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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2

82화 생명과 파괴 (2)

82화 생명과 파괴 (2)

완성된 활이 살포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활의 중앙은 은빛이었는데, 양 끝부분으로 갈수록 짙은 초록빛으로 변했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봤다.

“어머니 나무의 선물이에요. 시니야오코네.”

님피엘도 경외 어린 눈으로 활을 보고 있었다.

이어 속삭이듯 말했다.

“바람속삭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세계수의 활, 바람속삭임을 손에 들었다. 가볍다. 그리고 숲과 바람의 활기가 느껴졌다.

“어머니 나무의 선물은 실로 오랜만이군. 더구나 인간을 위한 선물이라니.”

야니카가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치유된 아리아나스에 크게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대는 어머니 나무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시니야오코네.”

야니카가 내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 손을 맞잡으며 나도 웃었다. 그렇게 퍼주고도 야니카는 내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나야 좋지.

저만치 거주지 방향에서 달려오는 엘프들이 보였다. 아리아나스의 치유를 확인한 그들이 환성을 질렀다.

***

족제비는, 아니 조아킴은 슬로바 왕국에서 태어났다.

당시 슬로바 왕국은 내전 중이었다.

조아킴이 네 살이 되었을 때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죽었고, 어머니는 늘 조아킴과 함께 어디론가 바삐 달렸다.

‘조아킴. 조금만 힘을 내렴. 조아킴 데샹.’

조아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고향으로 갈 거야 조아킴. 오를리안 왕국이라는 곳이란다.’

하지만 조아킴은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수많은 시체의 틈바구니에서 조아킴은 살아남았다. 어머니가 조아킴을 꼭 끌어안고, 몸을 웅크려 준 덕분에.

‘엄마. 엄마.’

당시 조아킴은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움직이지 않는 엄마의 몸을 사흘 동안 흔들던 조아킴은 기절하듯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기분 나쁜 소음. 머지않아 조아킴은 그것이 들짐승이 시체를 뜯어먹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짐승들이 서늘한 안광을 번득이며 조아킴을 노려봤다. 맹렬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조아킴은 달아나는 대신 엄마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자그만 몸을 최대한 펼쳐 엄마를 감싸 안으려 노력했다. 엄마가 그렇게 해주었듯이. 그렇게 제 목숨을 살려주었듯이.

깨갱!

짐승들의 사나운 발소리가 비명으로 변했다. 비명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조아킴은 바들바들 몸을 떨며 더욱 세게 엄마를 끌어안았다.

이윽고 모든 비명이 사라진 자리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지척까지 다가온 발소리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를 지켜주고 있는 거니?’

조아킴은 울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착한 울보로구나. 너는.’

조아킴은 자신은 울보가 아니라고 답했다.

‘내 손을 잡으렴. 함께 엄마를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자.’

조아킴은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의 왼쪽 가슴에는 초록빛 잎사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

.

.

방에 모인 우리에게 족제비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이후 어머니를 땅에 묻은 족제비는 레소빅과 함께 여행했고, 바람숲에 왔다. 족제비가 바람숲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던 건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레소빅은 족제비를 이곳에서 키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족제비는 고향인 오를리안 왕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레소빅은 족제비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이후 족제비는 오를리안 왕국의 어느 보육원에 맡겨졌고, 테오를 만났다.

“조조······.”

루나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세실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숙였고, 카인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마침 방문이 열리며 야니카가 들어왔기에, 나는 그녀에게 족장을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레소빅 족장을?”

레소빅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묘한 낯익음을 느꼈었다.

처음에는 내가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레소빅은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니까.

“따라와라.”

다시 레소빅의 방에 들어선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낯익음의 정체를 깨달았다.

“흑기사에게 당한 건가요?”

레소빅과 야니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루나도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허락하신다면 몸 상태를 살펴보고 싶어요.”

레소빅의 입장에서 내 청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거기에 더해 나는 병든 아리아나스를 완벽하게 치유했으니까.

내가 레소빅의 몸을 살펴보고 싶은 것은 단순히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레소빅을 통해, 쿠훌린의 치유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대가 도움을 주겠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요. 감사를 표합니다. 시니야오코네.”

돌연 족제비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부, 부탁해 데미안.”

족제비에게 히죽 웃어준 나는 레소빅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레소빅의 명치에 손을 얹고 녹음심장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다시금 집중력이 강화되며, 그녀의 몸 안에서 요동치는 익숙한 힘이 느껴졌다. 어두운 혼돈. 흑기사의 것과 같은.

나의 손을 매개체로, 나는 그녀의 몸 안으로 감각을 넓혔다. 그녀의 심장은 희미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갈래의 촉수처럼 감각을 확장하며 병든 육체가 내뱉는 고통의 신음을 감지했다.

스르륵. 스륵.

내가 주입한 세계수의 혼돈이 내부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어두운 혼돈을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불현듯 찾아든 현기증을 느끼며 나는 레소빅의 몸에서 손을 뗐다. 주르륵, 코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이 새하얘진다. 녹음심장을 믿고 너무 까불었나 보다.

.

.

.

눈을 뜨니 세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었다.

“깼어? 데미안.”

“세실.”

“엘프. 회복. 도와줬어.”

엘프들이 내 회복을 도왔다는 뜻이겠지.

몸을 일으켜 보니, 우리가 머무르던 그 방이었다.

몸 상태는 괜찮았다. 내부의 혼돈은 상당히 소모됐지만 별다른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발치에서 잠든 루나가 보였다. 세실과 함께 나를 간호했던 모양이다.

“너도 좀 자두지 그랬어. 세실.”

“난. 괜찮아.”

“카인과 족제비는?”

“밖에.”

나는 밖으로 나갔다. 세실이 졸졸 나를 따라왔다.

“데미안.”

세실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응? 세실.”

“그. 그때. 말한 거.”

“그때?”

“랑베르. 32호점.”

아.

“왜. 같이 할 마음이 생겼어?”

덥석 내 손을 잡은 세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로도. 괜찮다면.”

“무슨 소리야 세실. 네가 잡화점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 금세 많은 돈을 벌게 될걸? 본점보다도 더.”

세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나는 세실과 함께 카인과 족제비를 찾아다녔다.

카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족제비는 금세 찾았다.

놀랍게도 족제비는 레소빅에게 활쏘기를 배우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레소빅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대 덕분에 이 정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시니야오코네.”

족제비는 나를 보자마자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하지만 재빠른 손날 공격으로 격파했다.

“데미안······! 고마워······! 흐흑······!”

족제비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레소빅의 가르침 덕분인지 족제비는 1레벨이 더 올라 39레벨이 되어 있었다.

다시 레소빅과 훈련하는 족제비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쩌면 족제비가 바람 속성을 개화한 것은 레소빅 덕분이 아닐까. 어린 시절 레소빅과 함께 다니고, 또 바람숲에 잠시 머물렀던 것이 속성 개화의 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공간에 넣어뒀던 물건을 꺼내 족제비에게 건넸다.

족제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 이걸, 왜······?”

“어차피 나는 제대로 쓰지도 못해.”

내가 건넨 것은 바람속삭임이었다.

바람속삭임을 본 레소빅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시니야오코네. 어머니 나무께서 오랜만의 선물을 내리셨다는.”

레소빅은 자신이 지닌 ‘바람송곳니’와 야니카의 ‘바람추적자’ 또한 아리아나스의 몸에서 태어난 활이라고 했다.

“잘 보렴. 조아킴.”

레소빅이 바람송곳니를 꺼내, 화살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활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더니 초록빛 화살의 형상이 시위에 매겨졌다.

세실과 족제비의 눈이 커졌다. 나는 저 기술을 알고 있다. 소설에서 야니카가 사용하는 기술, ‘자연의 화살’이다.

돌연 레소빅이 활을 내리며 기침했다. 그녀는 상당히 괴로워했고, 한동안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레소빅이 애써 미소하며 말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너도 할 수 있게 될 거란다. 조아킴.”

족제비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레소빅을 바라봤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를 울렸다.

“너무해! 나만 두고 전부 나가버리다니!”

뒤를 돌아보니 루나가 헤헤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루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카인은?”

***

카인은 홀로 아리아나스 앞에 서 있었다.

많은 엘프가 아리아나스 앞에서 예를 표하고 사라지는 동안, 그는 그저 나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인은 처음에 왜 이런 귀중한 나무를 이런 곳에 방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소서러가 아닌 자는 이 나무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니까.

“너는 누구지?”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다.

또한 누구에게 던지는 물음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카인은 수개월 전의 자신이 디네베에게 같은 물음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너는 누구지?’

‘너는 그 아이와 같은 물음을 하는구나.’

카인은 생각했다.

이곳에는 디네베처럼 신비로운 엘프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아리아나스와 유일하게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디네베도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은월섬에도 아리아나스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말이 된다.

‘달빛나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달빛나무였다. 그러나 다르다. 외형은 닮았지만, 달빛나무에서는 아리아나스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카인은 아리아나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데미안이 아리아나스에 발현했던 힘. 아리아나스와 디네베에게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그것.

데미안은 소서러의 능력을 발현해 죽어가던 아리아나스를 되살렸다. 카인은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그그그그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아리아나스가 진동했다. 카인은 자신도 모르는 새 아리아나스가 지닌 생명의 기운을 잘게 조각내고 있었다. 흠칫 놀란 카인이 아리아나스에서 손을 뗐다.

손이 닿았던 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마치 얼룩처럼.

그러나 빠르게 손을 뗀 덕분인지 얼룩은 머지않아 지워졌다. 카인은 물끄러미 아리아나스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비친 아리아나스는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보였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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