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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0

90화 성배기사 제레아(1)

“와아아아아아…!”

“제레아 경 만세!”

“사자심왕 만세…!”

병사들의 환호 속에서 레온이 ‘자줏빛 안개’에 의해 초토화된 전장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왕의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기사들은 물론 재혁과 수호도 그 뒤를 따랐고.

“꿀꺽…!”

눈앞에 펼쳐진 전장을 살피며 마른 침을 삼키는 두 사람.

압승.

아니, 이건 승리냐 대승이냐 따위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전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학살이다.

성배기사 제레아 출격 후 불과 30분. 협곡 앞 오크 진지는 지옥도로 변모했다.

“30분 만에… 천 이상이 죽었어.”

“이것이… 성배기사.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성배기사를 처음 목격하는 게 아니다. 제주도 게이트에서 대지와 풍요의 성배기사 ‘장엄한 게오브릭’을 목격했으니까.

지상의 정점인 초력의 생명체.

살아있는 성자이자 신의 선택을 받은 초월자들.

그 한 명인 노구의 성배기사는 콧수염과 갑옷을 똑바로 하곤 수급 하나를 가져와 무릎 꿇으며 바쳤다. 크라칸의 목이었다.

“이 영광을 죽음의 여신과 사자심왕께 바칩니다.”

이 모든 성배기사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최강자. 정점의 성배 수호자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 그는 기꺼이 제게 바쳐진 수급을 손아귀에 붙잡았다.

“참으로 더럽고 흉악한 상판이로다.”

레온의 손아귀에서 크라칸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더러운 피로 더럽혀진 손을 한 기사가 닦아냈다.

“꽤 화려하게 해치웠군, 제레아 경.”

“놈들의 주구를 끌어들일 생각이었습니다만…….”

“녹색 짐승들치곤 참을성이 좋군.”

레온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시선을 느꼈다. 죽음의 안개를 피해 물러났지만, 여전히 가까운 오크 본대. 그들의 사나운 시선이 자신과 제레아를 향하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레온에게서 쏟아지는 ‘오크 도살자’의 기운에 겁 먹는 이가 속출할 정도다.

“이만한 도발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필시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장 놈이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설마 대족장이 출현한 걸까요?”

“그럴지도.”

레온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200년 전쯤… 이 게이트에선 2년 뒤, 제국에 ‘혼돈의 군주’ 소환사건이 일어나고 온 세상의 오크들이 준동했다.

그 대전쟁에서 오크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인간이든, 악마든 가릴 것 없이 때려 부수던 것이 오크들이었으니.

‘하지만 꽤 통솔된 움직임을 보였지. 오크 신의 선택을 받은 오크 챔피언이라도 있는 건가?’

간혹 있었다.

오크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모든 오크들을 통합하고 그 대전쟁을 일으키는 우두머리가.

악종과의 전쟁에서 준동한 오크들은 자신의 주전장과는 반대편에서 싸웠다. 듣기로는 동방의 강대국 하늘왕이 다스리는 대제국이 오크들의 손에 무너졌다고는 들었을 뿐.

끝내 악종들을 처리해가며 하늘제국을 무너뜨린 오크들과도 충돌했지만, 그때에 오크 중에서 ‘걸물’이라 불릴 만한 대족장은 보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직은 판단하기 이른가.”

레온은 말머리를 돌렸다. 새까맣게 몰려든 오크와 짐승신들의 본진 안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 * * *

협곡 안 막사. 병사들이 보초를 서며 오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가운데, 성물 호송대의 지휘관인 제레아의 천막에 레온이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전장에서 어리광부릴 정도로 어리진 않네.”

“하하, 그 누가 감히 폐하를 어리다 무시한단 말입니까.”

레온의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대 중반의 앳된 청년으로 보였다. 하지만 성배기사라 하면 그가 가장 전성기인 시절로 몸을 재구성한다.

레온의 경우 워낙 젊은 시기에 성배기사가 되었다지만, 다른 성배기사들도 그와 비슷하거나 30대 즈음의 나잇대가 일반적.

현재 이 세계를 기준으로 해도 레온의 나이는 96세임을 감안하면 성배기사 중에선 나이가 많다 할 수 없지만, 마냥 어리다 할 나이도 아니다.

당장 눈앞의 할아버지뻘인 제레아도 올해로 158세로 성배기사 중에선 중간에 속한다.

“그나저나 그대는… 여전하군.”

레온은 이 노쇠한 성배기사를 보았다.

장장 70년의 세월 동안 수행길을 걸으며 온 대륙을 누빈 자.

가장 고령에 성배기사가 되어 그 스스로의 전성기조차 나잇대 그대로인 그는 겉만 보면 인자한 할아버지 같다.

“불과 얼마 전, 왕명을 받을 때에 뵈었는데, 어찌 그리 그리운 눈을 하십니까. 이 노구로선 황망하기 그지없군요.”

“그렇지도 않다네.”

레온은 악마와의 대전쟁에서 수많은 전우들과 친구들을 잃었다.

그중에는 가장 믿고 의지하던 성배기사들도 있었고, 그들은 먼저 승천하며 자신에게 뒤를 맡겼지만, 몇몇 성배기사들은 그 승천을 보지도 못했다.

그중 한 명이 눈앞의 제레아.

레온은 역대 성배기사들이 승천할 때마다 사자심왕이 함께해주던 승천의식을, 자신은 누구에게도 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마음의 짐으로 여겼다.

자신은 성배기사들의 송별을 지켜주지 못했던 못난 왕이었다.

“제레아 경. 짐이 그대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레온은 천천히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200년 동안 악마들과 싸웠으며, 끝내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

지구에서 새로운 만신전을 세운 것과 그곳 또한 악마들의 침공을 받고 있는 것.

이곳의 게이트를 연 것… 무엇보다…….

“자네는 이미 승천했었네. 신들의 낙원에서 그대를 만났었지.”

제레아는 이미 죽어 진작 신들의 낙원으로 승천했다는 것까지.

“…….”

제레아는 그 많은 충격적인 소식들을 듣고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자신이 이미 죽었고, 세계가 멸망했으며, 지금의 자신은 그저 역사의 한순간을 재현할 뿐인 존재라는 것까지.

무엇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게 없었고, 부정해야 할 것 투성이었다. 허나, 이 노구의 기사는 그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어찌 자네가 죄송한가. 어서 일어나시게!”

레온이 다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지만, 제레아는 비통함을 삼키며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그 오랜 싸움을… 어찌 홀로 감내하셨나이까. 이 불충한 기사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제레아는 그저 자신이 왕과 최후까지 싸우지 못했음을 죄송해했다.

그렇게 죄를 고백하는 그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제레아는 제 미래를 듣고서 확신했다.

“제가 오크들의 손에 죽었다면… 오크 대족장의 출현은 사실상 확실하겠군요.”

“그렇겠지. 오크 신 중 한 명의 선택을 받은 챔피언이 이 전장에 있을 것이다.”

오크들은 온 대륙, 온 세상에 퍼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몇 개의 오크 부족들을 통합하는 대족장이 출현하기도 한다.

적게는 다섯 개, 많게는 열 개의 오크 부족들을 통합해 대족장의 지위를 손에 넣는 자.

강한 자가 곧 대장인 오크 사회에서 그만한 힘을 가진 오크는 오크 신의 총애를 받는 오크 챔피언뿐이다.

예로부터 오크 챔피언의 등장은 대전쟁을 의미했다.

레온도 오크 챔피언이 일으킨 대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고, 그 전쟁에서 【영장류 최다 오크 도살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기도 했다.

“폐하, 그럼 이곳에서 폐하께서 이루고시자 하는 바가 무엇이옵니까?”

“근본적으로는 하나다.”

게이트에 대한 실험.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를 통해 전리품을 얻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다.

“하지만 이 게이트에 들어오고서 하나 더 생겼다.”

“???”

레온은 듬직한 전우를 향해 드문 미소를 보였다.

“이번에는 친구의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구나.”

* * * *

우둔한 제레아의 일대기는 레온에게도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레온이 고작 스물일곱의 나이로 성배기사이자 워나이트로서 오크들과 전쟁을 준비할 때,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말을 타고 온 수행기사를 보았다.

“귀공의 이름을 말하라.”

“베르툼 남작가의 차남이자 리오나 석양 기사단에서 근속했던 제레아라고 합니다.”

노화가 느린 라이온하트인이라고 해도 슬슬 노화가 찾아오는 87세의 늙은 수행기사. 듣기로는 왕국기사로서 기사단에 근무했던 것이 벌써 오십 년 전의 일.

레온은 이 늙은 수행기사의 참전을 에둘러 거절하기 위해 따로 불러들였다.

“제레아 경. 이번 오크 정벌은 준동하는 오크 챔피언을 토벌하기 위한 전쟁이다. 그대가 출진하기에는 다소 위험할 수 있을 것이야.”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은 돌려보내겠다는 뜻이었다. 숱한 기사들이 이를 모욕으로 느낄 수 있었고, 또는 배려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레온은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전장에 그를 참전시킬 생각이 없었다.

지구에서의 지식과 경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에게, 팔십 대의 노구는 차마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으니.

성배기사 같은 초력의 생명체를 제외하고서 기사라 할지라도 결국은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탓이다.

“명예로운 빛과 정의의 성배기사시여, 가장 말단의 자리를 주십시오. 평민 기수들과 뒤섞든, 맨앳암즈 사이에서 파이크를 들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기사에게 크나큰 모욕이었다. 명예롭게 영광을 쟁취해야 할 중갑기사들이 경기병이나 일반 보병들 사이에 섞여 싸우겠다니?

영광을 쟁취할 기회조차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서 참전하려 하는가. 영광을 쟁취할 기회는 다른 방법으로도 있네.”

“명예와 영광만이 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의, 삶의 자세를 관철하는 것입니다.”

레온은 이 비루하고 우둔하다 조롱받는 기사가 품은 꼿꼿함을 깨달았다.

때로는 진흙탕에서 몬스터들과 뒹굴며, 때로는 여비를 벌기 위해 용병들과 부대끼며, 때로는 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천둥벼락이 떨어지는 산을 오르며──

“그대는 그저 매 순간에 충실할 뿐이로구나.”

레온은 이 남자가 죽는 그 순간까지 그러할 것이라 직감했다.

* * * *

새벽. 아직 해가 뜨지 않는 시각.

오크들의 생활은 정직하다.

아침에 일어나고, 점심에 밥을 먹고, 오후에 싸우고, 저녁에 밥을 먹고, 밤에 잠든다.

인간과 같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을 쪼개서 사용하거나 때로는 낮밤이 바뀌기도 하는 인간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무식하다’라 할 수 있었고.

단순하게 강하고 단순하게 살아간다. 그것이 오크라는 생물의 관념.

그렇기에 의외로 오크들의 약점은 명확하다. 그들은 밤의 습격에 취약했다.

-불이다!

-천막에 불이 붙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랴. 오크들은 진지 한구석에서 피어오른 불길에 화들짝 놀라 깨야했다.

“무슨 일이냐!”

이번 전쟁에 동원된 오크 부족장 중 한 명 몰칸은 호들갑을 떠는 오크를 붙잡아 물었다.

“식량창고에 불이 났다! 인간 놈들이 습격해온 거야!”

“경비는 짐승냄새 나는 것들이 했을 텐데?”

“나도 모른다!”

이곳에는 오크뿐 아니라 짐승신을 섬기는 야만족들도 있었다. 그들이 야간 경비를 서고 있었을 텐데…….

“멍청한 인간 놈들!”

하지만 그들로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으리라.

협곡을 앞에 두고 인간의 숫자는 불과 수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쪽은 수만.

아무리 낮에 수천 오크들이 도살됐어도 그들의 숫자는 차고 넘쳤다. 그런 그들에게 야습을 걸다니?

그것도 ‘단둘’이서 말이다.

“짐승 놈들의 타는 냄새가 참으로 구수하군.”

“그렇습니다, 폐하.”

타오르는 불길의 저편. 어둠을 틈타 두 기사가 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레온과 제레아. 두 성배기사가 오크들의 진지를 야습한 것.

초월적인 무력과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만능인 성배기사들이었기에 단 둘의 야습으로도 오크 진지에 크나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폐하, 이런 일은 제게 홀로 맡기셔도 되었습니다만.”

“그리 모든 영광을 차지하려 들지 마라, 친우여. 짐은 그저 저 짐승들의 단말마를 듣고 싶을 뿐이네.”

“폐하가 자리하셨기에 더 간편해지긴 했습니다만.”

“뭐, 스페로 여왕이나 스피너 경이 있었다면 더 편해졌을 거네.”

“스페로 여왕과… 스피너 경 말이십니까?”

레온이 다른 세계에서 맺은 연이었다. 당연히 그는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 신경 쓸 것 없네. 운이 좋다면 그 둘과 합류할 수도 있을 테니 그때 설명하지.”

“그거 기대되는군요.”

“하지만 오늘은 우리 둘뿐이다. 밤중에 오크 놈들을 제대로 쑤셔 놓아야 할 것이야.”

그 말에 제레아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오크들이 봤다면 ‘악마들’이라며 신성모독했을 미소였다.

“이곳에 성배기사가 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성배기사.

단신으로 군단을 초월하는 초력병기들.

제레아는 홀로라면 모를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성배기사가 합류한 것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 판단했다.

“결국 찰나의 환몽으로 끝날 순간. 폐하를 위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내 보겠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실패로 끝난 성물 호송단의 진상을 해명하기 위해, 제레아는 기꺼이 이 순간을 바치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이 순간이 역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당시의 라이온하트 왕국을 충실히 재현했다면.

‘그 남자가 온다.’

당대의 사자심왕과 필적하는 최강의 성배기사가.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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