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79

78. 약혼관계 – 형벌

“이젠… 이젠 내가 더 강해! 그런데… 그런데 넌…!”

자존심과 함께 옷을 벗었던 밤, 속곳 차림으로 뛰쳐나가 주저앉은 레나는 펑펑 울었다.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저런 나쁜 놈과 약혼했다니.

내가 미친 년이다.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봤다.

이를 악물고 욕설과 저주를 쏟아낸 레나, 하지만 술기운이 가실수록 머리가 가라앉았다.

그를 포기할 수가 없다.

레오는 그녀에게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어야만 하는 남자였다.

레나는 어둠 속에서 골똘히 생각했다. 레오의 행동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길 한참, 이유가 떠올랐다.

그는 검술 실력이 훌쩍 뛰어버린 뒤로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였다. 특히 노구화호를 잡다가 그녀가 큰 실수를 범한 이후로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 내 실력이 모자라서 날 멀리하는 거야.’

레오는 실력이 한참 못 미치는 내게 실망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돌변할 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레오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노엘 아저씨께 검술을 배우기 전만 하더라도 레오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수도에서 온 샌님이 낯을 가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실력 차이가 극심해서 나를 싫어했던 거다.

맞다. 분명하다. 검을 배우면서 실력이 나아질수록 레오와 점점 친해졌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준이 됐을 무렵에… 우린 약혼했다.

‘날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했어. 레오는… 내가 다시 한번 따라와 주길 바라는 거야. 그래. 맞아. 그렇지 않으면 왜 수행을 함께 나왔겠어?’

그의 냉정한 태도가 야속했으나 레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레오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지만, 그녀가 보기에 따라잡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춥다.

속곳 차림으로 차가운 복도에 앉아있던 레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등을 돌리고 있는 레오를 쏘아보았다.

나쁜 놈. 말이라도 좀 하지.

그렇게 내 실력이 불만이면 좀 도와주지…

그녀는 바닥에 모포를 깔고, 독기를 가슴에 품은 채 잠이 들었다.

그 이후로 레나는 검술 훈련에 맹진했다. 브라이언의 검술을 익히고, 사이먼 백작가의 기사들과 대련하며 실력을 키웠다.

그때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레오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희망은 루테티아에서 홀로 검술을 수련하면서 점차 꺼져갔다.

‘대체 레오는 어떻게 이 벽을 뚫었지?’ ─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만의 검술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까마득히 오래 걸릴 듯했다.

크리오 프렐릭이라는 귀족과 대련하며 그의 독특한 검술에서 힌트를 찾았을 때는 정말 기뻤으나, 여전히 뭔가 잡힐 듯 말 듯 잡히질 않았다.

레나는 초조해졌다. 레오는 매번 숙소에서 나갈 때마다 그녀를 우울하게 바라보다가 휙 사라졌다. 몰래 따라가 보니 그는 술을 진탕 마시고 있었다.

‘레오, 미안해.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레오는 결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나 답답하면 저렇게 술을 퍼마실까.

‘답답하면 좀 도와주지. 나쁜 놈.’

그러던 어느 주말, 크리오 프렐릭을 호위하던 한 할아버지가 다른 분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코린 경이라 소개한 그 할아버지는 레나의 검술을 며칠 구경하더니 “쯧”, 혀를 찼다.

코린 경은 대륙 남부에서 개종하지 않은 수많은 야만인과 싸우며 자신의 검술을 완성한 성전사였다.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 성전사 지망생들을 오래도록 가르친 그는 온화한 환경에서 정립된 검술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아가씨의 검술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재능은 있는지 다른 사람의 검술을 다수 받아들인 것 같았으나, 그것은 결국 남의 검술일 따름이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 말했다.

“검을 그렇게 잡다하게 휘둘러선 안 됩니다. 남의 검술을 참고하는 건 좋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드니 저와 대련을 해보시지요.”

레나는 투박하고 직설적인 그의 말투가 조금 불쾌했지만,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쾌히 승낙했다.

그와의 대련은… 대련이 아니었다.

코린 경은 정말, 정말로 레나를 죽이려 했다.

그녀가 남의 검술을 써보겠다고 허점을 보이는 순간 코린 경의 검이 가차 없이 날아들었다.

레나는 그가 휘두른 ‘검면’에 수없이 얻어맞았다.

얻어맞기 직전까지 ‘검날’로 날아드는 것에 놀라 심장이 덜컹거렸다.

코린 경은 노엘 덱스터처럼 레나를 뻥 걷어차 대련을 끝마치며 물었다.

“뭔가 느껴지십니까?”

“허억. 허억… 그, 글쎄요?”

“그렇다면 한 번 더 해보죠. 하지만 명심하세요.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오싹함을 느꼈을까?

레나는 문득 자신이 남의 검술에 지나치게 연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사용하는 검술의 근간은 노엘 덱스터의 검술에 있었다.

노엘 아저씨의 검술에 다른 사람의 검술을 섞는다면 몰라도, 무작정 따라 하려고 하니 중구난방이 된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자 그녀의 검술은 몰라보게 변했다. 코린 경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제야 처음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레나는 레오에게 말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드디어 널 따라잡았노라고. 못된 녀석아!

숙소로 돌아와 보니, 레오는 만취해 잠들어 있었다.

깨우기는 미안하다.

방으로 돌아온 레나는 내일이면 그를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에 오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레오는 분명히 기뻐할 거다.

이제는 어느 기사단에 가더라도 우수한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레오가 너무 빨리 성취를 이루는 바람에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함께 기사가 되어 결혼하고자 하는 그녀의 꿈이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술집으로 달려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이젠… 이젠 내가 더 강해! 그런데… 그런데 넌…!”

레오는 씩씩거리는 레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역시 레나는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토록 못되게 굴었음에도.

그녀에게 사과하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민서, 그 개새끼가 파혼하겠답시고 또 레나를 힘들게 할 터였다.

기어이 ‘내’ 레나를 왕자와 결혼시켜 게임을 끝내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레오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한 가지를 더 확인해야 했다.

“레나. 왜 크리오 프렐릭에게 가지 않았지?”

“…뭔 소리야.”

“그 사람은 제롬 신성왕국의 왕자야. 크리오 프렐릭은 가명이야. 그는 클레오 드 프레드릭이야.”

“그런데 뭐 어쩌라고.”

“넌 그 왕자랑 친해졌잖아. 잘하면 공주가 될 수도 있어.”

“뭐라고?!”

레나의 표정이 황당함을 넘어 멍청해졌다.

그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그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더니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쏟아졌다.

“이 미친 자식이! 너! 너! 설마! 나한테 지금껏 그랬던 이유가!”

그녀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눈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검을 뽑으려는 듯 허리춤을 매만졌으나 검은 이미 깨져버리고 없었다.

그녀가 레오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아!”

됐다. 끝났다.

레오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이걸로 민서의 변명거리를 모조리 틀어막았다.

왕자와 충분히 친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레나의 이 격한 반응 앞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그는 날아오는 주먹을 기다리며 무릎 꿇고 사과할 준비를 했다.

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

[ 레나와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

‘이런 씨발!’

뺨 가까이 다가온 레나의 주먹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익숙한 어둠이 깔리며 텍스트가 주르륵 쏟아졌다.

[ 레나 키우기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레나 아이나르 ]

[ 최종직업 : 아이나르 부족의 대전사 ]

[ 결혼 상대 : 미혼 ]

[ 레오 덱스터 ]

[ 최종직업 : 용병 ]

[ 결혼 상대 : 미혼 ]

[ 약혼관계 엔딩 : 파혼 ]

– 에이브릴 성에서 태어난 레나 아이나르는 행복한 유년기를… (중략) …루테티아에서 레오와 파혼한 그녀는 고향, 에이브릴 성으로 돌아왔다. 레나는 검을 버리고 부족의 전사로서 평생을 살았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

– 수도 바르나울에서 태어난 레오 덱스터는 행복한 유년기를… (중략) …레오는 사과하려 했으나 레나는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에이브릴 성을 떠나 수도 바르나울로 갔다. 덱스터 가문의 집에서 머물며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용병 생활을 했다.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레오는 일찍 죽었다. –

[ 거지남매 시나리오 엔딩이 변경되었습니다. ]

+ 루티나 왕성에서 태어난 레오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레나와 넓은 들판에 숨겨졌… (중략) …정체를 들키고 추격당하던 레오는 오르빌에서 베나르 타티안 후작의 기사, 이렌느의 손에 죽었다. +

부족의 대전사가 된 레나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녀는 거대한 마수 위에 걸터앉아 호탕하게 웃고 있었으나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레오는 둥둥 떠오른 구체가 되어 울컥하는 심정을 가라앉혔다.

레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자존심이 센 그녀가 여기까지 참아준 것만 해도 용한 일이었다.

‘알겠냐. 이 멍청한 놈아. 우리 레… 아니, 레나는 절대 왕자 따위한테 홀려 넘어갈 여자가 아니야.’

레오는 민서에게 마지막 전언을 남기기 위해 생각을 또박또박 정리했다.

‘레나를 내버려 둬. 이용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 한 번만 더 레나를 이용하려 했다간 나는 네 말을 듣지 않겠어.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라. 개새끼야.’

그의 정신은 서서히 사라지고, 민서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

민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회차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난 소꿉친구 시나리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어버리면서 조급했었다.

무엇이 됐건 간에 주도적인 움직임을 보이려 했다.

왕이 될 가망이 보이지 않으니… 레나를 가장 간단하게 공주로 만들 수 있는 파혼을 시도했다.

‘……’

레오가 되어 레나 아이나르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무작정 파혼을 진행해나갔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레나는 레오를 포기하지 않았고, 왕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이 있던 것은 검술뿐이었고, 그마저도 레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클리어에 정신이 팔려 레나 아이나르라는 ‘사람’을 잊어버렸다.

그녀를 ‘도구’처럼 다루었다.

‘……’

레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떠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회차 제한과 사망 횟수 제한 앞에서 무력하게 흔들렸다. 당장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이기적으로 레나를 이용하려 들었다.

그조차도 변명이었다. 민서도 그걸 알고 있었다.

모든 레오들은 언제나 레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엔딩이 오면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나를 위해 희생했다.

교회에서 쫓겨나거나, 팔을 잃고 슬퍼하는 레나를 위해 기꺼이 엔딩을 앞당겼다.

그녀의 슬픔을 덜어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민서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채하를 위해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고작 엔딩 이후에 잘 살았다는 한마디 글자를 위해?

이번 레오도 레나를 위해 희생했다.

결국, 레나를 행복하게 해줄 열쇠를 쥔 사람은 민서였기에… 자기애가 넘치는 그 레오 덱스터조차 앞으로의 레나 아이나르를 위해 민서에게 정보와 경고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렇게 민서에게 전언을 남긴 레오는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레오도 ‘레나를 잘 부탁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들의 바람은 단 한 가지였다.

– 레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자신들을 어떻게 해달라는 말은 없었다.

오직 레나만…

‘……’

민서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레오의 마지막 전언을 곱씹으며 반성했다.

어느새 사진과 텍스트들은 모두 사라지고, 다음을 알리는 글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 레나 키우기를 클리어하지 못하셨습니다. ]

[ 다시 시작됩니다. ]

시나리오 보상은 없었다.

민서는 그 형벌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