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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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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5)

푸른 섬광이 전함 내부를 물들였다.

일순간 법보가 뿜는 황금빛 기운도 서란의 숨결에 그 빛을 잃었을 정도였다.

사방이 푸른 빛으로 물든다.

—–!

가공할 폭음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비산하였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공력으로 귀를 보호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는 시뻘건 의식영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안 쓰러졌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귀혼의 상태가 육안으로도 드러난다.

[흐, 흐흐흐…]

귀혼의 장포는 완전히 헤져 있었고, 일렁이는 귀체는 더더욱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는 작은 실금이 잔뜩 가 있었다.

[흐..하하하, 이번 공격은, 꽤 짜릿했다…]

후욱, 훅…

귀혼이 두개골의 턱을 벌릴 때마다, 검은 귀기가 한 움큼씩 튀어나왔다.

‘제대로 맞았다, 무사하진 않아…!’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공력과 법력을 끌어모으며 몸을 회복하였다.

무사하진 않지만, 저 상태라면 언제든지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

그 때였다.

쿠구구구…

귀혼의 두개골, 그 눈두덩이에서부터 시커먼 귀기가 잔뜩 쏟아지며 주변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상성으로 우위를 점했다곤 하나, 그저 축기경 애송이들이라 무시한 것은 사과하지… 나도 이제부터, 시한부인 명(命)이나마 걸겠다…!]

“이런…!”

서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서 일어나라! 저 노귀가, 황천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예…?”

“지금까지 황천에 저항하며 분산시키던 귀력과 음기를 전부 끌어올려 싸운다는 것이야..!”

“화, 황천에 저항을 포기했다면 버티기만 한다면 사후 세계로 간다는 게 아닙니까?”

“일반적인 귀혼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저 노귀라면 정신력으로 황천에 저항하며 우리를 잡아죽이려 할 거다..! 우리를 빨리 죽인 후 다시 법력을 황천에 저항하는 것에 돌리면 죽지 않을 테니까..!”

쿠구구구구!

그리고, 시커먼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귀물(鬼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놈, 들… 아, 무, 도…]

‘젠장… 더 강해졌잖아…!’

저것이, 결단기 수준의 존재.

살아 움직이는 자연재해의 힘.

[누, 구, 도… 본, 문, 의, 것, 을… 못, 가, 져…간..다…!]

어쩐지 아까보다 정신이 불안정해진 것인지, 귀혼은 말을 끊어 말하며 손을 뻗었다.

촤아악!

귀혼의 손에서 귀조가 뻗어나왔다.

‘젠장!’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몸을 굴렸다.

슈캉!

가공할 속도로 내가 있던 자리를 귀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빼앗…을, 수…없다…!]

“크으읍…!”

나는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귀물의 양손에 또 다시 귀조가 돋아났다.

[괴, 군…! 넌, 본문의,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귀물화를 사용하며 정신이 혼미스러워진 것인지, 그는 우리를 보며 괴군을 부르짖었다.

[내가, 있는, 한…!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피웅!

콰아앙!

“커헉!”

‘죽을 뻔했다!’

억지로 강환을 뽑아 사고를 가속해 겨우겨우 피했다.

귀물은 사방팔방으로 귀조를 날리며 마구 날뛰었다.

나는 그의 의식영역 바깥으로 물러나, 의념을 읽어내며 간신히 공격을 피해야 했다.

‘서 형은..!’

서란은 나처럼 빠르지 못하여, 귀조에 몇 번을 맞았는지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아까 전보다 귀조의 속도도, 위력도 올라갔다.’

서란조차 한번 맞을 때마다 그의 비늘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며 피를 쏟았다.

“서 형!”

나는 귀조들을 간신히 피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망칩시다! 이길 수 없습니다!”

“안… 된다..! 우리가 지금 가면, 저 노귀가 내가 찾던 저것을 어찌할지 알수 없다.. 옥간도 다시 맞추기만 한다면 읽을 수 있을 것이야..!”

“젠장할…!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단 말입니까!”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상황을 보던 서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소중하다.”

나는 그의 의념을 읽었다.

그의 심정은 현재 너무 복잡하여 읽기 힘들었지만, 저것이 정말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정말인 듯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귀물의 아래에 있는 저것들을 주워오겠습니다. 그럼 도망치는 겁니다!”

“뭣.. 가능하겠느냐!”

“가능하게 해야지요.”

나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의식을 집중했다.

의념을 보는 지각과, 요족의 지각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동시에 내단을 쥐어짜내며 사고를 극한으로 가속하였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죽는다.’

귀조의 위력은 강환조차 뛰어넘는다.

정면으로 막을 생각조차 하지 말고, 오직 피하면서 가까이 접근해 저것들을 주워올 생각만 하자.

“엄호해 주십시오!”

나는 서란에게 외친 후, 극한의 집중력 속에서 발을 내디뎠다.

이전, 결단경 수준의 삼미호의 영역에서 월수궁무록을 사용할 때와 같은 긴장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실수하면 죽는다.

죽음.

나는 죽음에서 해방된 자였지만,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한 번 죽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보았던 모든 인연들이 그대로 끊겨나간다는 것이니까.

한 번의 죽음은 정말로 죽음과 다름없다.

비록 시간을 기만하여 다시 눈을 뜬다지만.

그렇게 다시 얻은 삶은 이전의 삶과는 무조건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만나는 이들이,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닐 테니까.

산군월악비를 펼친다.

산군무와 월악보를 합친 경신법.

산군월악비의 전체적인 흐름은 마치 범을 닮아있었다.

거대한 범이 산을 넘듯이 가볍고 날래게 움직인다.

범이 사냥꾼의 화살을 피하듯, 나는 귀조를 피하며 점차 가까이 다가갔다.

서란이 원하던 방울과 옥간 조각까지 남은 거리는 20여장.

‘충분히 가능하다.’

귀물은 제정신이 아닌지, 나를 특정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귀조를 날리는 중인지라 월수궁무록은 소용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의념의 흐름을 보기가 더욱 더 쉬웠다.

‘본다.’

의념의 흐름이, 음양의 흐름이.

내 눈에 그대로 비춰진다.

그리고, 사고를 가속시키며 귀물의 공격을 피해낸다.

5장을 이동했다.

남은 거리는 15장.

귀물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귀조의 예기에, 귀조가 내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도 내 몸 곳곳을 베어갔다.

분명히 피했건만 베였다.

‘깊지 않다.’

그러나 이정도면 버틸 수 있다.

물론 버틸 수 있다는 것이지, 쉽다는 것은 아니었다.

폭풍 속으로 발을 옮기며, 빗방울을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차라리 이보단 더 쉬우리라.

‘더 빨라져야 한다.’

깊이 들어갈수록 귀조가 흩뿌려지는 빈도가 높아진다.

휘이이이-

주변으로 바람이 몰려든다.

내 의식이 해룡의 형태로 변하며, 몸이 가벼워졌다.

호풍응룡변!

파앗!

내단이 박살날 듯이 덜거덕거렸지만, 나는 공력을 쥐어짜내며 더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용호(龍虎)와도 같은 기세로 귀조들을 피하며, 그렇게 다시 10장을 접근한다.

남은 것은 5장.

약 15보!

앞으로 세 개의 귀조가 스치고 온다.

귀물의 의식영역 안쪽이라 의념을 읽을 수도 없다.

그저 요족의 지각으로 음양의 흐름을 읽어 예측해야 할 뿐.

슈칵!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등 위로 귀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세 개의 귀조를 피하고 세 발자국을 움직였다.

12보!

여덟개의 귀조가 마구 휘몰아친다.

몸을 비틀어 세 개를 피하고, 고개를 숙여 세 개를 피했다.

그러나 열 십자로 날아오는 두 개의 귀조는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퍼어엉!

푸른 섬광이 나오더니 귀조를 터트려 버렸다.

서란의 지원이었다.

서란은 귀물의 영역 밖에서 피를 흘리며 복잡한 의념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앞발에는 처음 보는 묵빛의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따로 가져온 법보인 듯 했다.

그러나 왠지 묵빛 구슬을 보는 서란의 의념은 전체적으로 어두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무슨 심경이지? 아니, 집중하자.’

서 형을 믿자.

그가 뒤를 받쳐줄 것이다.

나는 일곱 보를 걸어갔다.

남은 것은 다섯 보!

‘이 이전에는 귀조들 때문에 간섭하기가 어려웠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파아앗!

나는 의념을 던져, 어검(馭劍)의 원리로 옥간조각들과 방울을 조작해 떠오르게 만들었다.

촤아악!

방울과 옥간조각들이 내 품에 들어왔다.

‘손에 넣었다!’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다시 집중을 하며 산군월악비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비틀-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어?’

내단이, 문자 그대로 텅텅 비었다.

내공이 정말로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억지로 내 근육을 움직이던 내공이 사라지자,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눈 앞으로, 귀조가 다가온다.

그것이, 나의 아홉번째 회귀인줄 알았다.

촤아악!

눈 앞에서 피가 튀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막아섰다.

서란이었다.

“…고맙다.”

그는 내 품 속의 옥간과 방울을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나 나는 다급히 외쳤다.

“빠, 빨리 피..”

촤악, 촤악 촤악!

그러나 수 개의 귀조가 다시 서란을 때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치명상이다..!’

그때였다.

단전으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호풍응룡변으로 요족의 기운에 익숙해진 내단이, 서란의 기운을 마구 흡수하기 시작했다.

“서.. 형, 무슨, 짓입니까…! 어서..”

“명에 따라, 내 피를 먹고 힘을 발하라. 제귀령!”

파아아앗!

서란의 육신에서 붉은 혈기가 빠져나가더니, 귀물의 힘을 억누르던 황금빛 방울에게 흡수되었다.

황금빛 방울에서 황금빛 포승줄이 튀어나오더니, 귀물을 억눌렀다.

[크아아아아아!]

귀물은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지르며, 더 이상 귀조를 휘두르지 못하고 발버둥칠 뿐이었다.

“자, 잠깐.. 무슨 짓입니까! 서 형!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알고..있다.”

그러나 서란은 계속해서 혈기를 방울에 전달시킬 뿐이었다.

“당장 멈추십..”

“멈추면 바로 귀물이 난동을 부릴 테고, 우리는 둘 다 죽겠지.”

파아앗!

서란의 몸에서 푸른 청광이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광에 휩싸인 서란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뭣..”

서란은 푸른 머리를 한, 어쩐지 서휼과 조금 닮은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의 피부 곳곳에는 비늘이 나 있었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돋아나 있었다.

그는 다 헤진 청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안색이 위험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은..?”

“본디, 요족은 원영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인간형으로 둔갑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즉 이건, 내 원래 모습이다.”

“원래… 모습..?”

서란이 빙긋 웃었다.

“위대한 해룡의 왕족과, 흑색귀골곡의 제자 중 한명이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지. 아이는 해룡족에서는 사생아 취급을, 흑색귀골곡에서는 더러운 요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점 취급을 받으며 사냥 대상이 되었다.”

“서 형,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바로 나갑시다. 힘이 어느 정도 돌아왔으니 서 형을 업고 제가..”

“아니. 내 상처는 내가 안다. 한참 전에 상처를 입었을 때 나는 죽을 운명이었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업고 간다 해도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다. 인요 형태로 돌아왔어도 해룡 형태와 몸무게는 아무 차이가 없으니.. 빨리 너 혼자라도 도망쳐라.”

“무슨 개 같은 소리입니까! 분명 함께 나가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서란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의 왕은 이런 나조차도 자신의 후손이라며 받아들여 주었지. 어찌되었든 나는 그분에게 감사했고, 그를 내 친부처럼 여겼다.”

“서 형!”

나는 서란을 끌고 나가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서란이 내게 나눠준 기운이 내단 속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뚝-

‘뭐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태어날때부터 눈치를 봐온 탓인지. 왕의 눈치 역시 자연스레 자주 보게 되었고. 눈치를 봐오며, 나는 왕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은현아. 본족의 왕, 시조님은 가히 짐작할 수 없이 음험(陰險)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네게 준 호풍응룡변의 진짜 이름은 호풍응단변(呼風凝丹變).

깊게 익힐수록 단전이나 요단이 해룡족의 수행과 회복에 도움이 되는 단약으로 변화하며, 공법을 익힌 이를 해룡족의 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예로 만드는 마공(魔功)의 일종이다.”

“……!!”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실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서휼이… 내게 주었던 공법서가…?’

“아무런… 마기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충격 받은 채로 멍하게 말하였다.

“하하… 어찌 마기를 쌓아야만 마공이겠느냐. 희생으로 힘을 쌓는 것은 모조리 마공이다. 너는 너 자신을 우리가 먹기 좋은 단약으로 희생시키던 중이었으니 그 어찌 마공이 아니겠느냐..”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해룡족은, 수 세대 전에는 왕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남을 희생시키는 공법을 익혔다고 하더구나. 수많은 종족을 가축처럼 사육하며 호풍응단변과 비슷한 부류의 공법을 익히게 하고 단전을 갈라 단약을 먹어 수련을 이어나가곤 했지.

어느 날 괴군이 사육장에 쳐들어와 사육장을 박살내버리고, 사육장을 관리하던 왕족 셋을 생체 괴뢰로 개조했다. 그때 혼란이 일어났고 수많은 가축들이 탈출했지.

내가 아는 역사가 맞다면, 현재 비승하지 않고 남아있는 인족 수도가문 중 막리세가란 세가가 해룡족이 사육하던 가축들의 후예일 거다.”

나는 아연한 역사의 진실에 입을 벌렸다.

범인들을 가축 취급하며 잡아먹던 막리세가가, 실은 해룡족이 사육하던 가축 가문이었다니.

“듣기로는 그때 훔쳐간 공법을 진짜 마공으로 개조하여 우리 해룡족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하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군.. 어쨌든. 해룡족은 한때 왕의 주도로 그런 단약을 만들어 종족의 전체적인 실력을 끌어올렸지..”

서란은 자조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왕께서는, 인요인 나를 생각한답시고 같은 인요 혼혈인 너를 내게 보낸 것이겠지. 같은 인요의 혼혈로 만든 단약이라면,내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 당장도 네 요단을 먹으면 나는 대부분의 상처를 회복하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을 내게 말해주는 겁니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하지만, 네가 망설임 없이 내 부탁을 따라 내 어머님의 유품을 주우러 가는 것을 보며, 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너는 내 벗이다!

세상 그 누가 자기 벗의 배를 갈라 저만 살겠다고 희생을 시킬 수 있겠느냐?”

“……”

서란이 나를 보며 웃었다.

“미안하다. 네게 그동안 이 안에 내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동안 단 한 번도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왕을 포함하여 나까지 네게 계속해서 거짓만을 일삼았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사실을 고백하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해룡왕께서는 늘 웃는 얼굴이시길래. 저는 그분이 좋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왕께서는 늘 웃는 얼굴에 점잖은 얼굴이시지. 하지만 그분은 두꺼운 가면을 수십 겹 쓰고 계시며, 지니기는 벌레조차도 어찌 이용할지 늘 고심하는 분이시다.”

“당신 역시 성의성심껏 제게 공법을 가르쳐주시기에, 좋은 이인 줄 알았습니다.”

“미안하구나.”

“당신은 좋은 이가 아닙니다.”

나는 그를 보며 웃어보였다.

“당신은 단순한 좋은 이가 아닌, 진실로 나의 벗입니다.”

서란이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의념을 계속 흘려대는데, 모를 리가.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꿍꿍이를 택하지 않고 나와의 의를 택하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의에는 의로 답해주어야겠지..’

“어찌, 벗으로서 벗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득, 우드득..

나는 서란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며, 내 단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죽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내 삶은 분명 여러 번이고, 서란의 삶은 한 번이다.

그러니 내 삶 중 하나를 희생하여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벗을 살릴 수 있다면…

“이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서란이 수결을 맺었다.

“아니.”

콰드득..!

서란이 내게 준 기운이 전신 곳곳으로 뻗어나가며, 내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했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살면 나는 기쁠 것 같으냐. 어차피 , 나는 이곳에서 죽어야 하는 몸임을 알았다.”

그는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아까 그가 한참을 보던 묵빛 구슬이었다.

“왕께서는 내게 어머니의 유품을 찾고, 이 법보를 통하여 섭명함을 완전히 부수라고 명하셨지. 이 법보가 섭명함의 공간법술을 전부 파훼하며, 없애버릴 것이라고.

그리하여 섭명함의 내부에 갇혀있는 수많은 귀혼들. 우리 해룡족의 원혼들도 전부 풀려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 들어와서 법보를 발동시킬 준비를 하며 알았다. 이 법보를 발동하면, 나는 필히 죽는다. 왕께서는 아마 일족의 사생아인 나 역시 이번 기회에 처리하여 오점을 없애려 하셨던 것이겠지..”

서란은 눈물을 흘리며, 그러면서도 웃었다.

“당신께서 정말, 잔인하고 음험한 분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을 뿐이다. 은현아. 나는 어머니의 유품과 함께 죽을 테니, 너는 부디 살아다오.”

“서.. 형! 서휼의 임무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지껏 오로지 왕의 자비로 해룡족에 붙어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 자비조차도 실은 꾸며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살고 싶지 않구나…”

파앗!

그가 품에서 푸른 빛의 구슬을 던져, 법술을 써 내 품 속으로 넣었다.

“보상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내 처소에 있는 비밀창고의 열쇠다. 내 처소와 그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네가 가지거라.”

“서 형..!”

“잘 가라, 내 친구.”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호풍응룡변을 발동했다.

바람이 주변으로 모이며, 나는 강제로 바깥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 * *

서란은 서은현의 호풍응단변을 조작하여 그를 강제로 바깥으로 내보내며, 체내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제귀령이 생기를 흡입하고 있었고, 귀조의 손톱에 치명상을 입어 과다출혈이 왔다.

“…서휼 할아버님. 저는 당신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서휼을 따랐다.

그가 비록 끝모를 가면을 쓰고, 음험한 계교와 흉계를 꾸미며 수많은 종족간의 평화를 이간질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가 점잖은 얼굴로 서란의 쓰임새를 찾을 때도, 서란의 자질이 그의 기준에 닿지 못하자 망설임없이 그를 데려가지 않고 버려두기로 결정했을 때도.

서란이 그토록 찾아왔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등선향으로 가기 전날에 알려주며, 어머니의 유품을 찾을 겸 섭명함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섭명함 내 해룡족 전사들의 영혼을 해방시키라는 임무를 주었을 때도.

서란은 서휼을 따르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서휼.

그의 먼 시조 할아버님이자, 해룡족의 왕.

그 존재는 마음이 없는 존재였다.

혹은, 있었는데 망가진 존재이거나.

“벗을 잡아먹고 살 바에, 그냥 이곳에서 죽겠나이다. 당신은 어쩌면 이것까지 계산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몰랐던 서휼의 태도들과, 서휼이 점잖은 가면을 쓰고 행했던 수많은 잔악무도한 짓들이 서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결국, 해룡족도 인간도 아니었던 것이지.’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서란은 천천히 그의 어머니의 것일 것이 분명한 옥간을 하나하나 맞추었다.

자박, 자박

동시에 그는 파공주(破空珠)를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그래도 당신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당신의 임무는 완수하고 가지요.’

묵빛의 구슬이 떨리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서란의 생기는 점차 떨어져 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서란은 옥간을 전부 다시 맞추는 데에 성공했고, 옥간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부우우웅!

파공주가 빛을 뿜는다.

서란의 생기를 먹어치워 귀물을 잡아두던 제귀령 역시 힘을 잃었고, 시커먼 귀조가 서란을 노렸다.

서란은 마지막 순간, 옥간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가.”

공간이 무너지며, 수많은 검은 폭풍이 서란을 뒤덮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어머니와는 생이별해서 지금껏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껏 그를 웃으며 대해주던 이는 서휼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서휼마저도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하기만 했던 삶.

하지만, 서란은 옥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또 웃었다.

“내게도, 가족이 있었구나…”

새하얀 빛과 함께, 서란은 옥간의 내용을 하염없이 읽으며, 그렇게 스러졌다.

“어머니..아버지…”

* * *

“서란!!!”

나는 서란을 부르짖으며 섭명함으로 다시 날아갔다.

그러나 순간.

섭명함에서 빛이 번뜩이며, 수많은 공간 폭풍이 불어닥쳤다.

어마어마한 빛이 폭발하며, 그곳에 축적되어있던 귀기와 음기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동시에 섭명함 내부에 갇혀있던 그 귀기와 음기의 근원들.

흑색귀골곡이 저장해놓았던 수많은 원혼들이 허공으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자유다, 자유!]

[저 빌어먹을 배에서 떠난다!]

[이번엔 진짜 저승으로 가는구나!]

수많은 원혼이 하늘로 날아들며 사라진다.

나는 이를 악물며 눈물을 흘렸다.

섭명함이 완전히 붕괴되어간다.

오늘, 내 벗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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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回歸修仙傳, 회귀수선전
Score 9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On the way to a company workshop, we fell into a world of immortal cultivators while still in the car. Those with spiritual roots and unique abilities were all called to join cultivation sects, living prosperously. But I, having neither spiritual roots nor special abilities, lived as an ordinary mortal for 50 years, complying with fate until my death. That’s what I thought. Until I regr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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