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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0

90화 용기

90화 용기

밤이 찾아왔다.

수도로 잠입한 세실은 높다란 나무 위에 올라 살림바르 왕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실은 두려웠다.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달아난 것이 후회됐다.

어제, 세실은 데미안이 자신을 찾아 헤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가지 못하고 계속 달아났다.

데미안을 마주하면 무어라 말해야 할까.

데미안은 무슨 말을 할까.

‘······데미안은 내게 실망했을 거야.’

아버지는 세실을 남자아이로 키웠다.

실제로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 레이븐, 그리고 오래전에 만났던 외조모(外祖母)뿐이었다.

‘반갑구나 세실리아. 미다크라고 부르렴.’

미다크 페이드린은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나이는 몰랐지만, 어머니의 어머니라기에 그녀는 너무도 젊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세실의 눈에는 마치 어머니의 자매처럼 보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외모에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바람숲의 엘프들처럼.

돌연 님피엘이 데미안의 볼에 입을 맞췄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세실은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세실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의 흐름을 틀었다. 억지로 머릿속에서 그때의 장면을 지웠다.

그림자 성에서의 훈련이 떠올랐다.

‘일어나거라. 세실.’

훈련은 혹독했다.

세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아버지는 세실이 여자아이인 것을 숨겼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세실은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자신의 성별을 잊어버렸다.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이븐과 도주 생활을 이어갈 때도, 비츠크 산맥의 마석 광산에 잠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실은 남자아이처럼 행동했다. 오히려 그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던 중 데미안을 만났다.

‘얼른 갈아입어 세실.’

그때 세실은 처음으로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머뭇거렸다.

‘이따가.’

‘언제 추격대가 올지 몰라.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해.’

놀라운 심경의 변화였다.

세실은 자신이 여자아이임을 의식했다.

낯설다.

그리고 이상했다.

‘지금 모습은 너무 눈에 띌 것 같은데.’

‘어째서.’

자신의 머리를 헝클던 데미안의 손.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손길이 싫지 않았다. 살갗에 닿을 때마다 묘하게 간지럽기도 했다.

그 생소한 감각은 상대를 만지고 싶다는 욕구로 변했다. 데미안의 예쁜 금발. 강아지 같은 얼굴.

그래서 용기를 냈다.

‘머리. 눈에 띄어.’

‘그래?’

‘예쁜. 금발.’

‘예쁜 금발?’

데미안의 머리카락은 빛나는 보석 같았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손끝이 간질거린다. 아직도 그때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다.

세실은 마음이 아팠다.

데미안에게는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

적어도 쿠훌린이 말을 꺼냈을 때라도.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는 거야?’

‘사실. 을······.’

‘그러면 루나와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거야. 진짜 자매처럼. 내 딸이기는 하지만 루나는 꽤 괜찮은 아이거든. 분명 네게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물론 디네베도.’

그 말이 맞다.

루나는 정말로 좋은 아이다. 디네베도.

‘그리고 어쩌면, 데미안과는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지. 지금과 다른 의미로.’

‘다른. 의미?’

‘데미안이 너를 여자아이로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쿠훌린의 말대로 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기억한다.

데미안과의 관계가 무너질까 봐.

친구로서도 지낼 수 없게 될까 봐.

‘아니야. 데미안이 그럴 리 없는데.’

세실은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데미안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것임을.

그럼에도 두려웠다. 너무 두려웠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까 봐.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데미안에게 들켜버렸다.

사막의 모래 위에서 알몸으로 데미안을 마주하기 전, 세실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카인이 몸을 씻는 것을 도와야 했으니까. 그래서 데미안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세실리아?’

데미안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었지?

하루가 지나는 동안 세실은 그 의문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두렵고 걱정됐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났다. 데미안은 어떻게 ‘세실리아’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데미안에게는 신비로운 점이 많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그는 페이드린의 블러디드를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레이븐이 내게 물은 적 있어. 조상 중에 먼 북동쪽에서 온 사람이 있느냐고.’

세실의 의문을 해소한 말이었다. 그때 세실은 데미안에게 페이드린의 피가 일부 흐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런 일은 또 벌어졌다. 데미안은 아르테미스의 블러디드를 발현했다.

게다가 데미안은 ‘혼돈’이라 불리는 능력까지 지녔다. 분명 소서러라고 했었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데미안은 이 세계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세실은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보았다.

어쩌면 데미안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 아닐까.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세실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언제 이곳에 온 것일까. 분명 주위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가 세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제야 세실은 알았다. 자신이 또 달아나려 했음을.

가늘게 몸이 떨렸다. 어떻게든 데미안에게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눈앞에 마주하니 또 회피하려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왜 이런 걸까. 왜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까.

“가지 마. 세실.”

세실은 알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애꿎은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네가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가지 마.”

부옇던 시야가 맑아졌다.

다시 흐려지고, 다시 선명해졌다.

점멸하는 세상 속에서 세실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나는 네가 필요해.”

그 말에 두근, 세실의 가슴이 뛰었다.

세실은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데미안을 끌어안았다.

***

일루산은 아치형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창백한 밤하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일루산은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방문자의 기척을 감지했다. 그가 누구인지도.

“네몬.”

“수장.”

어느새 네몬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창가에서 몸을 돌린 일루산은 네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주 잠시, 네몬에게서 어렸을 적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군주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내게 보고하는 이유는.”

“수장께서 이끌어야 하는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너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말인가.”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일루산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타깃은.”

“은월과 흑월입니다.”

“은월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다.”

“그 은월이 아닙니다.”

네몬의 입술이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이미 아실 테지만, ‘작은 달빛’이 대륙을 유랑 중입니다.”

일루산이 눈썹이 아주 조금 꿈틀댔다.

“또한 아시겠지만, 작은 달빛에게는 함께 여행하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 모두가 타깃이 되겠지요.”

네몬의 붉은 눈동자가 뱀처럼 번들거렸다.

“물론 오메가까지도.”

“그분께서 그리 명하신 것인가.”

“글쎄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군요.”

일루산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그러나 네몬은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일루산을 똑바로 마주 볼 뿐이었다.

“개시일은 미정입니다. 앞선 내용과 더불어 수장께서 직접 여쭙는 것도 좋겠지요. 다만 임무를 떠날 병력의 발톱을 첨예하게 갈아놓아야 할 것입니다. 명하신다면 제가 인원을 선발하고, 훈련시키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하겠다.”

“뜻대로 하시지요.”

“네몬.”

일루산의 표정은 무심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감춰진 뜨거운 무언가가 네몬의 눈에는 보였다.

“가울의 일에 대해 할 말이 없는가.”

“그가 무단으로 병력을 이끌고 출진한 일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불필요한 확인이다.”

말을 잘랐다.

일루산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날, 너는 자리를 비웠다.”

“잊으신 겁니까 수장. 제게는 단독으로 움직일 권한이 있습니다.”

“너는 가울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가.”

어느 틈에 창가를 벗어난 일루산은 네몬의 얼굴을 코앞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네몬은 표정 없는 눈으로 일루산을 바라봤다. 자신의 목을 겨눈 그의 ‘블레이드’를 느끼며.

“사실을 고하라.”

네몬의 붉은 입술이 길게 찢겼다.

그는 소리 없이, 그러나 자신의 모든 이를 드러내며 일루산을 향해 웃고 있었다.

“다시 묻겠다. 너는 가울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가.”

“없습니다.”

블레이드가 사라졌다.

“물러가라.”

.

.

.

일루산의 방을 벗어난 네몬은 그림자 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미스트. 그리고 크쉬.

“네몬.”

크쉬가 옆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서열에서는 ‘베타(Beta)’인 크쉬가 높았지만 네몬은 서열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 게다가 네몬은 일루산과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네몬의 발이 멈췄다.

미스트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물러나시지요.”

“네몬.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크쉬가 흠칫 놀라 미스트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을 뿌리치며 미스트가 외쳤다.

“네가 그동안 가울에게 수작을 부려왔던 건 알고 있어! 이제는 일루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데!”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미스트.”

차가워진 네몬의 목소리에 미스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시, 싫어! 가울을 죽인 것도 너지?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흉계를 알아내고 말······!”

후드득! 창문 위로 핏줄기가 뿌려졌다.

“크쉬!”

미스트가 소리쳤다.

크쉬의 어깨에서 피가 솟았다.

네몬이 미스트에게 블레이드를 휘둘렀고, 크쉬가 몸으로 막았다.

“용서 못 해!”

미스트가 네몬에게 달려들었다. 크쉬가 놀란 얼굴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미스트의 블레이드는 이미 네몬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네몬의 얼굴에 조소가 스쳤다.

카아앙!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크쉬와 미스트가 뒤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서둘러 몸을 추스른 크쉬가 기절한 미스트를 등 뒤로 감추며 네몬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네몬.”

네몬은 크쉬의 아마빛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공손한 어투와 달리, 그의 눈에 분노가 서려 있다는 것을 모를 네몬이 아니었다.

“미스트는 제가 단단히 꾸중하겠습니다.”

네몬은 블레이드를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크쉬와 미스트를 지나쳐 걸었다.

그는 의문에 빠져들었다.

‘흥분했던 것인가. 이 내가.’

네몬은 자신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의 자신이 아니다.

흥분할 거리도 아니었다.

미스트의 저런 모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그렇군.’

네몬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흥분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아니, 흥분했던 것이 아니다.

자신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큭큭큭큭큭······.”

과연 대단한 자였다.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다니.

그의 이름을 짓씹었다.

“일루산 블레오파드.”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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