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87

87화 이름 (1)

87화 이름 (1)

나는 당황했다.

내 머리 아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루나의 무릎베개를 베고 있었다.

“데미안······!”

내 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루나의 시선을 피했다.

저만치 쓰러져 잠든 족제비가 보였다. 그 옆에는 바보 왕자 알렉세이가 누워 있다. 알렉세이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던 루나가 떠올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상해.”

루나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루나를 봤다.

루나도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지?”

루나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천사가 웃었다.

“언제까지 만질 셈이니?”

그 순간 내 몸의 경직이 풀렸다. 나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굴려 상체를 일으켰다. 루나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루나가 나를 바라봤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에 짧은 바지 차림. 나는 루나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손끝에는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

“왜 눈을 피하니?”

“내가 언제.”

“지금 말이야. 내 눈을 못 쳐다보잖아.”

“아닌데.”

나는 억지로 루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루나의 눈동자가 이전과 달라 보였다.

평소보다 더 반짝인다. 웃음을 머금고 있다.

“세실은 어디 있어?”

“또, 또 눈 피한다.”

“아니거든.”

나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루나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데미안.”

“응?”

“너, 키가 더 커진 것 같아.”

“그래?”

“응. 처음 대륙에 함께 건너왔을 때는 이렇게 크지 않았는데.”

그럴지도 모른다.

한창 자랄 나이의 청소년에게 넉 달은 긴 시간이니까.

루나가 내 주위를 돌며 나를 살펴봤다.

“흐응······.”

“왜.”

이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손도 더 커졌네?”

“그런가.”

“어깨도 넓어졌고.”

루나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신기해. 남자아이는.”

“뭐가.”

“처음 봤을 때는 동생 같았는데, 어느새 이렇게나 커져 버렸잖아.”

“처음 봤을 때도 내가 더 컸거든?”

“키 말고. 분위기 말이야.”

“변한 건 너도 마찬가지야.”

“어떤 점이 변했는데?”

루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또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여러 가지로.”

“그래서 만진 거니?”

그건 실수였다고 항변하자 루나가 까르르 웃었다.

“언젠가 아저씨가 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쿠훌린이?”

“응.”

“무슨 말을 했는데?”

“데미안은 어른이 되면 아주 남자답게 변할 거라고.”

루나의 얼굴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니?”

“뭐라고 했는데.”

“그럴 리 없다고 했지. 저 강아지 같은 얼굴이 어떻게 남자답게 변할 수 있느냐고. 아하하하!”

루나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그러는 거야. 두고 보라고. 자기 말대로 될 거라고. 내기를 하자면서 막, 뭐라더라? 자기는 데미안의 미래를 보고 왔다나? 저 강아지 같은 얼굴이 머지않아 고독한 늑대처럼 변할 거라고.”

쿠훌린과의 추억이 떠오른 탓인지 루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때는 그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나를 보며 루나가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이 낯설었다.

루나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었나.

“데미안.”

“응.”

“역시 너랑 카인은 비슷해.”

또 그 소리인가.

“전에는 내면만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외형도 닮아가는 것 같아. 진짜 형제처럼.”

“형제는 무슨.”

“그래서 카인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거니? 너와 닮아서?”

“내가 뭘.”

“너 그러잖니. 괜히 카인에게 불만 있는 표정 짓고, 화내고.”

“그런 적 없어.”

“카인은 너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문득 카인과 달빛나무를 오르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의 카인은 평소와 달랐다. 말투도 평소보다 부드러웠고, 아이처럼 웃었다.

‘언덕까지 경주다! 데미안!’

달빛나무 언덕을 향해 달리며,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해방감을 느꼈었다.

왜 그랬던 걸까.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카인에게 너무 그러지 마. 너는 모르는 것 같은데, 카인은 아마 상처받고 있을걸.”

루나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카인이? 걔는 무슨 일을 당해도 상처받는 녀석이 아니야.”

카인은 받을 수 있는 상처를 모두 받았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반복해서 경험하며.

소설 속의 카인은 그 이후, 상처받지 않았다. 반대로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됐지. 그도 그럴 것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것으로 보였던 루나를 제 손으로 살해했으니까.

그때 카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오랜 시간 나를 궁금하게 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겠지. 나는 카인이 아니니까.

또한 이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막을 테니까.

“후······.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데미안.”

나는 루나의 손에 들린 태양의 풀을 봤다.

“그거 나한테 줄래?”

“아. 응.”

루나에게서 태양의 풀을 건네받은 나는 아공간에 넣었다.

사막에서 태양의 풀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땅에 심겨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공기 중에 흔들리면 냄새를 맡은 샌드웜이 다가올 수 있다.

“그거 태양의 풀 맞지?”

“응. 맞아. 어디서 찾았어?”

“말도 마. 정말 한참을 찾았거든? 결국 샌드웜의 사체 아래에서 발견했어.”

저만치 샌드웜이 조각조각 해체된 것이 보였다. 카인이 저랬겠지.

“그럼 이제 별의 엘릭서랑 해의 엘릭서 만들 수 있는 거야?”

나를 올려다보는 루나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귀엽다.

“응. 만들 수 있어.”

습관처럼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자, 루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왜 만지고 그러니?”

루나가 내 손을 살짝 밀어냈다.

“오, 오빠도 아니면서······.”

“오빠라고 부르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 그러기로 했었는데. 네가 변심했잖아.”

변심?

“······그래 놓고 님피엘하고는 막 그러고.”

루나가 입술을 내밀며 나를 흘겨봤다.

“흥. 바람둥이처럼 구는 것도 카인과 똑같다니까.”

바람둥이라니.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다.

“말 나온 김에 말인데. 데미안 너 나한테 할 말 없니?”

루나가 양 허리에 손을 얹으며 나를 봤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

“무슨 말?”

“그걸 꼭 내가 말로 해야 아니?”

루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는 거지. 모르니까 물어본 건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던 루나가 후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원래의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런데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인다. 무섭다.

“맞다. 세실 어디 갔냐고 물었었지?”

“아. 응.”

“카인이 씻는 걸 도우러 갔어. 너는 못 봤으려나? 카인이 샌드웜의 체액을 온몸에 뒤집어썼거든. 그래서 씻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누가 숲샘의 물을 계속 부어줘야 하잖아? 그런데 너랑 조조랑 변태 왕자는 기절했고, 그렇다고 여자인 내가 해줄 수도 없잖니. 그래서 세실이 갔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샌드웜의 체액은 기름기가 많아 잘 씻기지 않는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겠지.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샤워를 하고 싶었다. 살림바르 왕국에 온 후로 땀을 많이 흘렸다. 루나도 그럴 텐데.

“루나. 너도 씻어야 하지 않아?”

루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호다닥 달아났다.

왜 저러나 했는데, 제 몸 냄새를 킁킁 맡는 것을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 냄새 안 나.”

“시, 시끄러워 데미안······!”

루나가 입술에 검지를 대며 폴짝폴짝 뛰었다.

아공간에서 장작더미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카인과 세실이 어느 방향으로 갔느냐고 물었다.

“저쪽. 저쪽으로 갔어.”

“나도 씻고 올게.”

“나, 나도 씻을 거니까 빨리 와!”

나는 루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나는 꽤 깔끔한 사람이다. 지구에서는 하루에 두 번씩 샤워했다.

한낮의 태양이 저물어 가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빨리 씻어야겠다. 사하룬 사막은 밤이 되면 무척 추워진다.

발걸음을 서두르며, 나는 간이 샤워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숲샘을 적절히 뒤집어 끼우면 언제든 샤워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브로닉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기왕이면 접이식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지.

문득 미니맵을 보니 우호적 표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아니라 하나인데?

“데미안.”

마주친 것은 카인이었다.

녀석은 하의만 대충 걸치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무슨 남성 화장품 광고 모델처럼 걸어오는 중이었다.

잘난 녀석.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루나가 호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간다.

“너도 씻으려는 거야?”

카인이 평소와 다른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런 카인이 괜히 신경 쓰였다.

루나가 한 말 때문이다.

“그래. 근데 너 그러고 갈 거냐?”

“왜. 문제라도 있어?”

카인이 웃었다. 달빛나무를 보러 가자고 말할 때 지었던 순수한 미소.

나는 아공간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 카인의 몸에 둘둘 감았다.

“이거 덮고 가.”

루나가 저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원래 내가 쓰려고 아껴둔 건데.

카인은 조금 놀란 얼굴이 되어 나를 봤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자식아.

“숲샘은 세실이 쓰고 있을 거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하던데?”

“그래. 곧 추워질 테니 모닥불 좀 피워놔. 장작은 가면 있을 거야.”

“알았다 데미안.”

카인과 엇갈린 나는 다시 미니맵을 보며 걸었다. 세실의 표식이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씻고 있는 모양이다.

문득 세실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진 나는 기척을 죽이며 걸었다. 내 몸을 흐르는 세계수의 혼돈이 그것을 도왔다. 세계수의 혼돈을 잘 이용하면 인간의 기척을 지울 수 있다. 디네베가 그랬듯이. 마치 식물이 된 것처럼.

저만치 높다란 암석의 벽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조르르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암석의 틈으로 눈을 가져가자 숲샘으로 몸을 씻는 세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희고 매끈한 몸. 카인과는 많이 다르다.

어깨가 좁고, 허리는 가늘다. 생각보다 자그만 근육이 부드러운 살결에 가려져 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엿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깜짝 놀라게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세실.”

말을 맺기도 전에 세실이 나를 돌아봤다. 놀란 고양이처럼 부릅뜬 연녹빛 눈동자. 나는 세실이 저렇게 당황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이어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 세실이 바들바들 어깨를 떨며 두 손으로 제 몸을 가렸다. 나는 멍한 눈으로 세실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통찰을 발현했다.

————————

◎ 세실리아 블레오파드 [15세], [Lv.49]

◎ 속성: [그림자]

◎ 특성: [침착함], [인내심], [발달된 감각], [의존적], [애착적], [강박적], [기만적], [밤눈], [민첩성], [정밀함], [······

내 입에서 저절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실리아?”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