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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9

89화 왕의 선물

89화 왕의 선물

세실의 성장기는 어두웠다.

물론 어머니라는 유일한 위안처가 있었지만, 세실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봤다.

이후 도주 생활을 이어가던 세실은 레이븐에게 가족의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 레이븐도 죽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세실. 아니스를 위해서라도.’

반면 루나는 가족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자랐다.

쿠훌린도, 리아논도, 디네베도, 아니 은월섬의 모든 이가 루나를 사랑했다. 섬은 평화로웠고 행복이 가득했다. 루나에게는 트리스탄, 케일라 같은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소설 속의 루나는 그중 많은 것을 잃고 결핍된 상태로 등장한다. 가족을 포함해, 은월의 단을 지탱하던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루나는 다르다. 세실이 보기에 루나는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행복한 공주님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세실의 위안처는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와 외숙부를 잃고 갈 곳 없이 흔들리던 마음은 어디에 머무르고 싶었을까. 카인? 아니다. 세실에게 카인은 갚아야 할 빚을 상기시키는 존재. 결코 위안처가 될 수 없다.

‘쿠훌린.’

세실은 쿠훌린에게 의지했다.

쿠훌린도 세실을 아꼈다.

그러고 보니 쿠훌린은 우리 모두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세실을 대할 때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쿠훌린은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쿠훌린을 바라보던 세실의 눈빛이 생각났다. 세실은 아마도 쿠훌린과 리아논을 부모처럼 여겼던 것 같다.

나는 알 수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데미안.’

강아지처럼 나를 올려다보던 세실을 떠올렸다.

루나와의 첫 대련 때,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던 세실을 떠올렸다. 카인을 따라가기로 결정하기 전, 어깨를 움츠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세실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세실은 쿠훌린을 의지하는 것만큼 나를 의지했던 것은 아닐까.

“······.”

메마른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지나갔다.

기계차의 소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등 뒤로 사라지는 모래바람의 여운을 느끼며, 나는 저 멀리 살림바르 왕성을 둘러싼 아마빛 성벽을 바라봤다.

“거의 다 왔소! 형제들이여!”

성문이 점차 가까워졌다.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알렉세이를 보자마자 성문을 개방했다.

“모래의 물결 위를 걷는 자! 살림바르 왕국의 찬란한 두 번째 빛! 용감하고 자비로우신 알렉세이 왕자 전하 만세!”

경비병들의 외침이 공기를 울렸고, 주위의 모든 이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왕자가 맞기는 하네.”

“하하하! 은빛 머리의 천사여! 그렇소! 내가 바로 살림바르의 왕자 알렉세이 살······!”

“근데 왕자가 왜 그런 변태 짓을 하려 했니?”

“그, 그것은 그대가 너무 아름다······!”

“아, 왕자님이니까 존댓말 해야 하는 거니? 나도 막 저런 거 해야 해? 모래의 물결 위를 걷는 어쩌고저쩌고.”

“그렇지 않소! 그대들은 모두 나의 형제! 나와 함께 샌드웜을 사냥한 전사들이니까!”

“그러면 세실 찾는 거 꼭 도와줘야 해? 알렉세이.”

루나가 알렉세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알렉세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은빛 머리의 천사여! 하하하하하!”

바보 왕자는 정말 소설 속 모습과 똑같았다.

성벽을 지나 도시로 진입하자 이국적인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거리에는 각종 향료와 과일의 냄새가 가득했다.

상인들이 그들의 물건을 홍보했고, 손님들은 흥정을 벌였다.

“와······.”

역시나 루나는 입을 헤벌린 채 주위를 둘러봤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렉세이가 마치 여행 안내원처럼 입을 나불댔다.

루나는 적절히 대응해 주며, 가끔 웃는 얼굴로 알렉세이를 돌아봤다. 알렉세이가 더욱 적극적으로 세실을 찾도록 나름의 미인계를 쓰는 듯하다.

“내 반드시 흑갈색 머리 천사를 찾아내겠소! 왕자의 명예를 걸고! 하하하하!”

이윽고 우리는 왕성에 도착했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성벽. 사하룬 사막의 모래암으로 건축된 거대한 성이 오전의 태양빛을 반사하며 황금처럼 빛났다. 성문은 두꺼운 철과 나무로 이뤄진 단단한 구조물이었다. 성문 위로 또렷하게 새겨진 살림바르 왕가의 문장이 보였다.

알렉세이는 거침없이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오. 왕을 뵙고 와야 하니까.”

어느 방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 알렉세이가 자히르와 함께 사라졌다.

방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살림바르 특유의 화려한 실내복을 걸친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곧 준비가 끝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전령이라도 다녀간 것인지 테이블 위에는 벌써 다양한 별미가 준비되고 있었다. 향신료 가득한 구운 양고기, 색색의 과일과 채소, 그리고 금가루가 뿌려진 빵 등이 눈길을 끌었다.

루나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루나는 많이 먹지는 않지만, 먹는 것 자체는 매우 좋아한다.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시길. 문밖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여인들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리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그러던 중 루나가 내 어깨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데미안. 좋았니?”

“뭐가?”

“음식을 차려 준 여인들 말이야. 막 흘끔흘끔 쳐다본 거 아니니? 복장이 꽤 야하던데.”

본능적으로 눈이 가기는 했다.

하지만 굳이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아니야. 카인이 그랬지.”

“그런 적 없다 데미안.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조아킴이 눈을 떼지 못하더군.”

“뭐야 조조아킴. 아니라고 못 하는 거 보니 정말인가 본데?”

“그, 그건······!”

루나가 변태 조조라며 족제비를 놀렸다. 나이도 어리면서 제일 밝힌다고.

족제비가 울상이 되어 나와 카인을 돌아봤다.

그것을 무시하며 내가 말했다.

“곧 왕이 우리를 부를 거야.”

“왕이?”

“응. 아마 우리에게 선물을 주려 할걸?”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보니까 알렉세이는 왕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던데?”

“그건 녀석이 중2병에 걸렸기 때문이지. 살림바르의 왕은 성군이야.”

“중2병?”

“사춘기가 심하게 왔다는 뜻이야.”

“아.”

루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투가 그랬구나.”

머지않아 내 말은 증명됐다.

식사를 마칠 때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알렉세이가 신나는 얼굴로 외쳤다.

“따라오게 형제들이여! 왕께서 선물을 하사하시겠다는군!”

방을 나서 알렉세이를 따라 걸으며, 나는 조금 기대했다.

내가 알기로 살림바르 왕성의 보물고에는 쓸만한 무기가 많다.

“어서 오게.”

보물고 앞에서 살림바르의 왕, ‘무스타파 살림바르’가 우리를 반겼다. 알렉세이와 매우 비슷한 얼굴. 마치 알렉세이의 30년 후를 보는 듯하다.

나는 왕을 향해 선 채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왼손으로는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는 살림바르 왕가의 전통적인 인사법으로, 전사의 용기와 명예를 상징하는 행동이다.

“살림바르의 위대하신 술탄. 귀하의 지혜와 공명정대함은 아스트레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무스타파의 눈동자에 흥미가 어렸다.

“그대는 살림바르의 예를 아는 소년이로군.”

카인이 나를 따라 왕에게 예를 표했다.

루나와 족제비도 어설프게 우리를 흉내 냈다.

“왕자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들었소. 부족한 왕자의 아비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요.”

무스타파는 보물고의 물건 중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주겠다고 했다. 족제비가 눈치도 없이 여러 개를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었다가 루나에게 꿀밤을 맞았다.

나는 세실의 것도 챙길 요량으로, 이 자리에 없는 동료의 것까지 골라도 되느냐고 물었다. 알렉세이가 미리 말해둔 것인지 무스타파는 흔쾌히 허락했다.

병사들이 보물고의 철문을 열었다. 우리는 기대에 찬 얼굴로 보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세이가 루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보물들을 자랑했다.

“나는 검을 갖고 싶어. 가볍고 튼튼한 검 없니?”

루나의 말에 알렉세이가 몇 자루의 검을 추천했다.

대부분이 알렉세이가 가진 것과 같은 시미터였지만, 우리가 사용하기 좋은 것들도 있었다.

“난 이걸로 할래.”

몇 개의 검을 휘둘러 보던 루나가 적당한 검을 찾았다.

카인도 저만치에서 검을 고르고 있었다.

족제비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데미안. 너는 뭘 고를 거니?”

나는 조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루나와 카인처럼 검을 고르려 했는데, 먼지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먼지야. 더 좋은 물건이라도 있어?’

먼지의 의지가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그곳을 향해 걸었다.

“데미안. 어디 가?”

“잠시만.”

루나가 나를 따라왔다.

알렉세이도 따라오려 했지만 루나가 막았다.

잠시 후, 우리는 보물고의 후미진 장소에 와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목걸이를 발견했다. 색바랜 검은 보석 하나가 박힌 평범한 물건이었다.

‘먼지야. 이거 맞아?’

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걸이를 손에 들고 살펴봤다. 다시 봐도 특별한 물건 같지는 않다. 왜 이런 목걸이를 가져가라는 거지?

먼지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헥헥 혀만 내밀 뿐 대답하지 않았다.

“데미안. 목걸이는 왜?”

루나도 의외였는지 동글게 눈을 뜨며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나는 그냥 물끄러미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의 얼굴이 돌연 새빨개졌다.

“너, 너너너 설마······!”

응?

“······그, 그런 거 나 관심 없거든? 나, 나, 나는 전사니까. 괘, 괜히 전투할 때 방해만 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루나가 발뒤꿈치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발끝을 모으고 선 모습이 귀엽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루나는 은근히 장신구에 관심이 있다.

직접 구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선물하면 무척 기뻐한다.

“가자. 세실의 것도 골라야 해.”

루나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데미안.”

“응?”

“······너 역시 바람둥이 아니니?”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루나를 돌아보는데, 먼지가 다시 반응했다.

‘먼지야. 또 왜.’

나는 먼지의 의지에 따라 발을 움직였다.

“왜, 왜 대답 안 하니?”

이번에 먼지가 골라준 것은 한 쌍의 검은 단검이었다.

모양은 단순하지만 한눈에 봐도 좋은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한 자루가 아닌 두 자루 세트다.

세실에게 딱이겠는데.

‘먼지야. 고마워.’

단검을 받고 기뻐할 세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그려진 것은 바들바들 어깨를 떨며 벌거벗은 제 몸을 두 손으로 가리는 세실이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쪼그려 앉아있어야 했다.

그러자 루나도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민소매에 짧은 바지 차림으로. 안 돼. 지금은 안 된다고.

“데미안. 어디 아파?”

“······.”

“너 얼굴이 빨개.”

루나가 내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흠칫 놀라 외쳤다.

“열이 있어!”

나는 루나에게 잠시 쉬면 낫는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루나는 아픈 친구를 절대로 두고 갈 수 없으며, 또 그런 식으로 낫는 병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나를 업으려 하길래 나는 거의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며 거부했다. 결국 나는 녹음심장의 힘마저 끌어올려 명상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나는 보물고의 입구 근처로 돌아갔다.

카인은 아직도 검을 고르고 있었다.

“너 아직도 못 골랐냐.”

“괜찮은 검이 두 자루 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군.”

나는 카인이 고른 두 검을 차례로 손에 쥐어봤다.

확실히 좋은 검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중 하나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게 좋은데.”

“앗! 내가 고른 검하고 비슷하게 생겼어! 이거 봐!”

루나의 말대로, 내가 든 검은 루나가 고른 검과 비슷했다. 아니, 길이만 다를 뿐 거의 똑같았다.

나는 이 검이 탐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목걸이를 골랐다. 지금이라도 목걸이를 버리고 검을 택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먼지가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때, 번쩍이는 금빛 화살통을 품에 안은 족제비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족제비.”

“응?”

“그거 도로 갖다 놔.”

“왜, 왜?”

“너는 이 검을 고를 거니까.”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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