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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6

86화 태양의 풀 (2)

86화 태양의 풀 (2)

‘사하룬의 공포’라 불리는 샌드웜은 무시무시한 이명과 다르게 인간을 습격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이유는 인간이 샌드웜의 일상적인 식량원이 아니기 때문으로, 샌드웜은 평소 사막의 모래를 먹고 살아간다. 정확히는 모래 안의 미생물과 유기물을.

그런 샌드웜이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는데, 하나는 동족(특히 어린 새끼)의 죽음을 봤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태양의 풀을 빼앗겼을 때다.

태양의 풀은 샌드웜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식물이다. 샌드웜은 태양의 풀이 내뿜는 독특한 향에 본능적으로 끌리는데, 특히 번식기가 다가온 개체는 대부분 태양의 풀 근처에서 제 짝을 찾는다.

그래서 샌드웜은 태양의 풀이 훼손되는 것에 분노한다. 종(種)을 향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멍청한 녀석. 새끼를 죽였네.’

저 멀리 녹색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새끼 샌드웜. 그 너머로 어미 샌드웜과 대치한 인간이 보였다. 저 녀석이 새끼 샌드웜을 죽인 거겠지. 그래서 어미의 분노를 샀고.

그런데 의외였다. 샌드웜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막 아래에서 살아간다. 샌드웜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호흡이 필요하거나 짝짓기할 때가 아니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족제비! 쏴!”

족제비의 화살이 샌드웜의 안구에 박혔다.

샌드웜은 새끼의 죽음으로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에게는 도리어 잘된 일이다. 흥분한 샌드웜은 평소보다 수십 배 많은 호흡이 필요하니까.

그것은 내가 이용하려는 샌드웜의 약점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내가 저 사람을 구해올게!”

역시 정의의 소녀 루나는 위험에 처한 이를 내버려 두지 못했다.

기계차에서 뛰어내린 루나가 호다닥 달려갔다.

내가 세실을 돌아봤고, 고개를 끄덕인 세실이 곧장 루나의 뒤를 쫓았다.

“계속 쏴 족제비! 샌드웜의 눈동자만 노려!”

“알았어 데미안!”

“카인!”

“알았다.”

내 계획은 이랬다.

먼저 샌드웜의 전신에 박힌 108개의 눈동자를 모두 파괴한다. 샌드웜이 시각을 통해 적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녀석은 눈동자를 둘러싼 수백 개의 촉수로 적을 공격하는데, 신기한 점은 안구가 파괴되면 주위의 촉수도 함께 기능을 잃는다는 것.

콰득! 콰드득!

과연 족제비의 활 솜씨는 대단했다. 이렇게 바람이 강한데, 심지어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계차 위인데도 쏘기만 하면 명중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카인이었다. 카인은 아리아나스의 얼룩을 제거할 때처럼 샌드웜의 안구를 도려냈다. 샌드웜을 상대하는 데 전사보다 마법사가 필요했던 이유다. 역시 카인을 데려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봤나? 데미안.”

더욱 흥분한 샌드웜이 마구 촉수를 휘둘렀다. 저만치 사람 하나를 업고 달려오는 루나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촉수를 베며 뒤따르는 세실이 보였다.

부르릉! 나는 그들을 향해 빠르게 기계차를 몰았다. 루나와 세실이 훌쩍 기계차 위에 안착했다.

“다, 당신은 누구요? 설마 나는 이미 죽은 것인가! 그래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인가! 아름다운 천사여! 나는 아직 지상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나이다!”

사내의 목소리와 얼굴에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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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세이 살림바르 [16세], [Lv.41]

◎ 속성: [열혈]

◎ 특성: [영웅적 이상], [모험심], [용기], [통솔자], [무모함], [허풍선], [한량 정신], [호색한], [의리], [불굴의 정신], [검의 재능]

◎ 적성: [검술 Lv.4], [단검술 Lv.4], [창술 Lv.3], [궁술 Lv.4], [도끼술 Lv.3], [투척술 Lv.3], [승마술 Lv.5], [살림바르 격투술 Lv.4]

◎ 일반 스킬: [사막 걸음 Lv.4], [사막 은신 Lv.3]

◎ 전용 스킬: [열혈 돌진 Lv.3], [열혈 칼날 Lv.4], [군중 제어 L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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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보 왕자였나.

“천사여! 과연 성전의 말씀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답······!”

루나에게 머리통을 얻어맞은 알렉세이가 기절했다. 돌연 루나에게 입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변태였잖아!”

나는 속으로 웃었다. 소설에서도 알렉세이는 루나에게 첫눈에 반해 입을 맞추려다가 머리통을 얻어맞는다.

그러나 어이없는 첫 만남과 다르게 루나와 알렉세이는 탄탄한 동맹 관계를 형성한다. 알렉세이는 머지않아 살림바르의 왕이 되는데, 이후 여러 차례 루나에게 청혼하고 거절당한다. 그럼에도 루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바보 같은 녀석이다.

“나는 이제 뭘 하면 돼?”

“그 바보 왕자 좀 지키고 있어. 죽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까.”

녀석이 죽으면 지금 당장도 문제지만, 훗날 루나는 든든한 아군을 잃게 된다.

정의의 여신 루나의 힘이 되어주는 이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이 사람 왕자야?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확실해?”

“응. 확실해.”

루나가 끄히잉, 입꼬리를 내렸다.

그러자 세실이 기절한 알렉세이의 뒤통수를 한 번 더 후려쳤다.

‘뭐 하는 거야 세실!’ 하고 외치는 루나에게 세실이 답했다. 이렇게 하면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데, 데미안! 나 화살이 다 떨어졌어!”

“내려 그럼.”

“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히죽 웃은 내가 아공간에서 화살통 하나를 꺼내주자 족제비가 반색했다.

샌드웜은 아까부터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빨랐다. 우리가 아직 따라잡히지 않은 이유는 카인이 전력으로 샌드웜의 추격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는 못 버틴다. 데미안.”

“뭐야. 쉽게 지치지 않는다며.”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지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샌드웜의 저항이 강할 뿐이지.”

“입만 살아가지고.”

“오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힘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

카인을 돌아보며 내가 말했다.

“힘의 배분을 잘해야 해. 샌드웜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것은 너니까. 기억하지?”

“걱정 마라. 데미안.”

그렇게 답하며 카인이 피식 웃었다.

조금 꼴 보기 싫기는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 웃음이 든든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데, 데미안! 이러다가 샌드웜한테 따라잡히겠어! 카인 녀석 별로 도움이 안 돼!”

“뭐라고?”

“힉!”

“세실. 이거 꽉 밟고 있어.”

세실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동안 나는 기계차의 뒤로 넘어갔다.

카인이 족제비를 살해하려는 것을 막은 나는 녹음심장의 힘을 끌어올렸다.

“잠깐밖에 못 버텨. 그 사이에 안구를 전부 파괴해야 해.”

“아, 알았어 데미안!”

“걱정 마라.”

샌드웜의 안구는 몇 개 남지 않았다. 저 안구를 모두 없애고 촉수를 무력화하지 못하면 다음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나는 샌드웜을 향해 ‘늪지의 혼돈’을 발현했다. 혼돈의 양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했다. 내가 진짜로 힘을 발휘해야 할 상황은 지금이 아니니까.

쿠르르르르르······!

녹음심장 덕분인지 늪지의 소용돌이는 효과가 있었다. 샌드웜의 추격 속도가 느려졌다.

족제비가 화살을 연사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족제비는 레벨업했다. 40레벨의 벽을 넘은 것이다.

카인도 연이어 샌드웜의 안구를 도려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동료들은 단검을 투척했다. 그럼에도 모든 안구를 파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비책은 마련돼 있다. 되도록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루나. 세실.”

내 말에 루나가 히죽 웃으며 외쳤다.

“가자! 세실!”

루나와 세실이 몸을 날렸다. 나와 카인, 족제비도 기계차에서 뛰어내렸다.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살아남은 안구와 촉수는 루나와 세실에게 맡긴다.

내 손에서 뻗친 세계수의 혼돈이 샌드웜을 포박했다. 녀석의 촉수가 세계수의 가지를 절단하며 저항하는 동안, 나는 세계수의 혼돈을 매개체로 샌드웜의 피부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숨구멍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곳으로 세계수의 가지를 밀어 넣었다.

이번 단계는 샌드웜을 질식시키는 것이다. 샌드웜은 입으로 호흡하지 못한다. 오직 몸 곳곳에 드러난 숨구멍으로만 호흡할 수 있다. 평소의 샌드웜이라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호흡 없이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흥분한 상태라면 다르다.

퀴에에에에엑!

샌드웜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호흡하지 못하는 샌드웜은 점차 약해진다. 그래서 녀석은 더욱 발악했다. 살아남은 촉수가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루나와 세실이 위험을 무릅쓰며 그것을 베었다.

카인이 섬세하게 능력을 제어해 두 사람을 도왔다. 몇 번이고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믿고 도우며 극복했다. 마침내 촉수가 무력화됐다. 이어 세계수의 혼돈이 샌드웜의 모든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지금이야! 카인!”

내가 외치기도 전에 카인은 샌드웜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때맞춰 루나와 세실이 샌드웜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샌드웜에게 ‘정신 침식의 혼돈’을 선사했다.

이번에도 녹음심장의 덕인지 의미 있는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샌드웜이 부르르 몸을 떨었고, 나는 샌드웜의 머리를 최대한 아래로 짓누르려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역시 정신 지배는 불가능한 건가.

콰짓!

샌드웜의 머리가 지면에 처박혔다. 카인이 중력의 힘을 발현한 것이다. 카인은 그대로 샌드웜의 입 안으로 뛰어들었다.

우리의 전력으로 샌드웜을 죽이려면 내부를 공격해야 한다. 샌드웜의 피부는 단단하다. 안구와 촉수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는 웬만한 공격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정도는 되어야 부술 수 있다.

주르륵, 코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 나는 ‘바람숨결 허브’를 씹어 억지로 각성 상태를 유지했다. 내면의 혼돈을 긁어모았다.

화르르르!

내 손에서 시커먼 불꽃이 솟아올랐다. 역시 나의 예상은 맞았다. 아리아나스를 괴롭히던 혼돈은 ‘염화(炎火)’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아리아나스의 검은 얼룩이 불에 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검은 불길이 세계수의 혼돈을 타고 샌드웜의 몸을 휘감았다. 그것이 샌드웜의 호흡을 더욱 집요하게 방해했다. 샌드웜이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피부가 끓는 물처럼 진동했다. 카인이 바위를 부쉈던 그 파괴적인 힘을 녀석의 내부에서 발현하기 때문이다.

샌드웜의 입에서 폭발하듯 녹색 액체가 터져 나왔다. 바르르 몸을 떨던 샌드웜이 축 늘어졌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녹색 액체를 온몸에 뒤집어쓴 카인이 샌드웜의 입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모습이 웃겨 나는 킬킬대며 웃었다.

.

.

.

또 혼절했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루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깼니? 데미안.”

루나가 생긋 웃었다.

“쨔안.”

그러고는 행복한 얼굴로 손에 쥔 무언가를 흔들었다.

“태양의 풀이지롱. 헤헤.”

나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알렉세이가 루나를 천사라고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세실이 아닌 루나가 나를 보고 있는 거지.

머리 아래의 낯선 감각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가져갔다. 기분 좋은 촉감.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이게 뭐지, 생각하며 만지는데 루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어, 어딜 만지니!”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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