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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8

78화 바람숲 (1)

78화 바람숲 (1)

“욱······. 우욱······.”

루나의 괴로운 신음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적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적을 조우할 경우, 황금의 검 용병단이 막아주는 동안 우리는 계속 전진하기로 했다.

“카인.”

물끄러미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카인에게 말했다.

“푸른 매의 단은 괜찮을 거야.”

“미안해할 필요 없다. 데미안.”

카인이 나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우리는 친구니까.”

뭐지. 저 자식.

나는 루나릭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였는데.

“카인······. 카인······.”

루나가 계속 카인을 찾았고, 카인은 말없이 루나의 등을 두드려 줬다.

족제비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봤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데미안.”

“응?”

“난. 멀미. 안 해.”

세실이 발뒤꿈치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귀찮게. 안 해.”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가 어둡다. 세실은 ‘밤눈’ 특성이 있으니 나보다 잘 보이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미니맵이 있다.

주위에 적대적 표식은 없었다.

나는 미니맵의 범위를 넓혀 위치와 방향을 확인했다. 순조롭게 이동하고 있다. 이대로 별 탈 없이 도착하면 좋으련만.

.

.

.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올 즈음, 나는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적대적 표식을 봤다.

“세실. 적이 오고 있어.”

내 말을 알아들은 세실이 훌쩍 몸을 날려 루카스의 범선으로 넘어갔다.

수 시간을 구역질하다가 겨우 잠든 루나가 놀라 눈을 떴다.

“적? 적이 온다고?”

“너는 그냥 누워있어.”

루나는 그럴 수 없다며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괴로운 신음을 뱉으며 주저앉았다. 범선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고, 잠시 후 세실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미니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표식의 수가 너무 적다. 적의 군함이라면 적어도 수십 개의 표식이 떠야 하는데.

게다가 표식은 뭉쳐있는 것이 아닌, 각기 따로 움직였다.

작은 배인가? 정찰용의?

스르륵. 스륵.

바다가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새벽 공기의 차가움이 내 머리를 맑게 깨웠다.

표식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정도로 근접했으면 육안으로도 보여야 하는데, 바다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눈이 부릅떠졌다.

“물 속이야!”

나의 외침과 동시에, 바다 속에서 기다란 것이 솟아올랐다. 수많은 빨판을 가진 거대한 촉수. 그것이 범선 한 척을 휘감으며 거센 물결을 일으켰다.

들썩이는 해수면 위로 오징어 머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지나치게 컸다. 범선과 맞먹을 정도로.

————————

◎ ■■에 잠식된 거대 오징어 [Lv.5■]

◎ 속성: [■■]

◎ 특성: [거대화], [암흑 ■■], [물리 저항], [고통 저항]

◎ 적성: [해양 적응 Lv.5], [수중 시야 Lv.4], [수중 ■■ Lv.4], [흑마력 감지 Lv.4]

◎ 일반 스킬: [■■ 헤엄 Lv.3]

◎ 전용 스킬: [어둠의 조류질주 Lv.2], [촉수의 고문 Lv.2], [■■ 분출 L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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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레벨이 넘는 괴물. 그러나 보이는 레벨보다 위험할 것이다. 모르가나의 흑마법에 잠식돼 더욱 강한 힘을 얻은 녀석이니까.

또 다른 거대 오징어들이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둠의 군대!”

용병들이 소리쳤다.

벨레트가 크게 외쳤다.

“검을 뽑아라!”

수십 자루의 검이 뽑히는 소음이 공기를 울렸다. 다행인 점은 저들 모두가 루나릭서를 지니고 있다는 것.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가거라! 데미안!”

거대 오징어의 촉수를 베어내며 벨레트가 외쳤다. 벨레트는 숙련된 소드 엑스퍼트다. 루나릭서의 도움 없이도 어둠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다.

“이놈들이 바로 어둠의 군대인가!”

옆의 범선에서는 루카스가 신들린 듯한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의 칼날에서 뻗어 나가는 오러 블레이드가 거대 오징어의 촉수를 자르고, 머리를 분쇄했다.

그는 페르디나 유일의 소드마스터였다.

“가라! 데미안! 루나! 으하하하하!”

루카스도 내게 소리쳤다. 그는 무척 신이 난 얼굴이었다.

오랜 행정 업무에 갇혀있던 그는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활기를 느끼는 듯했다.

“히익! 괴물이 이쪽으로 와!”

족제비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날아간 화살이 거대 오징어의 안구에 박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세 발의 화살이 추가로 같은 곳에 꽂히며 오징어의 안구를 곤죽처럼 터뜨렸다.

“우와······!”

루나가 구역질하던 것도 잊은 채 탄성을 질렀다.

“조조아킴! 너 대단한 궁수우웨에엑······!”

루나가 멀미 봉투에 구토하는 동안 카인은 측면을 기습하는 거대 오징어를 공격했다.

오징어의 머리가 마치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움푹 눌렸고, 검은 피를 터뜨렸다. 못 본 사이 카인이 지닌 소서러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봤나? 데미안.”

“못 봤어.”

“역시 솔직하지 못하군. 너는.”

터진 머리를 흐물거리면서도 오징어는 움직였다. 놈이 촉수를 뻗어 배를 공격했지만 재차 카인에게 몰매를 맞았다. 역시 카인은 강했다. 데려오기를 잘했다. 제발 적으로 돌아서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십여 개의 촉수가 동시에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배를 끝장낼 것처럼 휘둘러졌다.

“힉! 히익! 오지 마!”

볼품없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족제비의 화살은 연이어 촉수에 날아가 박혔다. 게다가 화살촉에는 모두 루나릭서가 발려 있는지, 효과도 상당했다. 언제 저렇게 발라놓은 거지? 부지런한 녀석.

세실도 나비처럼 공중을 날며 촉수들을 베었다. 세실은 단검을 주 무기로 활용했기에 적과 근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엄청난 몸놀림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나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혼돈을 아끼며, 동료들이 놓친 촉수를 검으로 베었다. 내 혼돈은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 힐링 블룸을 챙겨두기는 했지만, 동료들이 크게 다친다면 치유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나도······ 나도 도와야 하는데······!”

루나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다시금 확인했다.

루나는 배 위에서 무능력하다.

***

며칠 만에 배는 육지에 닿았다.

우리는 슬로바 왕국 남서쪽 끝단의 해안에 발을 디뎠다.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곳이었고, 루나는 하얀 모래를 움켜쥐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 괴로웠어. 흑흑······.”

루나는 돌아가는 길에는 제발 육로를 이용하자고 나를 꼬드겼다. 귀엣말로 ‘오빠’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 나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디나의 용병들은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루나. 루카스 의장은 소드마스터니까. 벨레트 단장도 상당한 실력자고.”

내 말대로, 그날 봤던 거대 오징어가 적의 전부였다면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 오징어들은 강했지만, 그렇다고 루카스 의장이나 벨레트 단장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디 후속 공격이 없었어야 할 텐데.

“다들 용병패 갖고 있지?”

루카스 의장은 우리에게 은패를 선물해 줬다. 이것은 국경을 넘거나, 신분을 증명해야 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그전까지 루나와 나는 쿠훌린에게 받은 동패를 사용했었다.

제 품을 뒤져보던 족제비가 힉! 기겁하더니 배로 달려갔다. 잠시 후 안도한 얼굴의 족제비가 은패를 내보이며 뛰어왔다.

“휴. 잃어버린 줄 알았네.”

“아깝다. 버리고 갈 기회였는데.”

“데미안······!”

말과 달리 나는 족제비를 데려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족제비는 해상전에서 크게 활약했다. 게다가 그때의 전투로 레벨업해 38레벨이 됐다.

‘40레벨의 벽을 넘으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지도.’

궁수와 마법사를 동료로 두고 싸워보니 확실히 느껴졌다. 이 멤버는 전투 효율이 높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전사(루나), 마법사(카인), 도적(세실), 궁수(족제비), 힐러(나)의 조합이다. 게다가 카인과 나는 언제든지 전사 포지션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우선은 말을 구해야지. 따라 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어.”

카인의 물음에 답하며, 나는 저 멀리 거인의 성벽처럼 솟은 산맥을 올려다봤다.

‘세르펜타인 산맥.’

단순히 직선거리로만 따지면 산맥을 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지만, 저 산맥은 인간이 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험준하다.

원래 서쪽의 발로리안 산맥과 한 몸이었던 세르펜타인 산맥은 고대 시대의 어떤 사건으로 둘로 나뉘었는데, 그때 발생한 압력이 산맥을 더욱 높고 가파르게 밀어 올렸다고 한다.

또한 그 현상이 산맥의 여러 생명체에게 영향을 끼쳤다. 소설에서도 세르펜타인 산맥의 몬스터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인간은 산맥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자연스레 세르펜타인 산맥에는 드워프족과 엘프족, 그리고 몇몇 수인족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

.

.

우리는 마을을 찾았지만, 인원수만큼의 말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한창인 티롤 왕국과 근접한 곳이다 보니 말들이 비싼 값에 팔려나간 모양이었다.

대륙의 공용 화폐인 제국 금화를 테오에게서 두둑이 받아온 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마리의 말을 구입하는 것에 성공한 나는 아예 마차를 사버렸다.

“와······! 나 마차 처음 타 봐!”

루나는 이 상황이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었다.

어쩌면 카인과 함께 앉아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샘이 났다. 카인에게 루나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루나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그리 살갑게 굴더니.

“안. 피곤해?”

마부석에 앉은 내게 세실이 물었다.

객실에 앉은 다른 동료들과 달리 세실은 내 옆의 불편한 자리에 앉았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족제비가 종종 세실을 불렀지만, 그때마다 세실은 손날을 세워 들며 족제비를 위협했다.

“응. 괜찮아.”

“피곤하면. 말해.”

“왜?”

“어깨. 주. 주물러······.”

말하다가 멈춘 세실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귀가 또 빨개졌다.

“알았어. 피곤하면 이야기할게.”

“으. 응.”

세실이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세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동안 카인에게 괴롭힘당하느라 힘들었겠지.

족제비가 배고프다고 칭얼대길래 마을에서 산 복숭아를 몇 개 꺼내줬다. 족제비가 환호했다. 나는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기에 마차 모는 것에 집중했다.

“데미안.”

고개를 돌리자 먹기 좋게 자른 복숭아를 내미는 세실이 보였다.

확실히 세실의 단검술은 대단했다.

복숭아 깎는 기계가 깎아놓은 것처럼 표면이 매끄럽다.

그런데 저 단검, 거대 오징어 썰던 거 아닌가.

“깨끗한. 단검.”

나는 복숭아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복숭아는 무척 달았다.

내가 맛있다고 하자 눈을 빛낸 세실이 엄청난 속도로 복숭아 껍질을 깎았다.

“데미안. 여기.”

알아서 내 입에 적당한 크기의 복숭아 조각을 넣어 주니 참 편했다.

세실은 평범한 집에서 자랐다면 과일 판매원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잡화점 일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세실.”

“응?”

“나중에, 아주 나중에 우리에게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나면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해 볼까? 예를 들어 랑베르 잡화점 32호점 같은 거 말이야.”

툭, 세실의 손에서 복숭아가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바닥에 떨어진 복숭아를 집어 든 세실이 작게 말했다.

“하. 함께······?”

“응. 함께.”

“둘이서······?”

나는 세실을 보며 웃었다.

“작은 가게면 둘이서 운영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니면 족제비도.”

“족제비. 안 돼.”

“세, 세실!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나만 빼놓으려고······!”

족제비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실이 빙글, 뒤돌아 족제비의 이마를 손날로 때리려 했다. 그때였다.

나는 세실의 눈빛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을 봤다. 언젠가 루나도 말한 적이 있었던 살수의 눈.

치릿!

세실의 단검이 날아드는 무언가를 베었다. 그것이 미묘하게 방향을 꺾어 마차의 바닥에 박혔다.

반으로 잘린 화살.

그런데 모양이 익숙했다.

“히익! 내, 내 화살이잖아!”

“무슨 일이야!”

루나와 카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하늘에 떠올랐다. 먹구름처럼 하늘에 운집하던 그것이 포물선을 그리며 우리에게 쇄도했다.

“내게 맡겨라.”

카인의 눈빛이 파릇하게 변했다. 우리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들이 부르르, 진동하더니 수직으로 낙하해 지면에 꽂혔다.

나는 미니맵을 봤다. 적대적 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립적 표식으로 바꾸자 보였다. 정면, 그리고 좌우와 후방에서 수십 개의 표식이 접근하고 있다.

“포위됐어.”

“힉!”

“족제비. 저들이 왜 네 화살을 가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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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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