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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9

79화 바람숲 (2)

79화 바람숲 (2)

“모, 몰라······!”

족제비가 모른다면 남은 이유는 하나다. 죽은 티롤 병사의 몸에서 뽑아냈겠지.

족제비의 저 잎사귀 그림은 너무 어설퍼서 따라 그리기도 어렵다. 굳이 저런 것을 따라 그릴 이유도 없고.

“티롤군인가?”

카인도 나와 같은 것을 떠올린 듯했다.

다행히 그들은 더 이상 화살 공격을 하고 있지 않았다.

‘카인의 힘을 보고 놀란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카인이 이렇게 대응할 것을 알고?’

최초의 화살도 공격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화살은 일종의 메시지다. 족제비의 화살을 통해, 자신들이 우리를 알고 있다고 알린 것이겠지.

어찌 됐든 저들이 우리를 특정한 것은 분명하다. 족제비에게 원한을 가진 자인가?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달리는 방향을 유지했다. 어차피 달아날 곳은 없다.

머지않아 우리 앞을 가로막은 자들을 봤을 때, 나는 놀라운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외형은 마치 오래된 책에서 튀어나온 삽화 같았다. 길고 가느다란 몸매. 자연과 어우러지는 듯한 고고하고 우아한 복장.

“엘프?”

카인의 말대로, 그들은 엘프였다.

그들의 피부는 한 번도 햇볕에 그을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맑았다. 가로로 길게 빛나는 눈동자는 깊은 숲을 보는 듯했고, 섬세한 콧날과 입술은 그들의 작은 얼굴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등 뒤에는 숲의 빛과 같은 긴 녹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마차를 세웠다. 주위에는 서른 명이 넘는 엘프가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딱 봐도 이 무리의 대장 같았다.

“시니야스트레.”

용장 루카스에게 들었었다. 티롤군이 카인을 부르는 이름.

카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렇게 많은 엘프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는 조금의 위협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나와 세실, 루나, 족제비도 마차에서 내려섰다.

“젤렌루치니크.”

대장 엘프가 족제비를 보며 말했다. 족제비가 흠칫 어깨를 떨며 내 뒤에 숨었다.

세실은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튀어 나가 싸울 생각이겠지.

반면 루나는 두려움이나 경계심보다는 신기한 눈으로 엘프를 바라봤다. ‘와, 예쁘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크라소타스베타.”

“크라소타스베타.”

“오슬레피텔나야 크라소타.”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눈은 루나와 세실을 향해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엘프들을 보며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왜 우리를 공격한 거지? 공용어로 대답해.”

무한회귀 세계관의 엘프들은 대부분 공용어를 할 줄 안다. 물론 저들에게 우리를 공격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이기도 했다.

“시니야스트레에게 용무가 있다.”

“시니야스트레가 무슨 뜻이지?”

“푸른 매.”

뭐야. 그런 거였나.

카인이 대장 엘프에게 다가가자, 주위의 엘프들이 일제히 활을 들어 카인을 겨눴다.

대장 엘프가 한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활을 내려라.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웃기는군. 그렇게 화살을 쏘아놓고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그대의 능력을 이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무례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시니야스트레, 아니 푸른 매의 단장, 카인.”

“네 이름은?”

“야니카.”

야니카?

나는 야니카라는 이름을 안다.

세르펜타인 산맥의 바람숲에 사는 ‘제피르나 엘프족’의 족장. 아니, 지금은 족장이 되기 전인가.

저 엘프가 정말로 야니카가 맞는다면 저항은 무의미하다. 야니카는 ‘아처로드’. 기사에 비유하자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니까.

“나는 어떤 이유로 오를리안 왕국과 티롤 왕국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했었다. 그곳에서 그대와 젤렌루치니크를 보았지.”

“젤렌루치니크?”

“초록잎의 궁수 말이다.”

야니카가 눈동자를 굴려 족제비를 봤다.

“나는 그대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다.”

족제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카인이 말했다.

“전장에서 엘프를 본 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너였던 모양이군.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아까도 말했듯, 그대에게 용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와 젤렌루치니크가 전장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대들을 추적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 우리는 해로를 타고 움직였다. 배를 타고 쫓아오기라도 했다는 건가.”

야니카가 웃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하지 말도록. 나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으니.”

야니카가 나직이 엘프어를 읊조렸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자그만 회오리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손가락, 목, 어깨, 허리를 감싸며 움직이다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놀라운 정령 친화력이다. 역시 저자는 야니카 제피르나가 맞는 것 같다. 제피르나 엘프족은 바람의 정령과 무척 가까운 사이니까.

그렇다면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저 활이 바로 ‘바람추적자’인가.

“바람이 알려주었다. 그대가 향하는 곳을.”

“흥미롭군.”

“시니야스트레. 부디 우리와 함께 가주었으면 한다.”

“어디를 말이지?”

“바람숲. 우리 제피르나 혈족의 터전으로.”

카인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를 알고 싶군.”

“그대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능력을 너희를 위해 사용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내게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니 이만 비켜라. 그게 싫다면.”

카인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실력행사도 상관없다.”

저런 미친놈이.

나는 재빠르게 카인의 어깨를 잡았다. 카인이 나를 돌아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야니카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은원(恩怨)을 잊지 않는 엘프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분명 우리에게 보답이 있을 것이다.

‘산맥을 넘는 지름길을 제공한다든지.’

게다가 세르펜타인 산맥에는 몇 개의 ‘혼돈의 조각’이 있다.

소설에서는 카인이 습득했지만, 어쩌면 내가 슬쩍할 수 있지 않을까. 카론 늪지의 혼돈처럼.

그래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

***

우리는 엘프들을 따라 세르펜타인 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야니카가 이끄는 30여 명의 엘프는 우아하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숲속 길을 안내했다. 나는 그 움직임이 낯설지 않았다. 내게도 그와 비슷한 능력이 있으니까. 자연 감응.

“이렇게 높은 곳은 처음 올라가 봐.”

족제비의 말대로 세르펜타인 산맥은 높았다. 눈새를 만났던 하얀 산맥보다도 더욱.

산맥을 오를수록 숲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것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높이 솟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잎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화려한 빛의 춤을 추었다. 먼지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꼬리를 흔들었다.

역시나 루나는 정신없이 주위를 구경하며 걸었다. 세실도 신기한 눈으로 풍경을 바라봤다.

“잠시 쉬었다 가지.”

야니카가 말했다.

고된 길이었지만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야니카가 우리를 배려해 되도록 편한 길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상하게 몸이 가볍지 않니? 경치가 좋아서 그런가?”

루나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자연 감응을 발현하지 않았는데도 묘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치 엘프처럼.

“바람의 정령이 그대들을 돕고 있다.”

야니카의 말로는, 지금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정령들이 날고 있다고 한다. 그 정령들이 우리의 등과 발을 부드럽게 밀어주어 한결 움직임을 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까부터 먼지가 기분이 좋아 보였던 건가?

“그러나 예전 같지는 않다. 숲이 병들고 있기 때문이지.”

야니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연 감응을 발현해 봤다. 그러자 보였다. 정말로 우리 주위를 정령이 날고 있었다.

“그대는······?”

야니카가 눈을 동글게 뜨며 나를 봤다.

카인이 끼어들었다.

“내게 부탁할 내용이라는 것은 끝까지 숨길 생각인가.”

“숨기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해 주었으면 한다. 시니야스트레.”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라면 어쩔 셈이지? 약속도 없었던 것이 되는 건가.”

우리는 제피르나 엘프족을 돕는 대가로, 루네카 왕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 받기로 했다. 루네카 왕국은 살림바르 왕국을 향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또한 야니카는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할 물건을 챙겨주겠다고 했다. 마차를 버린 것에 대한 변상 차원이기도 했는데, 돈에 여유가 있는 내게는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엘프의 물건은 귀하다. 최대한 많이 뜯어낼 생각이다.

실은 이들이 가진 물건 중 꼭 갖고 싶은 것이 있다. 하지만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분위기가 안 좋아질까 봐 참는 중이다.

“그렇지 않다 시니야스트레. 만약 그대가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며칠간 산맥을 걸으며 우리는 야니카와 조금 가까워졌다.

종종 엘프들이 루나와 세실을 보며 소곤거렸다.

“크라소타스베타.”

“오슬레피텔나야 크라소타.”

그 말의 뜻을 야니카에게 묻자, 야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말이다. 크라소타스베타는 ‘세상의 아름다움’, 오슬레피텔나야 크라소타는 ‘눈부신 아름다움’이라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루나가 헤헤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세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실의 귀가 새빨개진 것을 봤다.

확실히 루나와 세실의 미모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나와 세실은 무한회귀 세계관의 두 번째 히로인인 ‘아리엘’과 더불어,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불리는 인물이니까.

‘아리엘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리엘은 제국의 식민지인 ‘레나르 보호령’의 플랑브아즈 공작 가문의 영애다.

레나르 보호령은 과거에는 독립된 왕국이었으나 제국에게 흡수, 합병됐다. 그러나 여전히 레나르 왕은 군주로 인정받으며 자치권을 행사한다. 물론 상당량의 세금을 황제에게 바쳐야 하지만.

그런 레나르 보호령에서 왕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는 가문이 플랑브아즈 공작 가문이다. 이유는 왕국 시절부터 빼어난 마법사를 여럿 배출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아리엘은 역대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인지, 아리엘은 상당히 오만한 성향을 지녔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콧대 높은 공주’ 이미지. 그런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고개 숙인 대상이 바로 카인이었다.

.

.

.

“도착했다.”

바람숲에 발을 디디자마자, 나는 이곳이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숲과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제피르나 엘프족의 거주지가 보였다. 그들의 집은 주위 풍경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숲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초록 잎사귀가 마치 집을 감싸 안듯 둘러싸인 것이 신기했다.

“······어라?”

“왜. 족제비.”

“아, 아무것도 아니야 데미안.”

족제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바람숲의 엘프들이 조용히 우리를 관찰했다. 그들에게 다가간 야니카가 엘프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두 명의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야니카는 많은 엘프들에게 존경받는 듯 보였다.

“따라와라.”

야니카를 따라 거주지를 통과한 우리는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향긋한 나무와 흙의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우며 나의 감각을 깨웠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숲의 가장 깊은 곳, 주위의 나무와는 확연히 다른 빛을 띠는 나무가 서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기는 작지만, 그 나무는 내가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세계수?”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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