌다.

쟤는 봄이 오면 얼마나 좋아할까.

“헤헤. 내가 또 이겼다. 데미안.”

나는 틈날 때마다 루나와 대련했다.

리메이크 스킬을 발현할 수 없는 이상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물론 혼돈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라바다와 흑기사를 상대할 때처럼 폭발적인 힘을 내지는 못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포식한 혼돈은 처음 발현할 때만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이후 몸에 안착한 혼돈은 나의 역량에 따라 위력이 결정되는 것 같고.

“한 번 더 해.”

나는 라바다와 흑기사를 상대하며 2레벨이 올라 43레벨이 됐다. 루나도 어느새 1레벨이 올라 47레벨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오러를 발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다행히 나는 두 번이나 은월검을 발현한 경험이 있고, 그것이 내 몸 안에 어떤 자국을 남겨 놓았다.

“데미안. 은월무는 왜 안 써?”

그때는 동기화 스킬로 카피한 거였으니까.

“너 은월검도 발현했었지?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나한테도 가르쳐주면 안 돼?”

가르쳐줄 수 있다면 가르쳐주고 싶었다.

나와 루나가 둘 다 오러를 발현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 재료를 찾는 부담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때 흑기사도.”

거기까지 말한 루나가 입을 다물었다.

나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날 흑기사는 분명 은월검을 발현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아르테미스라는 것.

‘루시엔······. 왜······.’

쿠훌린은 그를 ‘루시엔’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은 ‘루시엔 아르테미스’일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소설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설 속에서는 쿠훌린의 이름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니까.

“미안. 그때 어떻게 한 건지 나도 모르겠어.”

“혹시 나한테 가르쳐주기 싫은 거 아니지?”

“절대 아니야. 내가 왜 그러겠어.”

루나가 헤헤 웃었다.

“데미안. 우리 함께 노력하자. 오러를 발현할 수 있도록.”

루나가 기도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았다. 소설 속의 루나가 불안한 기분이 들 때마다 하는 행동.

걱정 마 루나. 너는 머지않은 미래에 ‘은월의 소드마스터’로 불리게 될 테니까.

***

검은 백합은 ‘그림자 숲’이라는 이름의 인적 없는 숲에서 자란다.

이 숲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몬스터가 우글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숲에 들어선 후 몇 차례 전투를 치렀다. 미니맵과 먼지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워낙 몬스터가 많았기에 모든 전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루나. 저기 보여?”

그림자 숲의 가장 깊은 곳.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풀숲 안에서 나와 루나는 숨을 죽인 채 웅크려 있었다.

내가 가리키는 곳에는 여러 종류의 꽃으로 가득한 자연적인 정원이 있었다. 소설에서는 저곳을 ‘그림자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주목할 점은 드넓은 정원 안의 꽃들이 모두 검은색이라는 것.

그리고 그곳이 암흑 정령, ‘그림자 늑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으으······. 엄청나게 커.”

루나의 말대로 그림자 늑대는 거대했다. 은빛 늑대로 변신한 먼지보다 더욱.

원래 나의 계획은 쿠훌린이 그림자 늑대를 때려죽이는 것이었다. 사실 정령은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잠시 소멸했다가 다시 나타날 뿐.

아무튼 쿠훌린이 그림자 늑대를 상대하고, 그 밖의 위협을 엘리샤가 막는 동안 내가 검은 백합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제 물 건너갔다.

“곧 해가 뜰 거야.”

그림자 늑대는 강하지만 뚜렷한 약점이 있다. 해가 뜨면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다는 것.

그럼에도 내가 낮이 아닌 밤중에 이곳을 찾은 이유가 있었다. 검은 백합은 밤에만 핀다. 그리고 해가 뜨면 그림자 늑대처럼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해가 뜨기 직전에 검은 백합을 채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저렇게 많은 꽃 사이에서 단 한 송이의 검은 백합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먼지가 있다.

‘먼지야. 검은 백합을 찾을 수 있지?’

먼지에게 묻자 녀석이 헥헥 혀를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한 녀석.

내 계획은 간단하고, 또 위험했다. 해가 뜨기 직전 먼지를 그림자의 정원으로 보내 검은 백합을 찾아 삼키게 한다. 그동안 나와 루나가 그림자 늑대를 막는다.

문제는 그림자 늑대가 정령이기에 평범한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력과 혼돈을 최대한 아껴 두었다.

“준비됐어? 루나.”

나를 돌아보며 웃는 루나의 머리 위에는 둥근 달이 떠 있었다. 루나가 가장 강해지는 시간. 아울러 내가 오늘을 결행일로 잡은 이유이기도 했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먼지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고개를 끄덕인 먼지가 그림자의 정원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가자.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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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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