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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1

81화 생명과 파괴 (1)

81화 생명과 파괴 (1)

제피르나 엘프족의 삼대(三大) 보물.

하나는 야니카가 지닌 활, 바람추적자.

다른 하나는 현재의 족장이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활, 바람송곳니.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가 바로.

‘녹음심장.’

앞서 설명한 것처럼, 녹음심장은 착용자의 집중력을 상승시키는 물건이다.

그동안 혼돈을 제어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내게는 보다 향상된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나의 혼돈을 강력하게 발현하기 위해서도. 여러 혼돈을 동시에 제어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어쩌면, 향상된 집중력은 아스트레아의 천칭을 내 의지로 기울이는 것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녹음심장을 내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니야오코네.”

“그렇다면 협상은 결렬인가?”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녹음심장을 꼭 갖고 싶었다.

물론 저들이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저들은 엘프. 이런 이유로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족장과 의논할 시간을 주지 않겠나.”

“그렇게 해.”

“따라와라. 머무를 곳을 안내하지.”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

.

.

“데, 데미안. 너 완전 사기꾼 같아. 나, 나 같으면 그렇게 뻔뻔하게 요구하지는 못했을 거 같은데······.”

우리는 야니카가 안내한 방에 모여 앉아 있었다.

“족제비.”

“응?”

“그래서 테오가 너한테 잡화점 일을 안 맡기는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족제비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조금 전 엘프들이 방에 찾아와 여행에 도움 되는 물건들을 놓고 갔다.

그런데 그 물건이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 구름걸음 장화

[바람의 기운이 부여된 특별한 장화.

착용자에게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가벼움을 선사한다.

착용자의 이동 속도와 민첩성을 향상시킨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부상을 방지하는 쿠션 효과가 있다.]

◎ 숲샘

[숲의 기운이 담긴 특별한 물병.

정화된 물을 끊임없이 생성한다.

사용자는 언제나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다.]

◎ 자연등불

[자연의 기운을 이용해 빛을 발하는 등불.

사용자의 의지로 밝기를 조절할 수 있다.

연료가 필요 없다.]

◎ 바람망토

[바람의 기운이 부여된 특별한 망토.

착용자의 민첩성을 향상시킨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다.

보온 효과가 뛰어나다.]

이중 구름걸음 장화는 인원수에 맞게 다섯 켤레를, 바람망토는 세 벌을 받았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바람숨결 허브, 녹음이슬, 별빛연고, 숲속잠, 바람초······.’

모두 여행에 큰 도움이 되는 소모품들. 특히 녹음이슬과 별빛연고는 힐링 블룸 이상의 치유제다.

설마 이렇게 퍼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조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말이긴. 족제비, 네가 호구라는 뜻이지.”

“호, 호구라니······!”

“혹제비.”

“세실······!”

구름걸음 장화를 착용한 루나가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를 했다.

“와······! 진짜 가벼워!”

우리도 구름걸음 장화를 신었다. 족제비가 신이 나서 뛰어다니다가 세실에게 이마를 얻어맞았다.

세 벌의 바람망토 중 두 벌은 세실과 족제비에게 줬다. 민첩성은 살수와 궁수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니까.

남은 하나의 바람망토는 전사 포지션으로 움직일 루나에게 건넸다. 그러나 루나는 은월의 망토가 좋다고 해서, 내가 둘렀다.

“왜 내게는 묻지 않는 거지? 데미안.”

“너는 필요 없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건가. 물어보지도 않고서.”

카인이 쓸데없이 트집을 잡았다.

“굳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엄밀히 말해 이 물건들은 모두 내 덕에 손에 넣은 거다.”

“아오. 알았어. 너 가져.”

내가 짜증을 내며 카인에게 바람망토를 넘겼다. 그런데 카인은 막상 망토를 받고서는 등에 두르지 않고 대충 접어 바닥에 내려놨다.

“뭐야. 안 두를 거면 내놔.”

“주면 착용할 생각인가?”

“당연하지.”

“그렇다면 싫다.”

저 자식 대체 왜 저렇게 심술을 부리는 거지.

불안한 눈으로 우리를 보던 세실이 자신의 바람망토를 내게 건넸지만, 거절했다.

나는 다시 카인에게 바람망토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카인이 흔쾌히 망토를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망토를 등에 둘렀다. 그러자 카인이 족제비의 바람망토를 빼앗아 등에 둘렀다.

“야!”

참지 못한 내가 카인에게 덤벼들었다. 카인이 피식 웃으며 내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나는 구름걸음 장화와 바람망토의 민첩성을 십분 발휘해 카인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데미안······! 너······!”

바닥으로 넘어간 카인에게 재차 주먹을 뻗었다. 그런 내 손을 루나가 잡으며 소리쳤다.

“너희들 또 시작이니? 제발 그만 좀 해!”

결국 내 바람망토를 족제비에게 넘기는 것으로 우리의 싸움은 일단락됐다.

그러자 카인도 바람망토를 벗어 등짐에 넣었다.

빌어먹을 배배 꼬인 녀석.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역시 내게는 은월의 망토가 맞는 것 같군.”

“그치? 카인. 헤헤.”

카인과 루나의 대화를 못 들은 체하며 나는 엘프들이 준 물건을 적절히 배분했다.

“바람숨결 허브를 씹으면 일시적으로 피로를 회복할 수 있어. 하지만 실제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니까 주의해야 해. 녹음이슬과 별빛연고는 상처 치유제야. 녹음이슬은 대충 이 정도를 삼키면······ 야 족제비! 별빛연고는 먹는 거 아니야!”

“힉!”

“바보. 족제비.”

“아하하하! 조조아킴! 너 정말 재밌다! 아저씨 말이 사실이었어!”

“조조아킴이 아니라 조, 조아킴이라고······!”

“그래! 조조! 아하하하!”

불필요하게 많이 들고 다닐 필요는 없었기에, 배분하고 남은 것은 아공간에 보관했다.

이번에도 카인이 트집을 잡으려나 했는데, 녀석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야니카가 찾아왔다.

“선물은 마음에 드나?”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나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다며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던 야니카가 그 모습을 보고는 푸훗, 웃었다. 루나의 긍정적 에너지는 엘프에게도 잘 먹히는가 보다.

“따라와라. 족장에게 안내하지.”

현시점의 족장은 ‘레소빅 제피르나’일 것이다.

레소빅은 소설에서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사실은 그녀가 머지않아 사망하고, 족장의 자리를 야니카가 잇게 된다는 것.

방을 벗어난 우리는 야니카를 따라 걸었다. 족제비가 부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꾸 고개를 갸웃했다. 바람숲에 온 뒤로 족제비가 산만해진 것 같다.

“너 아까부터 왜 그러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풍경이 너무 예쁘니까 그렇지. 그치? 조조.”

루나는 구름걸음 장화가 무척 마음에 드는지 ‘이거 봐! 이거 봐 카인!’ 하며 뛰어다녔다. 야니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족장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록 잎사귀가 폭신하게 쌓인 바닥에 눈을 감고 누운 여자가 보였다.

“레소빅 족장.”

여자, 레소빅이 눈을 떴다.

우리를 바라보던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하며 입술을 열었다.

“톳 레베녹, 베르노.”

“데이스트비텔노 타크?”

“오틸리치노 비로스. 토트 말레니스키 레베녹.”

레소빅이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레소빅은 더 가까이 오라는 듯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조아킴.”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루나도, 세실도, 그리고 카인마저도 두 눈을 부릅떴다.

족제비는 부르르 어깨를 떨고 있었다. 잠시 후 얼굴을 일그러뜨린 족제비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여전히 울보로구나. 너는.”

야니카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 레소빅이 족제비의 손을 잡았다.

“훌륭하게 자랐구나. 그 자그맣던 아이가.”

족제비가 엉엉 울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족제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레소빅의 왼쪽 가슴에는 초록빛 잎사귀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

.

.

족장의 집을 나선 우리는 야니카와 함께 세계수를 향해 걸었다.

내 손에는 녹음심장이 끼워져 있었다. 지금은 잠시 빌린 거다. 하지만 곧 내 것이 되겠지. 레소빅 족장은 내가 세계수 아리아나스를 치유하는 것에 성공하면 녹음심장을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퉁퉁 눈이 부은 족제비를 곁눈질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족제비는 레소빅과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아울러 나는 족제비가 왜 자신의 화살에 초록 잎사귀 무늬를 그려 넣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족제비야. 조금 더 잘 그리지 그랬냐.

“족제비. 괜찮아?”

세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족제비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조조······.”

루나가 걱정 어린 얼굴로 족제비를 위로했다.

역시 루나는 상냥하다. 루나가 없었으면 족제비는 더 힘들어했을 테지. 나와 세실, 카인은 남을 위로하는 일에 서투르니까. 근데 루나야. 굳이 안아줄 필요까지는 없잖아.

우리는 곧 아리아나스 앞에 도착했다. 님피엘을 비롯한 엘프들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뜸 들일 것 없이 아리아나스 앞으로 다가섰다.

“부탁드려요. 시니야오코네.”

님피엘의 말에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녹음심장의 힘까지 함께 쓸 수 있는 상태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내 손에 끼워진 녹음심장이 은은한 옥빛을 발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힘을 감각했다. 숲의 향기와도 같은 자연의 기운.

나는 아리아나스의 기둥에 손을 뻗었다. 내 손끝에서 새하얀 가지의 형상이 나타났다. 놀라 웅성거리는 엘프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나의 혼돈이 생명, 성장, 치유의 힘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힘을 집중시켰다. 아리아나스에 전달했다.

스륵. 스르륵.

내가 전달한 혼돈이 아리아나스의 기둥을 휘감으며 덩굴처럼 타고 올랐다. 나는 아리아나스의 내부로 감각을 확장했다. 그러자 느껴졌다. 아리아나스를 괴롭히는 이질적인 힘.

아리아나스의 내부에 무형의 에너지를 주입했다. 그러자 아리아나스를 좀먹던 이질적인 힘이 달아나려 했다. 나는 무형의 에너지를 그물처럼 펼쳐 그것을 포획했다.

【■■의 파편을 포식합니다.】

녹음심장으로 향상된 집중력은 과연 대단했다. 나는 순식간에 새로운 혼돈을 포식했다.

아리아나스에서 손을 뗐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검은 얼룩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오 보제······!”

“체르니에 피아트나 이스체자유!”

“마티 밀라야······!”

이윽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계수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던 곳에서 잎새가 돋아났다. 이그드라실과 같은 은빛이 아닌, 진한 초록빛의.

“아아······!”

님피엘이 두 손을 모으며 탄성을 질렀다.

그때, 아리아나스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아리아나스의 심장부에서 무언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력을 품은 빛의 물결처럼 움직였다. 은빛의 섬유들이 얽히고설키며 형태를 이뤘다. 완벽한 균형과 우아함을 뽐내는 그것은, 활이었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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