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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8

88화 이름 (2)

88화 이름 (2)

세실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어. 어떻게. 이름······.”

그러고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데. 데미안. 나. 나는. 난······.”

세실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이어 암벽에 걸쳐놓은 옷과 신발을 쥔 채, 세실이 달아났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세실!”

세실을 쫓아 달렸다. 그러나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세실은 금세 미니맵의 범위를 벗어났다.

나는 세실의 발자국을 추적했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나는 불안해졌다. 세실이 마음먹고 몸을 숨기면, 우리 중 세실을 찾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먼지야.’

나는 먼지에게 세실의 기척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긍정만 했을 뿐, 세실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먼지야. 왜 그래.’

먼지가 헥헥 혀를 내밀었다.

‘너는 세실이 걱정되지 않는 거야?’

나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세실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

.

.

기계차 옆으로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카인이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 불을 쬐던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데미안. 씻고 온 거 맞니?”

족제비와 바보 왕자 알렉세이도 모닥불 옆에 앉아 있었다.

루나가 내게 숲샘을 달라고 했다. 자기도 씻어야겠다며.

“뭘 그렇게 오래 씻고 왔니? 벌써 어두워졌잖아. 힝. 어떡하지?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자, 자연등불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앗 조조아킴! 너 천재구나!”

“은빛 머리 천사여! 내가 그대를 돕겠소!”

루나가 매서운 눈으로 알렉세이를 쏘아봤다.

그러자 알렉세이가 험험,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루나가 내게 물었다.

“근데 세실은?”

세실이 사라졌다는 내 말에 일행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루나가 다그쳤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직도 내가 본 것을 믿기 어려웠다.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나는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족제비가 말했다.

“데, 데미안이 괴롭힌 건······.”

“데미안이 그럴 리 없다. 조아킴.”

카인이 족제비의 말을 잘랐다.

“세실이라면 그 흑갈색 머리 천사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안타까운 일이! 걱정 마시오 은빛 머리 천사여! 내, 왕궁으로 돌아가는 즉시 전 병력을 동원해 찾아보겠소!”

알렉세이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면 자신의 신분을 예상한 일행이 굽신거릴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말에 반응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행은 이미 알렉세이가 바보 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세실이 걱정되어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험험!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살림바르 왕국의 후계자인 알렉세이 살림바······!”

“이러지 말고 다 함께 찾아보자.”

루나는 당장이라도 세실을 찾아 움직일 태세였다.

그런 루나를 내가 막았다. 우리는 마음 먹고 몸을 숨긴 세실을 찾을 수 없다. 먼지가 도움을 주면 모르겠지만, 왜인지 먼지는 세실을 찾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밤의 사막은 위험하다.

“지금은 안 돼. 해가 뜨면 찾아보자.”

루나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봤다. 그래서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루나는 미련이 남은 눈치였다.

“조심조심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세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세실은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 게다가 몸이 빠르니 위험을 만나도 회피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달라. 밤중에 움직이다가 샌드웜 같은 강력한 몬스터를 만나면 정말로 위험할 수 있어.”

루나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데미안. 세실은 금방 돌아올 거다.”

카인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동쪽 사막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는데도 세실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흰색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났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살림바르 왕국의 정예 전사 부대, ‘맘루크’.

“왕자님!”

그들의 외침에 동료들이 눈을 떴다.

나는 잠든 알렉세이를 툭툭 발로 찼다.

맘루크들이 일제히 내게 시미터를 겨눴다.

“감히!”

알렉세이가 어서 일어나야 불필요한 전투를 피할 수 있는데, 저 바보 왕자는 무슨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게다가 맘루크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는 보통내기가 아닌 듯하다.

나는 알렉세이의 어깨를 손으로 흔들었다. 그러자 분노한 맘루크들이 내게 달려왔다. 빌어먹을. 손으로 깨우는데도 이럴 거냐.

퍼퍼펑!

맘루크들의 눈앞으로 폭발하듯 모래가 튀어 올랐다.

“다가오지 마라.”

카인이 낮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파릇하게 빛나고 있었다.

맘루크들이 주춤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고, 자세를 바로잡은 그들이 재차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사막의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전투태세를 갖췄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내 몸을 엄습했다. 맘루크의 지휘관이 내뿜는 살기. 마치 죽음이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지금이라도 카인의 회귀를 카피해야 하나.

“그만둬!”

맘루크들을 멈춰 세운 건 알렉세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알렉세이가 맘루크들을 노려봤다.

녀석의 이마에는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혹이 볼록하게 나 있었다. 루나가 때렸구나. 잘했다.

“검을 거둬라 자히르 하켐. 이들은 나의 손님이다.”

자히르 하켐.

일명 ‘붉은 모래의 자히르’.

살림바르 왕국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이다.

역시 나의 예감은 맞았다. 만약 전투가 치러졌으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전멸했을 거다.

“실례했습니다. 왕자님.”

자히르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짓에 맘루크들이 시미터를 납검했다.

알렉세이가 거만한 눈으로 루나를 돌아봤다. 루나는 못 본 체했다.

“저, 저것은!”

“샌드웜!”

샌드웜을 발견한 맘루크들이 신음성을 뱉었다.

샌드웜이 워낙 박살 나 있었고, 밤사이 모래바람이 사체 위에 쌓였기에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왕자님.”

자히르의 말에 알렉세이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었다.

“나의 형제들과 함께 쓰러뜨렸다.”

저 허풍선이 자식.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카스티안의 돌을 가져가셨습니까.”

“그래. 그게 있어야 샌드웜을 찾을 수 있으니까.”

알렉세이가 품에서 붉은 돌을 꺼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알렉세이가 샌드웜을 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카스티안의 돌.

샌드웜을 불러낼 수 있는 초대왕의 유물로, 살림바르의 피를 이은 자만이 돌의 힘을 발현할 수 있다.

“위험한 일을 벌이셨습니다. 왕자님.”

“알아. 하지만 샌드웜을 쓰러뜨렸잖아.”

네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렇다면 혹시 태양의 풀도?”

“물론 여기 있지.”

알렉세이가 품에서 태양의 풀을 꺼냈다.

뭐야. 저 녀석도 가지고 있었어?

“왕께서 걱정하셨습니다.”

“나를? 아니면 돌을.”

“왕자님.”

“노인네 이야기는 집어치워. 알았다고. 돌아가면 되잖아.”

알렉세이가 나를 돌아봤다.

“저거 기계차라는 거지? 나를 성까지 태워다줄 수 있겠나? 금발 형제.”

자히르가 만류했지만 알렉세이는 고집을 부렸다.

“말리지 마라! 나는 샌드웜을 쓰러뜨린 형제들과 함께 돌아가겠다! 승리의 기계차를 타고!”

나는 세실을 찾는 것을 도와주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알렉세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도 빨리 세실을 찾아야 한다. 리아논과 디네베와 쿠훌린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을 것이다.

“사흘만 찾아보자. 루나.”

내 말에 루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죄책감을 느낀 거겠지. 저도 모르게 세실을 찾는 일과 가족을 살리는 일을 저울질했을 테니까.

루나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겠지. 나는 나쁜 아이라고.

“쓸데없는 생각 마.”

루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전에 말했었지? 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선한 인물이라고. 너에게 소중한 이들을 걱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야.”

루나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랫입술을 부르르 떠는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이제 가자.”

기계차로 다가간 나는 운전석에 탑승했다.

내 옆에 앉으려던 카인이 문득 뒷자리를 보고는 눈썹을 꿈틀댔다.

“루나.”

“응?”

“앞에 앉아.”

“정말? 그래도 돼?”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나는 헤헤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자연히 루나가 앉아있던 자리는 카인의 차지가 됐다. 옆에 앉은 카인을 보며 알렉세이가 한숨을 뱉었다.

부르릉! 힘찬 소음을 뱉으며 기계차가 움직였다. 우리를 앞장서며 맘루크들이 말을 달렸다.

“이것이 드워프의 기술력인가!”

알렉세이가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밝아진 표정의 루나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지금 눈도 안 깜빡이고 있어! 세실을 발견하면 바로 알려줄게!”

새삼 느끼지만 루나는 정말 착하다. 또한 강하고 아름답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이란 저런 것일까, 생각될 정도로.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루나보다는 세실로 가득 차 있었다.

‘세실리아.’

세실의 진짜 이름은 세실리아였다.

게다가 내가 봤던 세실의 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을 읽을 때도, 이 세계에 들어온 뒤에도 나는 세실을 남자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잘못 알고 있었다.

‘세실은 여자아이야.’

세실은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나 행동을 했었다.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세실은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묘한 느낌이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얼른 갈아입어 세실.’

‘이따가.’

‘언제 추격대가 올지 몰라.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해.’

광산의 숲을 벗어나 마차를 발견했을 때, 세실은 우리 앞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굳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갈아입었다.

우리의 눈을 피하려는 듯이.

‘······데미안.’

‘응.’

‘······봤어?’

미스트에게 당해 기절한 후, 돼지 오줌보 여관에서 정신을 차린 세실은 내게 물었었다.

그러고는 부르르 몸을 떨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세실의 귀는 새빨갰었다.

‘너희 둘이 사귀는 사이니?’

루나를 처음 봤을 때, 세실은 크게 당황했었다.

그때 내가 ‘세실은 남자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애초부터 저 외모에 남자아이라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세실을 찾을 수 있겠지? 데미안.”

“응. 그럴 거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세실은 돌아온다. 세실은 절대로 카인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

“역시 그렇지? 헤헤.”

루나의 웃는 얼굴을 보자 문득 떠올랐다.

루나를 만난 후 세실에게는 전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

세실은 종종 표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멍하니 루나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세실은 루나를 부러워했다.

자신의 삶에서 결핍된 부분을 루나는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까.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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