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87

87화 성물 호송단(2)

‘황혼의 제레아’.

꿈과 죽음의 여신 플르의 성배기사가 되기 전, 그는 오랜 수행기간을 거쳐야 했다.

편력기사로서 방랑기간을 거치며 자신을 증명하고 왕국기사가 된 이들에겐 두 가지 길이 주어진다.

이대로 왕국군에 복무하며 워 나이트의 직속기사로서 명예로운 전투의 나날을 보낼 것인가, 수행기사로서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나 성배기사를 목표로 할 것인가.

물론 수행기사가 된 이들도 모두가 성배기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정의 끝에서 선택받은 수행기사들만이 신들로부터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성공해내는 기사들은 드물었다.

성배기사들이 제 후임을 찾지 못해 수백 년씩 자리를 지키다 겨우 승천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보통은 20년 내로는 퀘스트를 받기 마련이고, 퀘스트를 완수하는 것도 5년 내로는 이루어졌다.

만약 퀘스트조차 받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왕국기사로 복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제레아 베르툼. 그는 50년이 다 되도록 어떤 신으로부터도 퀘스트를 받지 못했다.

파도치는 대해로 나가 괴수들을 사냥하고, 워 나이트가 일으킨 오크 정벌에 참전해 수백 오크의 수급을 잘랐다.

야만족들의 약탈에 시달리는 변경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도적을 토벌했고, 천둥이 울리는 산 꼭대기 신전에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그의 수행기는 경외에서 조롱으로, 조롱에서 동정으로 바뀌어 갔다.

「이 사람아, 그쯤 했으면 됐지 않았나. 자네가 부족하여 신들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데, 어찌 이리 고집을 부려.」

그가 수행을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제국의 용병으로 뛰고 있을 때였다.

같은 시기에 왕국 기사가 된 그는 자랑스러운 라이온하트의 워 나이트로서 일천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십오세의 나이로 세상을 방랑하여 편력기사로서 십 년, 왕국기사로 의무를 다하며 다시 십 년, 수행 길을 떠나 오십 년.

그토록 떠다녔음에도 그는 신들의 퀘스트조차 받지 못했다.

퀘스트를 받을 자격조차, 인류사의 역사에 남을 초인들뿐이었던 탓이다.

그는 뛰어난 기사였지만, 홀로 전장의 국면을 바꾸는 초인이 아니었을 뿐이다.

무모하고, 무식했고, 무지했다.

보다 못한 꿈의 여인이 제레아의 꿈속에 나타나 말했다.

[아해야. 네 어찌 고난길을 끝없이 방랑하느냐. 네 정성을 만신전이 알고 있다. 이만 돌아가 왕국에 충성하라.]

꿈속의 여인이 신성의 존재임을 깨달은 제레아였지만, 그는 정중히 그것을 거부했다.

“여인이시여. 저의 부족함을 탓하시되 명예를 좇는 제 여정마저 부정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당신들의 권리이되, 도전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권리이니.

제레아는 다시금 수행을 떠났다.

그 어떤 고결한 기사도 가까이하지 않을 진흙탕을 걸었으며, 두 손은 언제나 피로 물들었고, 그 우둔함에 음유시인들이 불명예를 노래하더라도.

그는 100세에 이르러서야 성배기사가 되었고, 이는 역대 성배기사 중 가장 늦은 나이에 각성한 성배기사였다.

* * * *

제국과 북부 야만족들의 경계를 가르는 협곡은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며 경외시 되는 지역이다.

좁은 입구, 내부로 내려갈수록 갈라지는 길들과 그 사이에 넘치는 토착 몬스터들. 그 끝에 다다르면 제국의 국경선과 맞닿아 있다지만, 그곳까지 가는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레아가 이곳을 후퇴로로 삼은 이유는 하나였다.

좁은 입구.

오크와 야만족들의 습격을 받은 제레아는 발 빠른 기병으로 구성된 더미 호송단을 조직해 시간을 벌고, 본격적인 추적을 막기 위해 협곡을 틀어막았다.

공중으로 비행하거나 우회로를 찾은 추격대는 어찌할 수 없어도 대부분의 병력은 이 좁은 입구에서 틀어막은 셈이다.

“방패벽 앞으로! 도끼수들 대기해!”

베벌리 중대장의 우렁찬 명령에 기계처럼 척척 움직이는 오크 분쇄자들.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그들은 저마다 오크의 해골 장식을 과시하며 흉포한 시선을 보낸다.

-WHAAAAAAAA────!!

묵직한 중량을 과시하며 돌격하는 녹색짐승들. 그들의 충돌을 방패벽은 능히 견뎌냈다.

“도끼수들 쳐라!”

방패병들 틈틈이 숨어있던 도끼수들이 능숙하게 오크의 손목을 자르고 목을 날렸다. 철저하게 효율적인 기계적 움직임.

병사들이 저마다 두 마리씩 오크를 처형하자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

-삑! 삐익!

베벌리 중대장의 호루라기 소리에 방패벽의 틈새가 열린다. 오크들의 시체가 쓰러진 틈을 타 선열의 방패벽들이 충분히 확보된 공간으로 후퇴했다.

2열이 1열로 변모되고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삑!

그다음에는 공방의 반복. 1열이 막고, 2열이 찌른다. 다시 1열이 후열로 교대하고 2열이 1열을 대신한다.

단순해 보이더라도 혼잡한 전장에서는 한 치 오차없는 움직임이란 게 가능한 것인가?

힘도, 체격도 떨어지는 오크 분쇄자들은 마치 오크들을 제집 안마당 개새끼처럼 다루며 능숙하게 도살하고 있었다.

‘강하다… 힘 이전의 문제야. 집단으로서의 전투력이 차원이 달라!’

대기명령을 받은 한수호는 발타릭 오크 분쇄자 병단의 맹활약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만신전의 병사들만 해도 D급이었던 사람들이 이 정도로? 하고 감탄했었다.

그들은 D급이었던 것치고는 상당히 잘 싸웠다. 어느 중소길드의 공략대에 가더라도 나름 중추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

그럼에도 레온의 기대치에는 차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땐,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 봤자 중세 농민 출신의 징집병들 아님? 잘 싸워봤자…….

하지만 라이온하트 왕국군은 모두가 직업군인이다. 게다가 나면서부터 축복받은 작물을 먹고 자라는 게 당연한 데다, 전투경험도 현대의 헌터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들은 집단전의 달인이며, 병단 전체가 하나의 기계처럼 움직이는 전쟁의 스폐셜리스트들.

그들의 용맹과 집단 전투력은 가히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트롤이다! 바위트롤이 온다!”

선두 병사의 외침에 파이크를 꼬나쥐는 병사들.

하지만 트롤의 중량은 오크의 족히 세 배. 아무리 제 질량의 몇 배나 되는 방어력을 선보이는 발타릭 병단이라도 진형 붕괴는 피할 수 없다.

“기사들! 거창!!”

쩌렁쩌렁 울리는 레온의 목소리. 발타릭 병단 뒤로 레온의 목소리가 울리자 양익의 기사와 평민 기병들이 창을 들었다.

이들 중 한수호와 김재혁은 ‘기마술 부족’을 이유로 제외되었고.

“대체 어디로 돌격하시겠다는 거지?”

수호와 재혁은 그것이 의문이었다.

발타락 병단은 좁은 입구를 틀어막은 상태였다.

이런 포진은 방어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할지 몰라도 유동적인 병력 운용이 불가하다. 당장 기병들이 달릴 땅도 없었던 것이다.

“돌격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거침없이 기병 돌격을 명령했다. 이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리기 시작했고──

“아, 아군의 후방을 덮치잖아?!”

“위험해!”

두 생도가 경악하는 가운데, 좌익과 우익의 20기씩. 총 40기의 기병들은 발타릭 병단의 후방을 향해 아찔할 정도로 맹질주했다.

아군의 후방을 덮치기 직전의 아찔한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기마술’이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콱!

첫 시작은 최선두의 제레아 경이다. 그는 고삐를 틀어 발타릭 병단의 바로 옆 협곡의 가파른 벽면을 향해 내달렸다.

이런 맹질주로 벽에 부닥친다면 그대로 짜부가 되어버릴 무모한 시도. 하지만 라이온하트의 군마들은 평범한 군마가 아니다.

-히힝!

콱! 하고 땅을 박차 벽을 내딛는 검은 말. 그것은 이내 벽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일견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말은 그저, 자신이 오른 벽을 추락하기 전에 내달리고 있을 뿐.

그리고 이런 신기는 뒤따르는 모든 말들이 해내고 있었다.

“이럇…!””

“달려라!”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전우를 믿고 기꺼이 협곡의 벽을 내달리는 군마들. 발타릭 병단의 양익을 내달린 기마들은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쳤고──

-쿠어?

돌진하던 트롤들에게 흉흉한 눈빛을 번뜩였다.

“찍어 눌러라!”

제레아가 외치자 그의 애마가 호응해 벽을 박찼다. 질주로 인한 가속력과 벽을 박차는 순간 가속력이 더해져 공중에서 트롤들을 덮치는 기마들.

그 모습은 실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열두 마리나 되던 트롤들이 공중에서 내리꽂히는 랜스에 온몸을 관통당했다.

“미, 미친 인간들! 쳐라!”

“뒈져랏!”

오크들이 기겁하면서도 도끼를 꼬나쥐고 돌격했다. 그들은 용감하게 선두의 왕국기사에게 달려들었으나 기사의 랜스에서 불이 뿜는 것이 먼저다.

“신성한 불꽃에 재가 되어라!!”

화르륵 쏟아지는 불길. 마치 레이저 블래스트처럼 나선 형태의 불길이 일직선상을 향해 쏟아졌다.

나선의 불길에 닿은 오크들은 지체없이 뼛조각 남김없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그 불길은 사방으로 퍼졌다.

“크아아악…!”

“부, 불이다!”

오크들이 불길에 당황하는 사이 기사들은 트롤들을 마저 처리하고 그들의 시체를 장해물로 남겨두고 다시 벽을 타며 보병대의 등 뒤로 귀환했다.

“대, 대박…….”

보병들의 전투력만으로도 경악스럽기 그지없는데, 기사들은 아예 그 차원이 다르다.

새삼스럽지만, 라이온하트 왕국군은 현대 지구의 헌터들보다 같은 등급에서 최소 한 단계는 높은 경지에 있었다.

과연, 이 정도면 레온이 기사 생도들과 훈련병들을 보며 마음에 들어차지 않을 만하다.

이 정도 정예를, 군단 단위로 움직이던 워 나이트가 레온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들은 얼마나 수준 낮아 보였을까.

“이, 이대로면 영원히 틀어막을 수도 있겠는데?”

눈앞에 쌓인 몬스터들의 시체 산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방심하지 마라. 놈들도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다가온 레온의 말에 재혁은 왜 레온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사자심왕은 그 자체로 초력의 병기. 진짜 위기가 아니면 조용히 때를 노리겠지.

“그래도 ‘퀘스트’가 있더라도 폐하까지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성배기사 제레아 경도 엄청나게 강한데요.”

“…….”

레온은 답하지 않고 각성자인 재혁이 보고했던 ‘시스템 메시지’를 떠올렸다.

[황혼의 제레아 경을 도와 성물을 라이온하트 국경선까지 호송하십시오.]

-부가 미션 : 제레아 경의 본대를 끝까지 사수하십시오.

이 게이트는 두 가지 목적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는 다섯 갈래로 찢어진 성물 호송단 중 진짜 호송단을 호위해 국경선까지 이동할 것.

둘째는 호송단을 위해 협곡을 틀어막은 제레아와 발타릭 병단을 지원해 성물 호송까지 사수할 것.

단순 효율만 따지자면 제레아를 버려두고 성물 호송단을 쫓는 게 맞을 것이다.

레온이라면 스탈리온으로 하늘을 비상해 능히 그들을 추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레온은 자리에 남기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첫째는 성물 호송단을 흩어진 누군가가 해낼 것을 믿었고,

둘째는 끝을 보지 못했던 명예로운 성배기사를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싶었던 탓이다.

“한수호, 김재혁. 짐이 확인하라 이른 것은 확인했느냐?”

“옙! 오크들의 시체를 확인해봤지만, 어디에도 마정석은 없었습니다!”

이 게이트에서 마정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생존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의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낙원에서 명예로웠던 삶의 보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트의 퀘스트 또한 편파적이지 않다.’

그간 몇몇 게이트의 퀘스트는 그 의중을 숨기고 있었다. 특히 성배기사 게오브릭을 쓰러뜨리라는 퀘스트나 라크샤르의 석상은 노골적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게이트에선 그런 수작질이 느껴지지 않는다. 순수하게 이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그 나름의 공략로를 제시하고 있다.

게이트는 중립인 것인가? 게이트에서 나타나는 퀘스트들은 중립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의 게이트들은 그토록 편파적이고 악의적이었던 것인가?

‘게이트 자체는 중립적이다. 하지만 퀘스트는… 시스템은 악마들이 조작을 가할 수 있는 것인가?’

첫 시도만으로 꽤 많은 추론이 가능해졌다. 몇 번인가 더 시도하면 괜찮은 결론이 나오겠지.

“한수호, 김재혁. 너희 둘은 후방의 협곡에서 혹 다른 생도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때였다. 무언가가 번뜩이더니 레온을 향해 매섭게 쇄도한다.

-까앙!

레온은 검을 휘둘러 그것을 튕겨냈다. 하지만 그 무게의 떨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

레온을 향해 던져진 것은 창이다. 그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 레온의 시선이 공중으로 향했다.

“클클클…!”

기형적으로 비틀린 어금니를 가진 멧돼지 같은 야수가 흉측하게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그 등에 오크를 태우고 있었다.

대족장급의 오크만이 탈 수 있다는 비행야수 본크러셔.

끔찍한 오크 주술의 교배잡종으로 태어난 비행괴수 위에서 난잡한 타투를 새긴 오크가 창을 들고 있었다.

저것이 레온을 향해 던저진 투창임은 틀림없겠지.

“더러운 녹색짐승이… 원거리 무기를 써?”

그리고 그것은 사자심왕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