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탁, 타닥
장작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흔들리는 모닥불이 여기저기 일렁이는 빛과 그림자를 던져댄다.
쿠낙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아는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우와, 진짜요? 그럼 미르카에서 배를 타고 다들 아래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여기가 닫혔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내일까지는 기다려보자고.”
“설마 오랫동안 문을 닫고 있겠어? 그러면 왕께서도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
“하긴…….”
“하여간 미르카의 성문이 닫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네.”
“예전에도 닫힌 적이 있댔나?”
“글루 노인장의 말에 따르면 역병이 돌 때 닫힌 적은 있다는데 말이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고 작게 울려 퍼졌다. 도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손쉽게 그들 사이에 섞여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단하지.’
쿠낙도 부드럽고 단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했다.
그를 경멸하는 시선, 호기심 어린 시선, 저주하는 목소리, 소곤거리는 뒷담화들.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와도 예의 바르게 구는 것.
그게 마검 소유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걸 최대한 피했다.
마을에 들르는 횟수를 최소화하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만 다녔다.
마음은 편했지만, 괴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밤중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서 마검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미치기 딱 좋았다.
소중한 사람은 더더욱 찾아갈 수 없다.
‘차라리 미쳐버리면 편할까. 아니면―.’
죽음은 간단했다.
오히려 죽는 건 더 편한 길이었다.
도망치는 건 쉽다.
하지만 살아가는 게 어려웠다.
일렁일렁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모닥불이 그녀의 얼굴에 다채로운 빛을 던진다.
녹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새벽하늘보다 섬세한 남빛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하지만 당신이…….’
살라고 했으니까, 죽여 주겠다고 했으니까.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진짜로 구해 주었으니까.
더 이상 마검의 속삭임은 없다. 사람들도 그를 피하지 않는다.
마나가 마나관을 돌 때마다 괴로운 게 아니라 상쾌했고, 아침마다 마시는 공기가 달았다.
살아 있다는 게 기쁨이 되었다.
단순한 삶의 기쁨이 파도처럼 그를 덮치고, 또 덮쳐댔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나뭇잎은 녹색이며, 바람이 불 때마다 봄바람의 달콤함이 휘감긴다.
예전에는 그저 무심히 지나갔던 것들, 아예 인지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전부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아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야기하다가, 찡그렸다가, 곧장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
둘의 시선이 맞았다.
그가 자신을 계속 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도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잠시만요.’라고 입을 벙긋하고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몇 번 더 대화가 오가고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한 도아가 무리를 빠져나왔다.
“오래 기다렸죠?”
“아닙니다.”
“미안해요. 생각보다 이야기가 더 길어졌네요.”
“괜찮습니다.”
쿠낙에게 씩 웃어 보인 후 도아는 살짝 텐트 안을 들여다보았다.
원터치 텐트가 아니라 손으로 조립해서 세우는 일반 천막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 야영하는 와중이라 눈에 띄는 건 피하고 싶었다.
텐트 안에서 베리가 건강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해왕이는 작아진 상태로 텐트 옆에 앉아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동상 같은 자세로 훌륭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아는 해왕이를 마음껏 쓰다듬고 쪽쪽 입맞춤까지 퍼부었지만, 해왕이는 늠름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마저 너무 귀여워서 도아는 “해왕이 최고, 정말 귀여워. 너무 멋있어.” 하고 뽀뽀를 퍼부어댔다.
말랑말랑한 수제비 같은 귀를 실컷 만지고서야 도아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아가 움직이자 늠름하게 있던 해왕이가 슬쩍 다가와서 그녀의 허벅지에 턱하니 머리를 올렸다.
도아가 부드럽게 그 머리와 귀 뒤를 쓸어주며 말했다.
“일단 성문을 닫는 게 엄청나게 이례적인 일인 거 같네요. 사람들은 그래도 얼마 오래 못 갈 거다, 라는 마음으로 기다릴 건가 봐요.”
“이런 도시는 자급자족하기에는 너무 힘드니까요.”
쿠낙의 말에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무역이 성행한 마을 같던걸요. 잘은 모르지만 큰 가도 3개가 여기서 만나는 거 같고. 이 안의 시장에서 서로서로 물건을 교환하면서 교역하는 거 같았어요.”
“나르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이유가 있지요.”
도아가 히죽 웃었다.
“쿠낙은 다 알고 있는 거 아녀요? 저만 문외한인걸요.”
“아닙니다. 그래도 도아 양의 이야기로 들으면 또 새롭게 정리가 되지요.”
도아가 “흠.” 하고 다리를 쭉 뻗었다.
화로대의 모닥불에 쿠낙이 나무를 하나 더 던져 넣었다.
“자, 그럼 쿠낙, 어떻게 잠입할까요?”
“네?”
“폐하 혼자 들어가 있게 할 수는 없잖아요. 저희도 따라서 들어가 봐야죠.”
“그 인간은 저희 없어도 혼자 잘 살아나올 수 있을 거 같군요. 그리고 들어가는 게 금지된 곳에 들어갔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모험가 자격을 박탈당할 겁니다.”
“하하, 그거 큰일이네요.”
도아는 그렇게 말하고 턱을 괴었다.
“그럼 쿠낙은 여기 있어요. 저 혼자 들어갈게요.”
“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크게 튀어나왔다. 도아가 끄응 하고 말했다.
“하지만 폐하가 들어간 지 시간이 꽤 됐잖아요. 그런데 나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고. 뭔가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요.”
“통금을 지키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쯤 귀족식 환대를 받고 있을 겁니다.”
“그럼 안전한 걸 확인하면 돌아오는 걸로 하지요.”
도아가 빙긋 웃으며 제 의지를 확실히 밝혔다.
쿠낙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아 양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 ❖ ❖
밤이 깊어지자 야영지는 조용해졌다.
성 근처이니 불도 대부분 끄고 숯불만 남겨둔 상태였다.
몇몇 파수를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우마의 푸르륵 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어이구, 해왕이 화났쪄? 미안해. 하지만 해왕이를 데려갈 수 없어서. 응?”
도아는 고개를 픽 돌린 해왕이를 몇 번이나 달래고서, 베리에게도 신신당부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해왕이랑 도망쳐. 여기 있는 천막이나 짐은 챙기지 않아도 돼. 중요한 건 안장에 다 있으니까.”
도아가 불만스럽게 쿠낙을 바라보았다.
“쿠낙이 아까처럼 남겠다고 하면 좋을 텐데요.”
“그래도 도아 양을 혼자 가게 할 수는 없지요.”
“뎐 갠찬아여, 더아 님.(전 괜찮아요, 도아 님.)”
베리가 탕탕 자신의 가슴을 두들겨 보았다. 도아에게서 옮은 동작이었다.
도아는 그런 베리를 끌어안고 다시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왕아, 베리를 잘 부탁할게. 베리도 해왕이를 부탁해.”
도아는 암행을 위해서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베리와 해왕이의 배웅을 받으며 둘은 성벽 쪽으로 다가갔다.
어둠을 틈타서 스윽 성벽을 넘는 건 두 사람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묘하게 소란스러운데요.”
도아가 중얼거렸다. 쿠낙 역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답했다.
“한번 살펴볼까요?”
“그게 좋겠어요. 그럼 일단…….”
도아가 시선을 들어 가장 높은 탑을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가 볼까요?”
경비병들과 기사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목적이 순찰은 아닌 듯했다.
기사들은 지도를 들고 있었고, 특정한 지점에 도착하면 병사들을 시켜서 뭔가를 파묻게 했다.
도아는 쿠낙을 돌아보았고, 쿠낙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내려가 살며시 그들이 파묻는 걸 도로 파내보았다.
“던전 코어?”
“하급 던전 코어네요.”
“이걸 여기저기 묻고 있는 거예요? 대체 왜?”
“글쎄요…….”
도아는 던전 코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일단 영주의 거처로 가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쿠낙도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몰라도 이 도시에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영지의 성벽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에 비해 성안의 불은 몇몇 곳만 빼면 전부 꺼져 있고 고요했다.
기묘한 대비였다.
“여기서부터는 확실히 경비가 더 삼엄하네요.”
도아가 중얼거렸다.
성벽에 가득 화톳불을 켜놨고, 돌아다니는 경비병 수도 제법 되었다.
“원래 귀족 저택이 이렇게까지 경비가 삼엄한가요?”
“아뇨, 이 정도는 아닐 텐데요.”
쿠낙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띠링띠링
서브 퀘스트
그 아이는 진짜가 아니야.
미르카 성안의 사람들은 영주의 아들 ‘아르맥’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진짜 아르맥을 찾아내고, 가짜를 쫓아내자!
1. 진짜를 찾아내자.
2. 가짜를 처리하자.
보상
▸ 1000 세계수 포인트
▸ 요정 금화
‘우와, 퀘스트.’
어차피 할 일이니 덤을 얻은 기분이었다.
‘요정 금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로라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포인트도 좋네. 좋아.’
그나저나 가짜라…….
“쿠낙, 대(對)마법사 전투 가능해요?”
쿠낙이 금색 눈을 깜박였다. 도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죽일 수 있겠죠. 그게 아니라 정신계 마법 같은 거 방어되나요?”
“강렬한 정신계 마법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좋아요.”
“마법사가 있나요?”
“음, 어쩌면요.”
가짜로 변신할 수 있는 건 일단 마법사가 아닐까, 싶었다.
도아는 단서 추적을 시작했다.
그녀가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그럼 잠입해 볼까요?”
쿠낙이 마주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 ❖ ❖
성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불 켜진 곳도 거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한기가 느껴진다.
“!!”
쿠낙이 도아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꺾어지는 복도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레이스(Wraith)가 나타났다.
‘언데드계 마수다…….’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손에는 푸른색 등불을 들고 있었다.
―흑……. 흑흑…….
울음소리를 흘리며 반투명한 망령이 흔들거리며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마다 서리가 끼었다가 사라졌다.
‘중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
주변 사물에 저 정도로 영향을 주는 레이스는 처음 봤다.
‘그런데 저런 게 성에? 사람 사는 성에? 성안에? 던전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빛을 흘리며 레이스는 저쪽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완전히 상급이 아니라 다행이군요.”
“그래요? 그래도 꽤 커 보였는데.”
“상급 레이스는 생명의 기운을 감지합니다.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가면 무조건 발각되지요.”
“으…….”
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단서 추적을 다시 켰다. 소리를 죽이고 앞으로 걸어 나가며 도아가 속삭였다.
“그런데 저런 게 성안에 돌아다니다니.”
“고성에 붙어 있는 유령들은 있다고 하지만, 저 정도는 처음입니다.”
“아니, 아니, 유령 들린 집 정도가 아니지. 저딴 게 돌아다니면.”
“그런가요?”
한번 갸우뚱하고 쿠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요.”
‘마수랑 너무 붙어 살아서 그런가. 이세계 사람들은 감각이 정말로 이상해.’
도아는 혀를 찼다.
그녀는 계속 쭉쭉 나갔고, 쿠낙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중간중간 레이스들이 등장해서 두 사람은 여기저기 숨바꼭질하듯 돌고 돌아서 탑에 도착했다.
탑의 입구는 사슬로 칭칭 감긴 채,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설마 이 안에 영주 아들이 있는 건가?’
도아는 검으로 사슬을 끊어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죽어라!”
어둠 속에서 검날이 번득였다. 도아는 한 바퀴 돌아 검날을 피하고, 찌르느라 앞으로 쭉 뻗은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약해!’
몸이 홱 딸려온다. 도아는 그가 쓰러지지 않게 그의 뒷목을 붙들었다.
“켁!”
목이 졸렸는지 그가 소리를 냈다.
도아가 빠르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는 모험가인데요. 이 성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 같아서 찾아왔거든요.”
“모, 모험가……?”
여전히 뒷목을 붙잡힌 채로 공중에 덜렁거리며 그가 물었다.
“네.”
도아가 벨트에서 모험가 카드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지, 진짜 모험가인가?”
“그럼요. 모험가 카드 위, 변조는 대죄예요.”
도아가 카드를 도로 집어넣고 그를 휙 당겨서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 그렇군……. 모험가…… 모험…….”
그는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져 기절했다.
“엑!”
당황한 도아는 허둥지둥 그를 살폈다.
“탈진증상이에요. 일단 물을 잔뜩 마시게 하는 게 좋겠어요.”
도아가 조치를 하는 동안 쿠낙은 탑 안을 둘러보았다.
좁은 방 안에서는 배설물의 악취가 났다.
햇빛이 들어오는 곳도 전혀 없었다.
‘정말로 로베른은 어떻게 된 거지?’
성에 들어왔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못 챌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성은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고.’
미르카는 나르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드나드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닐 테고, 영주 일족 역시 엄중한 경계를 받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일어나다니…….
“이제 괜찮으세요?”
도아가 정신없이 물을 마신 사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 고맙네……. 내가 추태를 부렸어. 콜록, 콜록.”
“아니에요.”
도아는 기력 회복을 위한 포션을 그에게 내주었다. 잠시 후 그가 편안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영주 일족이자 총관인 돌프라고 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