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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0

80화 바람숲 (3)

80화 바람숲 (3)

분명했다.

눈앞의 은빛 나무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이다.

그러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던 은월섬의 세계수와 달리, 이 나무는 내 키의 두 배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잎새도 없었다.

게다가 나무 곳곳이 검게 얼룩져 있다. 불에 탄 것처럼.

“세계수?”

야니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봤다. 제피르나 엘프들은 이 나무가 세계수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주머니 속의 먼지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이거였나. 산맥을 오르는 동안 먼지의 기분이 좋아 보였던 이유가.

“아리아나스.”

나무를 올려다보며 야니카가 말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일며 몇 명의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유독 키가 작은 엘프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어린 소녀였다.

야니카가 소녀에게 예를 표했고, 소녀도 마주 예를 표했다.

“아리아나스카야. 어머니 나무께서 예지하신 소서러를 데려왔습니다.”

야니카의 말에 소녀는 신비로운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한 명 한 명 바라봤다. 엘프 중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였다.

“두바 소르세레라 즈다스.”

소녀의 목소리는 산들바람 같았다.

야니카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추토 브이 스카잘리? 에토 프라브다?”

“야 추프스튜 에토. 두바 소르세레라 즈다스.”

야니카가 멍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봤다. 뭐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라고.

대화를 마친 야니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바람숲을 수호하는 어머니 나무 ‘아리아나스’다. 시니야스트레. 네 눈에는 무엇이 보이지?”

“은빛의 나무. 그리고 검은 얼룩이 보이는군.”

“검은 얼룩?”

족제비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뭐야. 족제비의 눈에는 얼룩이 보이지 않는 건가?

야니카가 카인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카인이 이어 말했다.

“이 나무는 병들었다. 검은 얼룩이 나무의 목을 조르고 있군. 오는 길에 숲에서 느낀 기운과 비슷하다.”

내 생각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저 나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을 해결한 적이 있으니까. 혹한의 땅에서.

“원인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 것 같군. 하지만 그뿐이다. 내게는 이 나무와 숲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카인은 평범한 소서러가 아니다. 그의 힘은 내가 지닌 혼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강하다. 거대 오징어와의 전투에서도 카인은 능력의 한계가 없는 것처럼 힘을 발현했었다.

“한 번 시도해 봐 카인. 밑져야 본전이잖아.”

나는 카인의 힘을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후우, 한숨을 뱉은 카인이 야니카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나무의 얼룩을 강제로 도려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너희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아니. 불가능하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머니 나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자칫 나무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하겠나?”

엘프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야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 자신이 멈추라고 말하면 그 즉시 멈춰달라고 덧붙였다.

카인이 아리아나스를 향해 다가갔다.

세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선 카인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의 몸이 진동하며 망토가 휘날렸다.

“에토 실라 소르세레라!”

“톳, 크토 포글로틸 드흐라니예 데모나······!”

“보제 모이!”

엘프들이 소리쳤고, 파짓! 검은 얼룩 하나가 깎여 날아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조각칼로 도려낸 것처럼. 이어 몇 개의 얼룩이 더 사라졌다. 나무의 은빛이 급속도로 탁해지기 시작했다.

아리아나스가 울부짖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야니카가 멈추라고 소리쳤고, 그 즉시 카인이 힘의 발현을 멈췄다.

상처 입은 세계수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모두 했다. 그러니 약속은 지켜줬으면 좋겠군.”

야니카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루나가 말했다.

“이번에는 데미안이 해보면 어때? 지난번에도흐읍······! 읍읍······!”

나는 루나의 입을 막았다.

물론 나는 저 나무를 치유할 방법을 안다. 성공할 것이라 거의 백 퍼센트 확신한다. 그러나 추가적인 대가 없이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카인에게 먼저 시도해 보라고 했다. 물론 카인이 성공한다면 그것대로 괜찮은 성과라고 생각했다. 카인의 능력을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카인은 실패했다. 조금의 얼룩은 제거했지만 누가 봐도 아리아나스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마취 없이 수술을 집도하다가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득 인기척에 아래를 보니, 엘프 소녀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뭐야. 공용어를 할 줄 알잖아.

“제발.”

소녀를 보니 디네베가 떠올랐다.

디네베를 닮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역할이 비슷할 거다. 야니카는 소녀를 ‘아리아나스카야’라고 불렀다. 아마도 세계수의 신녀와 유사한 의미일 테지.

“네 이름은?”

“님피엘.”

보면 볼수록 디네베 같다.

그런데 말투는 조금 세실과 비슷한데. 아직 공용어가 익숙지 않은 건가.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브이 토제 소르세레르.”

“뭐라고?”

님피엘이 당황한 얼굴로 정정했다.

“······당신. 소서러니까요.”

역시 알고 있었나.

처음에 야니카와 님피엘이 나눈 대화도 나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하긴, 디네베도 한눈에 내가 지닌 힘을 알아봤으니까. 그런데 얘는 먼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옆을 돌아보니 카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은 또.

나는 웅크려 앉아 님피엘과 눈높이를 맞췄다.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러면 너희들은 내게 뭘 해줄 거야?”

야니카가 나섰다.

“대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그건 카인, 아니 저기 시니야스트레와 나눈 내용이지. 나와 이야기한 것은 아니잖아.”

야니카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진땀을 흘렸다.

역시 이 세계의 엘프는 순수하다.

“싫으면 관두고. 그러면 약속했던 대가만 받고 우리는 떠나겠어. 아, 루네카 왕국까지 안내해 주기로 했던 것은 안 잊었지?”

야니카와 님피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내가 속으로 의기양양해하고 있는데, 루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데미안. 너무한 거 아니니? 그냥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어차피 받기로 한 대가도 적지 않고. 저 엘프들 얼굴 좀 봐봐. 근심걱정이 가득하다고. 더구나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대가를 요구하다니. 나는 보는 내내 디네베가 떠오르던데······.”

디네베의 이야기를 꺼내며 루나는 살짝 울먹거렸다.

역시 루나는 착하다. 소설에서도 루나는 선(善)의 대명사처럼 불렸으니까. 아니, 굳이 따지자면 진선미(眞善美)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해야겠지.

“루나. 나는 저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야. 도우려는 거지. 우리는 놀이 삼아 대륙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 손에 쿠훌린, 리아논, 디네베의 목숨이 걸려 있어. 어쩌면 엘리샤까지도. 그리고 우리는 약해. 만약 흑기사가 다시 한번 우리를 습격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그, 그건······.”

“우리는 강해져야 해. 살림바르 왕국에서 마주할 위험도 만만치는 않을 거야. 물론 쿠훌린과 엘리샤가 있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우리 곁에 없어. 우리가 더 강해져서 그들의 역할을 해야 해. 그래야 소중한 이들을 구할 수 있어.”

루나가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주먹을 꼬옥 쥐고, 어깨를 움찔대고,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엘프들을 등쳐먹으려는 게 아니야. 제피르나 엘프족에게 바람숲은 그들의 터전이자 모든 것이야.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는 종족이니까. 나는 그들의 터전을 지켜주려는 거야.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추가 보상은 요구해도 되지 않겠어?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욱.”

어른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루나가 두 손을 모아쥐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루나는 자신의 발언을 반성하고 있다.

“······네 말이 맞아 데미안. 내가 경솔했어.”

“아니야.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사실 안심했어.”

루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선한 인물이야. 그 선한 마음이 너의 외면과 내면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것은 나는 갖지 못한 힘이야. 아니,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없는 능력이지.”

루나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정말로 여동생 같아서, 나는 루나의 머리를 헝클듯 쓰다듬었다.

“네가 그 선한 마음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너의 그런 면이 좋은 거니까.”

소설에서 루나라는 희망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누구도 카인을 견제하지 못했을 거다. 세실도, 아리엘도, 모두 카인의 편에서 움직였으니까.

오직 루나만이 카인이 어두운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경계하고, 막으려 노력했다. 비록 그 결과는 끔찍했지만.

나는 그와 같은 결과가 오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뭐, 뭐뭐뭐야 갑자기······! 그, 그런 말을······!”

응?

“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대는 게 어딨어. 바, 바바반칙이야 이건······!”

루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체 뭐지. 이 반응은.

“오, 오빠인 척하더니······!”

끄히잉! 신음을 흘린 루나가 조르르 달려가 님피엘을 끌어안았다. 놀란 엘프들이 루나에게 활을 겨누는 것을 야니카가 막았다. 세실, 카인, 족제비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주었다.

야니카가 말했다.

“원하는 대가가 무엇이지? 시니야오코네.”

시니야오코네?

그건 또 뭐야.

“푸른 눈이라는 뜻이다.”

야니카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아마도 내가 보상을 이야기하면 야니카의 저 미소는 한순간에 날아가겠지.

그러나 당당히 요구할 생각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로 내주지 않을 것이 뻔했고, 관계가 악화될 것 같아 말하지 않았었다. 뭐, 그때는 이들이 카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녹음심장.”

그 순간, 자리에 있는 모든 엘프의 표정이 변했다.

야니카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녹음심장에 대해 알고 있지?”

“소서러니까.”

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이들이 확인할 방법은 없다. 소서러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극히 희소한 존재다.

어쩌면 님피엘도 디네베처럼 소서러인지 모른다. 하지만 님피엘은 먼지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디네베만큼의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다는 거겠지.

“브이 프로시테 글루비타치야?”

“네보즈모즈노······!”

“에토 네도푸스티모!”

엘프들이 웅성거렸다. 화내는 이도 있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요구한 것은 이들의 삼대(三大) 보물 중 하나니까.

녹음심장(綠陰心臟)은 제피르나 엘프족의 정수가 담긴 반지다.

착용 효과는 ‘필요시, 더욱 명확하고 효과적인 집중을 가능하게 하는 것’.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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