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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7

77화 출항 (2)

77화 출항 (2)

“뭐라고?”

벨레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어둠의 군대에 관한 정보를 그도 들었을 것이다. 분명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겠지.

벨레트가 피곤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모르가나와 같은 존재는 없었으니까.

벨레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의 말대로, 내가 아무리 쿠훌린이 아끼는 이라 해도 곧이곧대로 내 말을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는 것을 보며 내가 말했다.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어둠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을 알아요.”

“너를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 말을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군.”

벨레트의 눈이 루나에게 돌아갔다.

“저 아이는 누구지?”

루나는 아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지만 벨레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 정도로 정신없는 상태라는 거겠지.

“쿠의 딸이에요.”

내 말에 벨레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쿠의 딸이라고?”

얼마 전 라이칸을 만났을 때 들었다. 만약 페르디나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벨레트 단장과 용장 루카스를 찾아가라고. 그 둘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루나의 존재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루나.”

내가 눈짓하자 루나가 후드를 벗었다.

그녀의 긴 은빛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벨레트가 루나에게 다가가, 다시 후드를 씌웠다.

“따라오십시오. 루카스 의장에게 안내하겠습니다.”

.

.

.

“데미안. 루나의 정체가 뭔데? 역시 귀족이야?”

용장 루카스를 만나러 가는 길에 테오가 속삭였다. 그런데 루나가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루나가 테오를 보며 싱긋 미소하자, 테오는 멋쩍게 머리를 긁더니 입을 다물었다.

벨레트를 따라 우리는 페르디나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스팔트처럼 단단한 돌이 포장된 도로였다. 양옆으로는 건물들이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와, 데미안. 여기 멋지다.”

나도 페르디나의 심장부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지만, 여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야. 안쪽에는 더 대단한 것이 많아.”

“진짜?”

“응.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용병 도시니까. 저쪽 거리에는 대장간이······.”

나는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며 루나에게 설명했다. 물론 과장을 조금 덧붙여서. 벨레트와 테오가 물끄러미 나를 돌아봤다. 아, 그냥 모른척해 주지.

이윽고 우리는 도시의 남쪽 성채에 도착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긴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 앞에서 벨레트가 말했다. 루나에게 존대하는 벨레트를 보며 나는 새삼 느꼈다. 아르테미스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벨레트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렸다. 커다란 회의실. 창가의 기다란 테이블 끝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페르디나의 최고 권력자, 용장 루카스.

“어서 오게.”

루카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바람과 햇볕에 그을린 거친 얼굴. 날카롭게 빛나는 눈. 그의 몸에서는 강한 권위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면서 또한 어떤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평가하는 듯한 그의 시선이 우리를 훑었다. 테오와 나를 지나, 루나의 얼굴에 머무른 그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후드를 벗어주겠나?”

루나가 후드를 벗자, 용장 루카스가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나에게 걸어왔다.

가까이에서 루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날카로웠던 첫인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닮았군. 그와.”

말도 안 되는.

물론 루나와 쿠훌린이 닮기는 했다. 그러나 말투나 표정, 행동이 닮은 것이지 얼굴이 닮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너희들은 모를 테지. 쿠는 소싯적에 상당한 미남자였다.”

루카스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가 우리를 테이블 앞에 앉혔고,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어둠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데미안.”

“네.”

“그 흑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나?”

“만난 적은 없어요.”

루카스가 나를 찬찬히 훑어봤다.

루나에게 머물렀던 그의 흥미가 내게로 옮겨진 것 같았다.

“쿠가 너를 많이 아끼더군.”

그 말을 들은 순간,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검은 갈기의 단장 오스카.

그도 내게 같은 말을 했었다.

“쿠는, 아니 쿠훌린은 어디에 있지?”

역시 루카스는 쿠훌린의 본명을 알고 있었다.

“쿠훌린은 다쳤어요.”

“다쳤다고?”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쿠훌린에게 벌어진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테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고, 루나는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흑기사?”

“라이칸에게 들은 적 있습니다, 의장.”

벨레트가 루카스에게 부연 설명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정보 외의 것은 나오지 않았다.

“쿠훌린과 그의 가족을 구하려면 꼭 살림바르 왕국으로 가야 해요. 그러니까 배를······.”

“배를 빌려주세요! 제발요!”

루나가 끼어들며 외쳤다.

루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루카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쿠훌린은 우리와 오랜 관계가 있지. 나와 벨레트의 부친께서도 그의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었었고.”

“그럼······.”

루나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루카스가 씩 웃으며 벨레트를 돌아봤다.

“어이, 부단장.”

루카스의 목소리가 변했다. 직전까지의 위엄 가득한 말투가 아닌, 닳고 닳은 용병처럼.

그뿐 아니라 그는 벨레트를 ‘부단장’이라고 불렀다.

“출항 준비해. 작지만 가장 단단한 놈으로. 호위는 우리가 직접 한다.”

벨레트가 히죽 웃었다. 그 역시도 지금까지 보던 진중하고 근엄한 표정이 아니었다.

“알겠소. 단장.”

그렇게 말한 벨레트가 문을 열고 나갔다.

루나가 몇 번이나 루카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신이 난 벨레트의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저, 아직 어둠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을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것과 상관없이 돕는 거다. 오늘 밤에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지.”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오늘 밤에 출발하는 것은 무리였다.

카인을 데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호오. 푸른 매의 단장, 시니야스트레 말인가.”

“시니야스트레?”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티롤의 병사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아무튼 좋다. 사람을 보내 최대한 빨리 데려오도록 하마.”

루카스가 문을 열고 나가 경비병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경비병이 서둘러 복도 너머로 달려갔다. 루카스는 속전속결 화끈한 아저씨였다.

자리로 돌아온 루카스가 나를 보며 웃었다.

“자, 이제는 네가 가진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할 차례로군.”

***

소설에서 어둠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을 고안한 것은 사실 루나다.

루나는 암흑 속성과 대치되는 은월 속성을 지녔고, 쿠훌린처럼 약초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루나는 여러 실험 끝에 어둠의 군대를 상대할 특별한 약물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갈릭초, 달초롱꽃잎, 검은 소금, 해바라기 기름, 반야석 가루······.”

잡화점으로 돌아온 테오가 재료들을 찾았다. 지금쯤 용장 루카스의 명령으로 온 도시가 이 재료들을 구하고 있을 것이다.

재료는 총 11가지가 필요하지만 모두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렇게 만든 약물에 루나는 무려 ‘어둠 분쇄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의 어둠 분쇄기는 내가 만든 것으로 되었는데, 그 이름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둠 분쇄기 대신 ‘루나릭서(루나+엘릭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데미안. 루나릭서 말인데, 그거 데미안이 이름 붙인 거야?”

“응.”

“오. 오오오.”

루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야? 그 반응은.”

“아무것도 아냐. 헤헤.”

루나는 신이 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일이 잘 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긴, 나도 용장 루카스가 직접 황금의 검 용병단을 이끌고 우리를 호위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며칠 후 카인이 도착했다.

“말을 안 듣고 따라오더군.”

카인의 옆에는 세실과 족제비가 있었다.

“데미안.”

세실이 또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족제비는 족제비 같은 얼굴로 나를 봤다.

세실은 몰라도 족제비가 도움이 될까, 생각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데리고 가기로 했다.

사실은 통찰로 족제비의 스테이터스를 보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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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아킴 데샹 [14세], [Lv.37]

◎ 속성: [바람]

◎ 특성: [의리], [충성심], [울보], [의외의 용기], [발 빠른 회피], [활의 재능]

◎ 적성: [창술 Lv.2], [도끼술 Lv.2], [투척술 Lv.3], [검술 Lv.2], [궁술 Lv.5]

◎ 일반 스킬: [빠른 사격 Lv.3]

◎ 전용 스킬: [정밀 사격 Lv.4], [집중력 강화 Lv.2], [바람의 화살 L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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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족제비는 활에 관해서만큼은 정말로 천재인 듯하다. 37레벨에, 궁술 적성이 무려 5레벨이라니.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족제비가 ‘바람’ 속성을 개화했다는 것이다. 바람 속성은 궁수와는 대단히 궁합이 좋다. 활을 잘 쏘는 엘프들은 모두 바람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 생각에 족제비는 40레벨의 벽을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설 것 같다.

“덩치는?”

“원래는 덩치도 데려오려 했는데 마르셀이 아주 난리를 쳤어. 다 가버리면 단은 어떡하냐고. 그 녀석, 카인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엄청 뭐라 해. 진짜 잔소리꾼이라니까?”

투덜대는 족제비를 슬쩍 밀치며 카인이 말했다.

“네가 보낸 루나릭서, 효과는 확실한 거겠지.”

나는 랑베르 잡화점의 재료로 만든 루나릭서를 용장 루카스에게 부탁해 카인에게 보냈다. 원래는 카인을 도와 육로를 뚫으려 했는데, 계획이 바뀌어 보상 차원으로 보낸 것이다.

이것으로 푸른 매의 단은 어둠의 군대를 만나더라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고마운 줄 알아라.”

.

.

.

그날 밤 우리는 배에 올랐다.

루카스의 말대로 작지만 단단한 배였다. 커다란 범선에 비해 작다는 것이지, 우리 다섯이 타기에는 넉넉했다.

“자, 받아.”

나는 루나릭서가 담긴 유리병을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점성을 띤 이 누리끼리한 액체의 사용법은 간단하다.

무기에 바르고 적을 벤다. 적을 벨수록 액체는 점점 탁해지는데, 완전히 검어지면 효과가 사라진 것이므로 다시 발라야 한다. 그래서 소설 속의 루나는 검집에 부어둔 채 사용하기도 했다.

“나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루나가 중얼거렸다. 루나의 손에는 커다란 멀미 봉투가 들려 있었다.

소설에서 루나는 배를 탈 때마다 몹시 괴로워했다. 약초학에 해박한 그녀였지만 뱃멀미를 완화하는 약물은 끝내 개발하지 못했다.

루나가 불쌍한 표정으로 카인을 바라보자, 카인이 루나의 등을 두드려 줬다.

“곧 출발한다.”

루카스가 다가와 말했다.

잠시 후 그가 범선에 올랐고, 주위를 둘러싼 배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우리의 배도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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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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