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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1

91화 마운틴포지 터널 (1)

91화 마운틴포지 터널 (1)

“은빛 머리의 천사여! 다음에 만날 날을 고대하겠소!”

이튿날 아침, 왕성을 떠나는 우리에게 바보 왕자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다 다를까 알렉세이는 지난밤 루나에게 청혼했다. 당연히 루나는 거절했고, 알렉세이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되어 다시 청혼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나는 살림바르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 되겠소! 위대한 카스티안을 뛰어넘겠소!’

그 말은 아마도 현실이 될 것이다.

소설 속의 알렉세이는 살림바르 최강의 군주이자 소드마스터가 되어 루나를 조력하니까.

“다음에 봐 알렉세이!”

루나도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렉세이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내가 말해뒀기 때문이다.

허풍선이에 여자를 밝혀서 그렇지, 알렉세이는 정의롭고 의리가 있는 녀석이다.

“그대의 미소를 잊지 못할 것 같소! 아아! 아름다운 은빛 머리의 천사여!”

수도를 벗어난 우리는 사막을 달렸다.

루나는 보물고에서 가져온 검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자주 꺼내봤다.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본 나는 조금 심술이 났다. 어제 보물고에서 족제비를 다그치는 사이, 카인 녀석이 내가 고른 검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이 검이 마음에 들었다. 데미안.’

나는 카인에게 당장 이리 내라고 했다. 하지만 카인이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보물고에서 한바탕 싸우려는데 무스타파가 나타났다.

왕의 보물고에서, 그것도 왕이 보는 앞에서 싸울 수는 없었기에 나는 검을 되찾지 못했다. 물론 차선책으로 고른 검도 상당히 좋았지만 기분 나쁜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루나는 카인과 같은 모양의 검을 갖게 되어 더욱 기분 좋은 눈치였다. 속이 쓰리다. 저거 원래 내 건데.

“세실. 이거 봤니? 내 검하고 카인의 검이 똑같이 생겼다? 신기하지 않아?”

세실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인과 루나가 딱히 앞에 앉으려 하지 않았고, 화살통을 갖지 못하게 된 족제비는 어제부터 주둥이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루나.”

그렇게 답하며 세실이 허리춤의 단검을 내려다봤다. 어젯밤, 나무 위에서 내가 건네준 단검 세트.

단검이 마음에 드는지 세실은 애지중지 검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불현듯 세실이 나를 안았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었다. 세실이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 줄이야.

‘데미안. 난. 나는······.’

나를 올려다보며 속삭이던 세실의 얼굴. 그때의 나는 그저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세실은 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루나와는 다른 감촉이었다. 루나가 작고 귀여운 소녀 같다면 세실은 늘씬하게 키가 컸다. 게다가 나는 세실의 맨몸을 봤다. 평소의 세실에게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성숙한 모습.

헥. 헥. 헥.

주머니에서 기어 나온 먼지가 세실의 어깨에 올라갔다. 처음으로 먼지를 본 세실은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행복하게 웃으며 먼지를 안았다. 먼지도 빙글빙글 꼬리를 흔들며 세실의 뺨을 핥았다.

나는 조금 놀랐다. 디네베와 루나에 이어, 먼지가 세실에게도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경계심을 푼 것일까. 그렇다면 이전에는 세실을 경계했던 건가.

그럴지도. 세실은 이 세계의 악(惡)으로 설정된 ‘블레오파드’의 핏줄이니까.

‘데미안.’

‘응?’

‘강아지. 이름.’

‘아. 먼지야.’

‘먼지?’

‘응.’

‘귀여워. 먼지.’

천사처럼 웃던 세실의 얼굴이 지금의 세실과 겹쳐졌다. 돌연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 돌려 운전에 집중했다. 이 기분은 뭐지.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건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아이였다니. 그것도 루나와 버금갈 정도로 예쁜.

나는 거울에 비친 동료들을 봤다. 저들은 아직 세실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모른다. 당분간은 숨길 생각이다. 세실이 직접 밝힐 때까지.

“나도 화살통 갖고 싶었는데······.”

족제비가 중얼거렸다.

“족제비.”

“응?”

“화살통이 그렇게 갖고 싶어?”

“으, 응!”

“그럼 왕성으로 돌아가서 내 검하고 바꿔다 줄까?”

“저, 정말? 그래도 돼?”

“당연히 되지.”

나는 족제비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대신 바람속삭임은 압수다.”

이후 족제비는 화살통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세실이 돌아오니까 너무 좋다. 어젯밤에 데미안이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는 왜 저러나 했는데, 세실의 기척을 느낀 거였다니.”

루나의 말대로 나는 지난밤 세실의 위치를 포착했다.

사실은 먼지가 알려줬다.

물론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후에는 미니맵의 도움을 받았다.

“근데 데미안. 정말 어떻게 알았니? 세실이 밖에 있다는 걸.”

무어라 답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카인이 끼어들었다.

“데미안은 오를리안 영지전에 참여했을 때 별명이 있었다. ‘하늘눈의 금발’이라고.”

“오. 오오오.”

루나가 또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쨌든 좋다. 역시 우리 넷은 함께 있어야 해. 그치?”

“나, 나도 있는데······.”

“어허! 조조아킴!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끼어들려고!”

“하,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어허! 누님 말씀하시는데!”

“······.”

저럴 때의 루나는 정말 쿠훌린하고 똑같았다.

세실도 그것을 느꼈는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떠오를 무렵, 나는 나무 그늘에 기계차를 세웠다.

“엄청나. 정말로 엄청난 맛이야 이건.”

“데, 데미안. 전에도 말했지만 이거 잡화점에서 팔면 진짜 떼돈 벌 것 같은데.”

“족제비. 침.”

“과연. 두 번 먹어도 훌륭한 맛이군.”

복숭아 빙수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카인에게 검을 바꿀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카인은 싫다고 했다.

루나가 나를 샐쭉 흘겨보며 웃었다. 왜 웃는데.

***

“오! 데미안!”

브로닉이 나를 보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살림바르의 국경을 넘은 우리는 루네카 왕국 북쪽 끝단의 ‘마운틴포지 터널’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바퀴 하나가 망가져 여분의 바퀴로 갈아 끼우느라 조금 고생했다.

“바퀴도 스스로 갈아 끼운 건가? 자네는 정말 인간 드워프 같군! 누음앗핫핫핫하!”

이곳에 오기 전 우리는 필드포지 마을에 들렀었다.

브로닉을 만나 마운틴포지 터널에 관한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브로닉은 터널의 복구 작업차 현장으로 갔다고 말했고, 그래서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복구 작업은 끝나가나요?”

“끝나긴! 이제 시작일세!”

루나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배를 타기 싫은가보다.

우리는 브로닉의 양해를 구해 복구 현장을 둘러봤다. 십여 대의 기계차가 돌과 바위를 실어 나르는 것이 보였다.

“나머지 기계차는 마운틴포지 쪽에 있네. 자네 덕분에 마법석을 확보해서 큰 도움이 됐어!”

마운틴포지(Mountainforge)는 마운틴포지 드워프족이 살아가는 지하도시로, 세르펜타인 산맥의 동쪽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마운틴포지로 향하는 길은 루네카 왕국이 아닌 슬로바 왕국 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브로닉은 마운틴포지와의 연결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루네카 왕국과 살림바르 왕국을 통해 다량의 마법석을 확보했네. 빌어처먹을 놈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덤터기를 씌웠지만 뭐, 별수 있겠나!”

과연 기계차들은 모두 가동 중이었다.

문제는 터널을 틀어막은 바위들을 부술 특수 기계차가 부족하다는 것.

“루네카 왕국의 소드마스터라면 바위를 부술 수 있지 않아요?”

“물론 그자들에게 도움을 청해 봤지! 하지만 그 고고한 기사 나부랭이 놈들은 이런 곳에서 검을 쓰고 싶어 하지 않더군!”

알만했다.

루네카 왕국의 본래 이름은 ‘신성 루네카 왕국’.

즉, 이 나라의 소드마스터는 모두 성기사다.

언뜻 신을 섬기는 성기사라면 재난 현장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루네카 왕국의 교회는 부패했다. 물론 모든 성기사들이 부패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성기사들은 부패한 교리일지언정 따라야 한다.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하지만 상관없어! 토르그림을 포함한 우리 워해머들이 반대편 터널을 부수고 있을 테니까!”

인간에게 소드마스터가 있고 엘프에게 아처로드가 있다면, 드워프에게는 ‘워해머(Warhammer)’가 있다.

마운틴포지 드워프족의 족장인 토르그림 마운틴포지는 워해머다. 그뿐 아니라 마운틴포지에는 두 명의 워해머가 더 있다.

“반대편 복구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는 모르죠?”

“당연하지! 그 재수 없는 귀쟁이 놈들이 아니면 누구도 세르펜타인 산맥을 넘을 수 없으니까!”

난감한 상황이다.

터널 복구를 돕자니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렇다고 배를 타자니 루나가 불쌍하고.

사실 배를 탄다는 선택지도 그리 녹록지 않다. 우리는 이미 배편을 알아봤었는데, 세르펜타인 해협으로 가는 배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를리안과 티롤은 전쟁 중이니까. 그렇다고 항해 기술이 없는 우리가 무작정 배를 사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남은 방법은 제국을 통하는 것인데, 지금의 우리가 안전하게 제국을 지나는 것은 쉽지 않다. 제국에는 제국의 법칙이 있다. 우리가 가진 용병패도 제국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알렉세이의 도움을 받을 걸 그랬나.’

알렉세이라면 어떻게든 배를 마련해줬을 테지.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결국, 터널을 통하는 것.

나는 브로닉에게 터널 복구 작업을 돕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브로닉은 흔쾌히 수락했다. 드워프는 한 번 믿음을 준 대상은 의심하지 않는다. 배신이라도 하지 않는 한.

“카인.”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브로닉과 함께 터널로 다가갔다. 브로닉이 기계차를 모는 드워프들에게 무어라 소리쳤고, 그러자 기계차들이 터널 밖으로 물러났다.

작업에 동원될 이는 나와 카인이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동료들에게 밖에 있으라고 했는데, 루나와 세실은 그럴 수 없다며 한사코 따라 들어왔다.

“그, 그럼 나만 밖에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족제비를 브로닉이 껄껄 웃으며 끌고 들어왔다.

“알지? 카인. 최대한 힘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너무 잘게 부수지 말고.”

“걱정 마라. 데미안.”

무너진 바위들로 가로막힌 통로를 향해 카인이 다가갔다.

그의 손이 바위를 짚었다.

콰짓!

폭발하듯 바위의 파편이 튀었다.

카인이 손으로 짚었던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브로닉이 놀라 소리쳤다.

“뭐야!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카인이 몇 번 더 힘을 발현했다. 그러자 더욱 크고 기다란 구멍이 뚫렸고, 통로를 막고 있던 바위들의 틈새가 벌어졌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해 바위의 틈새로 가지들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벽 안의 상황을 세심히 살폈다. 좋아. 이 정도면 될 듯하다.

주변을 확인한 나는 마치 거대한 공을 투척하듯 입구 쪽으로 팔을 휘둘렀다.

쿠쿠쿠쿵······!

세계수의 가지에 휘감긴 바위들이 터널 바깥으로 던져졌다.

브로닉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대, 대체 뭐야! 이 괴물 같은 녀석들은!”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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