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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8

87. 거지남매 – 고백

노야르 항구 한쪽의 다 쓰러져가는 창고에 레오와 다섯 명의 기사가 자리했다.

생선 비린내와 바닷물에 젖은 삭구(索具)의 텁텁한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바르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서쪽으로 달아난, 바르트를 포함한 근위기사들은 오른 왕국으로 넘어가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테르탄 가문의 기사들에게 쫓긴 그들은 다섯 명이 죽어 일곱 명이 되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추격대를 이끌던 ‘타디안 로페로’가 그들에게 왕자와 공주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기사들을 물린 덕분이었다.

“그 이후로 저희는 왕자님을 찾아다녔습니다. 벨리타 왕국과 우리 왕국 국경 부근 마을을 돌아다녔죠.”

바르트가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던 중에 왕자님과 공주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릭 드 예리엘 왕자가 자신이 콘라드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라 선언하며 공표한 것이었습니다.”

둘러앉은 기사들도 당시의 절망감을 곱씹은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희는 멍청하게도 그걸 믿었습니다. 왕자님과 공주님의 복수를 맹세하고, 수도 루티나로 달려가 우리를 도와줄 동료를 모으려 했죠. 그런데… 다들 거절하더군요.”

바르트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기사단의 기사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 + +

어두운 선술집에서 만난 친우들은 살이 쭉 빠져버린 바르트에게 안위를 물으며 반가워했다.

허나 복수를 도와달라는 요청에는 난색을 보였다. 그들은 하나둘씩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레오 왕자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모를까. 지금은 에릭 왕자님이 유일한 계승권자이시네. 그분이 불명예스러운 일을 벌이셨고 정통성이 부족한 것은 맞지만, 그분을 해하겠다니… 그럴 수는 없네.”

“맞네. 심지어 지금은 정권도 안정되었지. 왕께서 언제 병마를 떨치고 일어나실지 기약도 없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뿐인 후계자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바르트가 버럭 소리쳤다. 선술집에 손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모두의 눈길이 쏠렸을 격한 외침이었다.

“비겁한 자식들! 자네들에겐 기사로서의 명예도 없는가!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께서 쫓겨났는데 대안이 없다느니, 기사단의 정치적 중립이라느니 하는 변명을 지껄이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의 모욕적인 일침에 친우들은 고개를 숙였다.

한 기사가 바르트의 욕설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자네 말이 맞아. 부끄러워. 하지만 내겐 처자식이 있어서 그런 허황된 명예에 몸을 던질 용기가 없네.”

“허황된 명예라니? 이게 어찌 허황된 명예란 말인가? 이건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는…”

“현실을 직시하게. 왕자님은 한 분밖에 남지 않았어. 왕께서 쓰러지신 지금 그분을 해했다간 반란이 일어날 거야. 예리엘 왕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왕가가 일어서겠지. 자네의 충심을 존중하지만, 자네가 잃어버린 주군을 쫓는 망령이 되어 왕국에 해를 끼치지 않길 바라네.”

“그 입 닥치게!”

바르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비록 고함을 질러 입을 막았지만, 친우의 말에 틀림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에릭 왕자를 죽이는 건 왕실에 큰 해를 끼치는 일이었고, 바르트도 예리엘 왕가가 몰락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어쨌건 그도 왕가에 충성을 다해온 근위기사였으므로.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럼 이 원한은! 왕께 받은 명령을 지키지 못하고, 주군을 잃어버리고, 함께하던 동료를 여럿 떠나보낸 이 원한은 어쩌란 말인가!

그는 술잔을 쾅!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고집스럽게 이를 악물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사귀었군. 자네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내가 어리석었어.”

“이보게. 바르트! 바르트!”

바르트는 성큼성큼 선술집을 떠났다. 한 친우가 달려 나와 붙들었으나, 그는 옷깃에 매달린 손을 매정하게 쳐버리고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 + +

바르트의 회상이 길어지자 다른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왕가에 해를 끼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퍼트 테르탄 공작에게 책임을 묻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놈이 외손자인 에릭 왕자를 즉위시키려 군대를 동원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잠자코 긴 이야기를 듣던 레오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나 보군요.”

“…네.”

테르탄 공작가는 예리엘 왕가 다음가는 콘라드 왕국의 대가문이었다. 보유한 기사의 숫자만 무려 오십에 달했지만, 공작가의 힘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기사 가문인 테르탄 가(家)답게도 공작가는 방계로 이어진 친인척들이 수없이 많았고, 그들 하나하나의 검술 실력은 발군이었다.

그러니 수도에 있는, 친인척들과 함께 사는 라퍼트 테르탄 공작의 저택은 기사로 바글거리는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이 아무리 복수심에 눈이 돌아갔다 한들 그곳에 무턱대고 뛰어들 만큼 분별이 없지는 않았다.

레오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당시에는 본인들의 실력이 지금만 못했다는 뜻이다.

십 년 전 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마는…

“그 후로 저희는 이곳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여기는 어부였던 제 아버지께서 쓰시던 창고였죠.”

항구의 외딴 창고에 몸을 숨기고 복수를 꿈꾸며 검술을 갈고 닦는데, 바르트의 성취가 눈부셨다는 이야기가 뒤따랐다.

바르트는 동료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자신만의 검술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 너머로 나아갔다.

기사들은 바르트에게 검술을 배웠고, 작년에야 모두가 자신의 검술을 완성했다고 털어놓았다.

“한 명의 실력이 늘 때마다 공작령을 한 번씩 습격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바르트가 뭘 깨달았는지 검술 실력이 엄청나게 뛰었죠.”

“왕자님 앞에서 너무 금칠하지 말게.”

“사실이지 않나. 그 이후로 저희는 바르트를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여태껏 뚫지 못했던 공작령의 성에 침입해 집사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죠. 그놈에게 공작의 손자가 오른 왕국까지 나온다는 말을 듣고…”

여기서부터는 레오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로타시 강으로 달려가 팔라스 테르탄을 죽이고, 공작에게 쫓겼다. 쫓기는 도중 두 명의 동료를 더 잃었는지 당시 7명이었던 이들이 5명이 되어 있었다.

쫓기다 죽은 동료의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의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바르트는 다르게 생각했다.

‘하늘의 도우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작을 때려잡으러 수도로 달려가지 않은 것을 자책했으나, 그건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그때 공작을 죽이러 갔더라면 왕자님을 이렇게 뵙지 못했을 것이라, 마냥 안타깝기만 했던 두 동료의 죽음에 위로가 되어주었다.

기사들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바르트가 왕자에게 질문을 올렸다.

“왕자님. 그런데 저희를 어떻게 찾으신 겁니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곤란한 질문이었다.

레오는 잠시 침묵해 말을 골랐다. {추적술}이 가르쳐주는 방향을 따라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나는 벨리타 왕국에서 숨어지내다가 최근에야 우리 왕국으로 돌아왔네. 여행 중에 테르탄 공작가의 후계자를 죽이고 달아난 기사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 수년 전부터 공작가를 번번이 습격하던 자들이라 하더군.”

완전히 지어낸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됐다. 이제 함께해야 할 이들이고, 레나가 있어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공작에게 원한이 있고, 대단한 실력을 갖춘 자들… 어쩌면 나와 협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알아보니 한때 근위기사였던 자들이라지 뭔가. 그 말을 듣고 자네들이 날 데리고 달아났던 이들이란 것을 알았네.”

논리의 비약이 심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종 관계 업적을 믿는 수밖에.

“그런데 자네들이 종적을 감춰서 찾을 수가 없더군. 처음에는 오른 왕국으로 달아났다고 생각했는데, 듣기로는 가이단 가문의 영애가 팔라스 테르탄과 함께 있었다고 들었네. 그녀를 죽이지는 않았다고 들었네만, 오른 왕국의 동부 변경백인 가이단 가문과 척을 지었으니 그쪽으로 달아났을 리는 없고… 이로타시 강에서 그렇게 빠르게 종적을 감추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추측했지.”

레오는 기사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이들이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지 어쩐지를 살폈다.

“배를 타고 나갔다면 십중팔구 가장 가까운 이 노야르 항구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여기서 기다렸네. 이렇게 딱 마주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못 하겠군.”

나름 머리를 굴린 거짓말이었고, 거짓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추론했다는데 뭐 어쩔 텐가.

{추적술}이 이렇게나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과정을 모조리 생략하고, 특정 인물을 찾아갈 수단을 제공했다.

기사들의 입이 따악 벌어졌다.

“고, 고작 그 정도 정보만으로 저희를 찾으셨단 말씀입니까? 왕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들은 감격하며 왕자를 칭송했다.

단지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키려 했던 왕자였다. 고집스러운 신념과 복수심만을 품고 살아오다 보니 잃어버린 왕자님에 대한 충성심이 커졌을 따름이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다잡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 업적 : 주종 관계 – ‘5’,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는 한,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레오를 믿고 따릅니다. ]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영민하신 왕자님! 이분이야말로 진정 왕위에 어울리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께서는 이분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우리에게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음이 틀림없었다.

레오가 손을 들어 기사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그들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왕자님, 그런데 공주님은 어디에…? 죄, 죄송합니다.”

성급한 질문을 던진 기사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용서를 구했다. 왕자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흥분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

송구함에 몸을 잔뜩 움츠린 기사는 다른 기사들의 눈총을 받았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으나,

“잘 있네. 이른 새벽이라 아직 자고 있겠군.”

왕자의 말에 환호성이 터졌다.

기사들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십 년을 망령으로 살아온 그들은 더 이상 망령이 아니었다. 왕자님과 공주님을 지켰고, 이제 영광된 미래가 펼쳐지리라.

왕자와 공주를 모시고 달아난 바린과 닐에 관해 물어보는 이는 없었다. 그런 건 묻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잘 해주었음을, 명예롭게 죽었음을 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 * *

노야르 항구의 초라한 숙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늦잠을 자고 일어난 레나는 좁다란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난데없이 자신을 ‘공주’라 부르는 사내들을 만났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뭐, 뭐야 이 아저씨들은?”

레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오빠를 보았다. 오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를 모시던 기사님들이시란다. 레나야. 넌 공주야.”

“자, 장난치지 말고. 이분들은 누구야?”

“장난이 아니야. 넌 이 콘라드 왕국의 공주란다. 네 이름은 사실 레나 드 예리엘이야.”

“자, 잠깐만. 나 생각 좀 할래.”

레나는 당황해 예쁜 눈을 깜박거리다가 방으로 쏙 도망쳐버렸다. 방으로 들어와 “뭐, 뭐야?”하고 중얼거렸다.

평생을 오빠를 따라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진 레나, 그녀는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빠가 공주의 예법을 가르쳐줄 때만 해도 장난이라 생각했다. 우아한 몸짓을 배우는 게 재미있어서 그 장난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었다. 공주라는 말이 싫지도 않았고.

그런데 내가 진짜 공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빠가 사람들을 불러와서 장난치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속아 넘어가면 평생 놀림거리가 되겠지.

레나는 양 뺨에 공기를 가득 품고 불퉁한 표정으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오빠가 이겼어!” 항복을 선언했지만, 오빠와 이상한 아저씨들의 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레나가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며칠이나 방에 숨어서 눈치를 보았고, 저 이상한 아저씨들이 곧 사라질 거라 믿었지만, 되려 더 나은 숙소로 옮겨져 함께 생활할 뿐 그들은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나도 충격이 컸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카시아였다.

그녀는 레오가 왕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무릎 꿇었다. 천한 계집이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달라며 빌었다.

레오가 이러지 말라며 일으켜 세우고, 기사들에게 자신을 도와준 고마우신 분이라 소개했으나 카시아의 안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레오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아서, 그가 떠나겠다고 했을 때 무작정 따라나섰다.

퇴직금으로 받은 금화 따위는 아깝지도 않았다. 더 해주지 못한 자신이 보잘것없었고, 그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그리고 산에서 그를 지키려 더러운 짓을 했다. 레오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자님이라니.

거처를 옮기고, 며칠 동안 레오가 기사들과 둘러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하는 가운데, 카시아는 식사를 준비하며 눈물을 흘렸다.

감히 오르지 못할 분을 사모했다.

‘나 따위 여자가… 더러운 창녀가 감히 왕자님을…’

카시아는 견디기 힘들었다.

아직도 그를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또 절망했다.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관계다. 나 같은 여자를 만나서는 안 될 분이시다.

그는 우아한 귀족, 고귀한 사람을 만나야만 할 분이셨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그런 짓’과 신발을 꿰매는 것밖에 없는 천한 평민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더럽혀질 분이었다.

결국, 카시아는 한밤중에 짐을 꾸렸다. 가지고 온 것도 많지 않아서 짐은 단출했다.

그간 틈틈이 만든 신발을 공주님 곁에 두고, 왕자님의 신발은… 감히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아서 품에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몰래 떠날 생각이었다.

그분께선 이제 자신을 보필할 기사들을 찾으셨으니 나 같은 여자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분을 뵙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으나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짭짤한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그렇게 그녀는 가당찮은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무작정 북쪽으로, 아버지의 신발가게를 향했다.

그런데,

“카시아!”

레오가 단 하루 만에 카시아를 따라잡았다.

대체 어떻게 나를 찾으셨을까?

“카시아 누나! 말도 없이 어딜 가시는 거예요?”

“……왕자님.”

얼마나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왕자님, 그를 보자 말라붙었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울지 마세요. 무슨 일인지 알려주세요. 도와드릴게요.”

“…절 떠나게 해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떠나시는 거예요?”

“저, 저는…”

카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날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뱉어버릴 날이 왔다.

수풀이 한적하게 흔들리는 초원에서 카시아는 자신이 창녀임을 밝혔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조차도 창녀였음을 알렸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리 와요.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하지만 왕자님께선 이미 알고 계셨다는 듯 놀라지 않으셨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깜짝 놀라 더럽게 여기며 떠나실 줄 알았는데, 되려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잡아당기셨다.

카시아의 가슴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정말 이분은 대단한 분이시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

허나 그녀는 단호하게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멋진 분이시기에… 더욱 함께할 수 없다.

“전 왕자님과 함께할 수 없어요.”

“카시아 누나. 제발… 같이 가요. 누나가 전에 어떤 일을 하셨건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절 누나라고 하지 마세요, 왕자님. 전 당신을 동생으로 본 적도 없어요. 저는… 저는…”

카시아는 가슴 떨리는 말을 뱉어버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말이 멎은 가운데, 한 줄기 바람이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레오는 카시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업적에 휘둘리는 그녀를 동정하고, 온갖 애증이 쌓인 그녀에게 정이 붙어 돕고 싶지만, 이성적으로 사랑한다는 감정은 없었다.

“그러니 이 손을 놓아주세요. 제발요.”

“…하지만! 누… 아니, 카시아.”

레오는 붙잡은 손을 쉬이 놓지 못했다. 어떻게 그녀를 이렇게 보낸단 말인가? 아직 카시아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카시아는 결별을 원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줘야 하나? 나도 사실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건 싫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달고 다녔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레나와 파혼하겠다고 거짓된 태도를 보였던 것은 그에게 큰 상처와 후회로 남았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카시아의 마음을 받아주는 건… 설령 거짓일지라도 그녀를 위하는 일이 아닐까?

레오가 머뭇거리자 카시아가 말했다.

“왕자님께서 절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좋은 누나로 생각하셨죠? 어쩌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

“그러니 왕자님. 저를 보내주세요. 부탁드려요.”

“그럴 순 없어요. 전 누… 카시아, 당신한테 은혜를 입었어요. 그걸 갚아야겠어요.”

왕자의 애원에 카시아의 가슴이 깨질 듯이 흔들렸다. 작은 욕심이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카시아가 조그맣게 입을 달싹였다.

“그럼 저를 한 번만 안아주세요.”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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