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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9

88. 거지남매 – 루티나

레오는 카시아의 ‘안아달라’는 요청에 당황했다. 그녀는 관계를 가진 뒤, 다 털어버리고 떠나려 하는 것일까?

‘그, 그래도 그건 조금…’

아무리 카시아가 마음을 떨쳐낼 계기가 필요하다 해도 이 요청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누나 동생으로 정이 붙은 여자를 안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더군다나 카시아의 사랑은 업적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었다. 또, 레오에겐 하필이면 {방중술}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동생 레나가 맞이했던 ‘그 엔딩’으로 얻은 능력… 절대 쓰지 않겠다고 작심한 능력이다.

은연중에 쓰인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레오는 정말이지 카시아를 이런 식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안아달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님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시아의 손이 뻗어올 듯 말듯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가슴을 열고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 몸짓에 레오는 멍청해졌다. 자신이 카시아에게 얼마나 큰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포옹을 바라고 있었다.

레오의 숨이 턱 막혀왔다.

지금껏 카시아는 딱 두 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 ‘카시아의 마음을 녹인 남자’ 업적으로 미약한 호감을 얻었을 때, 카시아는 이렇게 손을 뻗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밀쳐졌던 카시아도 밀쳐지기 직전에 이렇게 손을 뻗었었다.

날 안아달라고.

그건 그를 유혹하는 손짓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손을 뻗었던 장소들은 관계를 청할만한 곳이 못 되었다. 처음 손을 뻗었을 때, 신발가게 뒷방에는 레나가 있었고, 골목길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카시아는 단지 자신을 끌어안아 주기를 바랐던 거다. 옛날부터. 사랑하는 남자의 포옹을 원했던 거다.

레오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헤픈 여자라 단정 지었다. 조금 마음에 들었다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계를 청하는 줄로, 카시아는 창녀니까 그러리라 지레짐작하고는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안아달라는 말에 반응이 없자 카시아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무리한 요청을 했다며 제가 뱉은 말을 후회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순간, 레오는 눈앞의 카시아와 어두운 골목길에서 밀쳐진 카시아가 겹쳐 보였다.

그때도 이렇게 손을 움츠렸었다. 왜 날 밀쳤느냐며 화내지도, 그 앞에서 바로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상처 입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나는… 모질게 몸을 돌렸다. 짜증 나고 더러운 여자라 생각하며.

“죄송합… 아!”

카시아가 과한 욕심을 부렸다고 자책하며 사과하려 할 때, 레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은 아니지만, 애정을 담아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감싸 안았다.

카시아는 히끅,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딸꾹질했다. 이런 따뜻한 포옹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수없이 많은 남자에게 안겼으나, 그때마다 느껴진 것은 껄떡이는 욕망뿐이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욕정을 쏟아낼, 살로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했다.

네 처지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그럴싸한 말을 담는 놈팽이도 있었으나, 그 끝은 모두 똑같았다. 모두가 그녀의 위에서 헐떡일 뿐이었다.

레오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포옹에서는 어떤 정욕도,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훈내 나는 정과 안타까움만이 묻어나왔다.

카시아는 어느덧 부쩍 커버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뺨을 부비며 행복해하던 것도 잠시, 서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비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

그분들이 살아 돌아오신다면, 만약 그런다면, 이런 미안함과 애정으로 날 감싸 안으실까.

카시아는 레오의 어깨에 매달려 아이처럼 울었다.

차갑게 굳어버린 한이 눈물에 섞여 녹아내렸고, 레오는 카시아가 원하지 않을 때까지 온 마음을 기울여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얼마나 오래 껴안고 있었을까.

초원에 이는 바람이 가라앉을 무렵, 카시아가 포옹을 떨치고 제 발로 섰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업적 : ‘카시아의 삶’ 퀘스트 완료 – 카시아가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

[ ‘카시아의 삶’ 퀘스트가 소멸됩니다. ]

“고마워요. 정말로…”

“….”

카시아가 맑아진 눈동자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젖어버린 앞섶을 매만지며 담담하고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는 바라는 것이 없다는 듯한 미소였다.

“카시아…”

“이젠 누나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왕자님.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어쩐지… 자유로워진 느낌이에요.”

카시아는 주위에 널린 들판을 빙글 둘러보더니 허리를 꺾으며 파하하, 큰 웃음을 터뜨렸다. 창관에서 관계를 청산하고 웃었던 것보다 더 크게 웃었다.

해방된 공기가 파앙! 터지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돌풍과도 같은 것이 몰아쳤으나 카시아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는지 한 바퀴 빙글, 팔을 벌려 돌았다.

족쇄에서 풀려난 노예나 해볼 법한 움직임이었다.

굴레에서 벗어난 카시아, 레오는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레오의 눈 아래에 새겨진 숫자가 조금 변해있었다.

[ 12/21 ]

그리고 더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사망 제한도 늘어나 있었다.

[ 사망하셨습니다. 2/4 ]

그걸 알았을 때는 3/4가 되었으나, 정말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카시아의 명랑한 웃음이 초원을 흔들 뿐이었다.

* * *

그렇게 카시아는 떠났… 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마는 헤어짐이란 게 그리 깔끔하고 극적일 수는 없었다.

레오는 카시아를 붙들었다.

어떻게 그 먼 길을 혼자 가려 하느냐 다그치자, 카시아는 “그러게요, 왕자님. 제가 왜 그랬을까요?”라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겠다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카시아는 아버지의 신발가게로 돌아가길 원했다. 레오가 구질구질하게 설득했으나 그녀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레오는 기사들에게 카시아가 오르빌까지 돌아갈 방안을 모색해보라 명하였고, 한 기사가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제가 아는 상단이 있습니다. 벨리타 왕국과 무역하는 상단인데, 규모도 크고 신용이 좋은 편입니다. 그 상단에 동행을 요청하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 상단은 콘라드 왕국의 수도 루티나를 거점으로 삼고 있어서 카시아를 보내주려면 그곳으로 가야 했다.

다음 날, 레나와 레오, 카시아와 기사들은 노야르 항구를 떠나 루티나를 향했다. 카시아를 돌려보내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으나, 수도가 아니었더라도 레오는 그녀를 꼭 배웅했을 것이었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했을 때는 가을, 거지남매 시나리오가 시작된지 일 년이 훌쩍 넘은 시점이었다.

루티나에 도착한 카시아는 지체없이 오르빌로 가는 상단에 몸을 실었다.

“부디 왕자님께서 대업을 이루시길 바라요.”

“…행복하셔야 해요. 누나.”

“푸웃. 명을 받들겠어요. 행복할게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카시아는 곱게 절하며 마차에 올라탔고, 레오의 손에는 선물이 들렸다.

‘에락트’ 피혁이 갑피로 쓰인, 매끈하게 마감된 신발이었다.

안으로는 에락트의 뽀스라운 털이 발을 휘감았고, 밖으로는 어찌나 많은 손길이 들어갔는지 가죽이 거울처럼 번쩍였다. 옆으로 촘촘히 뚫린 숨구멍들과 장식으로 덧댄 가죽은 우아한 품을 이루고 있었다.

이건 카시아가 반년 넘게 공들인 선물임이 틀림없었다.

레오는 벨리타 왕국의 산에 숨어있을 때, 덫으로 에락트를 잡아 그 가죽을 그녀에게 줬었다. 카시아는 산에 숨어있을 때부터 노야르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이 신발을 만들어 온 것이었다.

편지도 있었다. 카시아는 레나가 글자를 배울 때 옆에서 같이 배웠다. 삐뚤빼뚤 엉망인, 꾹꾹 눌러쓴 글은 짧았으나 그녀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레오는 편지를 품에 숨기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카시아는 떠났다.

두건을 뒤집어쓴 채 훌쩍이는 레나를 뒤로하고.

* * *

– 촤악!

루티나의 한 골목길에 피가 쏟아졌다. 골목길 군데군데에 뾰족한 돌을 세운 레오는 바닥에 뿌려진 피를 피해 걸었다.

바르트가 감탄하며 말했다.

“왕자님께서는 정말 박식하시군요.”

그의 손에는 동물의 피가 끈적하게 남아있는 통이 들려있었다. 바르트는 남은 피를 마저 길바닥에 탈탈 털어버렸다.

카시아를 떠나보낸 레오는 근위기사들이 몸을 숨길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다. 문제는 건장한 사내들이 들락거리면서도 의심받지 않아야 했기에 선정이 꽤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루티나 외곽 멀리에 자리를 잡을까 했으나, 레오는 과감히 성안으로 들어와 터전을 꾸렸다.

오랜만에 {뒷골목의 규칙} 정보가 요긴하게 쓰였다.

바닥에 피를 뿌리고, 뾰족한 돌들을 세워둔 것은 이곳에 새로운 패밀리 하우스가 생겼음을 은연중에 알리는 행위였다.

레오는 깡패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간 패밀리에 들어가 생활했던 경험을 살리는 것이었다.

별달리 활동하지 않는다면 이곳의 패밀리들은 우리를 딱히 견제하지 않을 것이고, 민간인들도 이곳을 어슬렁거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경비병이 시비를 걸거든 뇌물을 먹이면 된다. 대부분의 패밀리들이 그러하듯이.

돈 걱정은 없었다. 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에겐 테르탄 공작령을 습격해 털어온 돈이 제법 많았고, 그들은 그 돈을 기꺼이 주군께 바쳤다.

왕자의 품위 유지비를 생각하면 푼돈이겠지만, 이런 패밀리 하우스를 차리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또, 레오도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 거지로 살아왔고, 소시민인 민서의 정신이 섞인 그가 사치를 부릴 리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왕자의 검소함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 끝났으니 들어가지.”

레오는 바르트를 이끌고 새로 단장한 황량한 건물에 들어서서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건물 위층은 주거공간으로 삼았다. 기사들이 머물 방들을 마련해주고, 레나의 방에 특히 신경을 기울였다.

아직 가구도 들이지 못한 방이 제법 있었으나, 레나의 방에는 이미 필요한 가구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따뜻하고, 우아한 것들로만 골라 넣었다.

이윽고 기사들이 우르르 로비로 몰려 내려와 도열했다. 레오는 익숙하게 그들의 경례를 받아넘기고, 자리에 앉혔다.

자, 이제 어떻게 에릭 드 예리엘 왕자를 쫓아내고 {혈통}을 되찾을 것인가…

레오와 기사들은 노야르 항구에서 만났을 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었다.

정통성이 있는 왕자와 그를 따르는 강력한 기사들. 시도해봄 직한 일이 무궁무진했다.

가장 쉽게 떠올릴 법한 일은 반란이었다. 정통성 있는 왕자의 생환을 널리 알리고, 노야르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군대를 모아 현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허나 반란이라는 선택지는 빠르게 지워졌다.

세력에서 너무 밀렸다. 콘라드 왕국의 귀족 대부분은 라퍼트 테르탄 공작을 따랐다.

물론 그 대부분이라는 걸 꼭 집어 말하자면 수도에 머무는 귀족들만 놓고 보았을 때의 얘기지 왕국 전체의 귀족들을 놓고 보면 틀린 말이겠으나, 그게 그 말이나 다름없었다.

수도에 머무는 귀족들이 알짜배기들이고 수도를 떠나 각자의 영지에 박혀있는 귀족들은 보통 정치싸움에서 밀려난 자들이니까.

어쨌든, 테르탄 공작이 왕자의 편을 드는 이상 반란이라던가 내전과 같은 세력싸움은 가망이 없었다.

각자의 영지로 떠난 귀족들을 모조리 규합한다면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시작부터 불리한 싸움에 명분만을 보고 같은 편이 되어주겠다며 손을 내밀 귀족은 거의 없을 터였다.

이런 논지로 바르트를 포함한 기사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레오도 자신 나름의 상황 때문에 반란을 주저했다.

어쩌면 떠나온 노야르 항구에서 적법한 왕자가 돌아왔음을 밝히고 세력을 쌓았다면 시나리오가 즉시 클리어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심지어 수도에 숨어있는 지금도, “내가 왕자고, 레나는 공주다!” ─ 라고 선언하는 즉시 에릭 왕자를 쫓아내는 과정 없이 엔딩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는 그 가능성을 버렸다. 그렇게 엔딩을 맞이한들 엔딩 이후의 삶은 불행할 터였다.

매우 높은 확률로 우리는 에릭 왕자의 군대에 의해 묵사발이 나고, 처형당하겠지.

또, ‘엔딩’이 찾아오는 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자칫하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엔딩을 맞이하기도 전에 박살이 날지도 몰랐다.

레오는 지금껏 겪은 엔딩들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며 생각에 잠겼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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