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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3

93화 여우

93화 여우

긴 녹색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 솟은 귀.

등 뒤에 매달린 유려한 활.

야니카였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렇다 시니야오코네. 어머니 나무께서 예지하셨다.”

세계수 아리아나스의 예지라면 그냥 듣고 넘길 일은 아니다.

“자세히 말해 봐.”

그때, 야니카의 뒤에서 자그만 소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시니야오코네.”

님피엘이 생긋 웃었다.

여전히 님피엘의 눈웃음에는 묘하게 성숙한 느낌이 있었다.

‘시니야오코네.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내 볼에 입 맞추던 님피엘의 돌발 행동이 떠오른 나는 조금 얼굴이 뜨거워졌다.

“우리와 함께 바람숲으로 가요 시니야오코네.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님피엘의 공용어는 이전보다 자연스러웠다.

“위험이 언제 사라지는데?”

“그것은 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간다면 어머니 나무가 길을 알려줄지 몰라요.”

나는 동료들을 돌아봤다.

야니카와 님피엘이 거짓말할 리는 없다. 분명 어떤 형태로든 위험이 찾아올 가능성이 크겠지.

하지만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그건 그렇고 루나와 세실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은데.

“어떤 위험인지 말해줄 수 있어?”

“죄송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알 수 없어요.”

카인이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그저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제 말은 사실이에요 시니야스트레. 어머니 나무께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당신도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를 들었나? 야니카 제피르나.”

야니카가 고개를 저었다.

“바람숲의 아리아나스카야는 님피엘 뿐이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거짓말을 해도 알 수 없겠군.”

야니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리아나스카야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라. 시니야스트레.”

야니카가 등 뒤의 활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카인의 눈동자에서 푸른 예기가 뿜어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카인의 팔을 붙잡았다.

님피엘도 야니카의 팔을 잡았다.

“그만두세요 야니카. 저분들이 어머니 나무를 구해주신 은인이라는 것을 잊은 건가요?”

그 말에 야니카의 눈에서 살기가 지워졌다.

“용서를 구합니다. 아리아나스카야.”

야니카가 활에서 손을 떼었다. 카인의 눈동자도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미친놈아. 지금 우리 다 죽을뻔했다고.

정말로 싸울 셈은 아니었겠지, 생각하던 나는 흠칫 소름이 돋았다. 어차피 카인에게는 회귀의 권능이 있다. 이곳에서 죽어도 회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녀석 설마 진짜로 싸우려 했던 건가?

“부탁드려요. 시니야스트레.”

님피엘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까지 내게 부탁하던 님피엘이었지만, 지금은 카인을 보고 있었다. 내가 지녔던 주도권이 한순간에 카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카인이 지닌 압도적 카리스마였다. 소설에서는 자주 등장하지만, 나와 있을 때는 좀체 드러내지 않아 잊고 있던.

루나, 세실, 족제비도 꿀꺽 침을 삼키며 카인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거지? 데미안.”

카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사뭇 신기한 감정을 느꼈다.

소설에서는 늘 리더의 역할을 도맡는 녀석이 왜 나와 함께할 때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걸까.

헥. 헥. 헥.

주머니 속 먼지가 내게 의지를 전했다.

먼지와 마음의 대화를 나눈 내가 말했다.

“따라가 보자.”

.

.

.

우리는 야니카와 님피엘을 따라 세르펜타인 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말은 가까운 마을에 맡겼다. 스트라이더처럼 똑똑한 녀석이 있으면 이럴 때 편할 텐데.

“데미안.”

루나가 다가와 속삭였다.

루나는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우리 꼭 가야 하는 거야? 바람숲에.”

“님피엘에게는 미래를 보는 눈이 있어. 그래서 지난번에도 야니카가 우리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던 거잖아. 게다가 저들은 우리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산맥을 내려왔어. 흘려들을 수는 없어.”

“그치만······.”

“네가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해.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그들을 염려하고 있으니까.”

“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루나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알아.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우리는 가족이잖아.”

루나가 어깨를 흠칫했다.

“······정말로? 여전히 우리는 가족인 거야?”

“응. 당연하지.”

나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빠르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안전이야. 만약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가족을 살릴 수 없게 돼. 설령 위험을 뚫고 도착한다 해도 우리가 크게 다친 상태라면 그들은 슬퍼할 거야. 죄책감마저 느끼겠지. 너는 가족이 평생 그런 감정을 마음에 안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지?”

“······응.”

“너무 걱정하지 마 루나. 아리아나스를 만나 위험에 대해 알아보고, 최대한 빠르게 내려가자.”

루나가 입술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생각에 잠기기 좋은 시간이었다.

루나는 산맥의 풍경을 감상하며 카인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눴고, 족제비는 야니카와 님피엘에게 레소빅의 소식을 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세실이야 뭐, 워낙 말이 없고.

내가 바람숲에 들르기로 결심한 이유는 먼지 때문이었다. 먼지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마운틴포지 터널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까.

‘먼지야. 너도 무슨 위험인지는 모르는 거야?’

주머니 속의 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나스를 만나면 알 수 있는 거야?’

묘하게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니 그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조금 답답하다.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분위기도 환기할 겸 나는 동료들의 스테이터스를 살펴봤다.

세실은 49레벨.

루나는 48레벨.

족제비는 40레벨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대상이 통찰에 저항했습니다.]

내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저항했다고?’

저항 메시지 너머로, 나를 돌아보는 카인의 얼굴이 보였다.

싱긋 웃은 카인이 다시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믿기 어려웠다. 녀석이 통찰에 저항 가능한 경지에 도달했다니.

레벨이 급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소서러의 힘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어쩐지 소서러의 능력이 일취월장하는 것 같더라니.

————————

◎ 데미안 라플라스 [15세], [Lv.46]

◎ 속성: 없음

◎ 특성: [비상한 적응력], [회복력], [불굴의 정신], [리메이커], [아스트레아의 천칭], [관찰력], [검의 재능]

◎ 적성: [자연 감응 Lv.2], [도끼술 Lv.3], [하센베르크 격투술 Lv.3], [창술 Lv.3], [단검술 Lv.3], [투척술 Lv.4], [승마술 Lv.5], [검술 Lv.5]

◎ 일반 스킬: [고통 감내 Lv.3], [전력질주 Lv.3], [밀어내기 Lv.3]

◎ 전용 스킬: [미니맵 Lv.6], [동기화 Lv.2], [통찰 Lv.3], [아공간 Lv.5]

◎ 특수 스킬: [리메이크(봉인)]

————————

내 스테이터스 창을 띄워봤다.

사실 그동안 나는 어떤 본능적인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의 기울기가 리메이크 스킬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다행히 아직 다른 능력의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속성은 언제쯤 발현하려나.’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족제비마저 바람 속성을 개화한 마당에 나만 무속성이라니.

문득 그날의 메시지가 머리를 스쳤다.

[새로운 스킬 해금을 위한 조건이 충족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카인과 함께 달빛나무 언덕에 다녀온 뒤 떠올랐던 메시지. 그날 나는 달빛나무 위에서 카인의 과거를 보고, 시선을 공유하고,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저 ‘새로운 스킬’이 그때 겪은 신비한 경험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저 새로운 스킬은 여전히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스트레아의 천칭의 영향으로 조건 충족을 멈춘 상태인 걸까.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나는 동료들의 스테이터스를 다시 살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특수 스킬이 없어.’

세실, 루나, 족제비 모두 ‘일반 스킬’과 ‘전용 스킬’만 있을 뿐 특수 스킬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통찰했던 모든 인물의 스테이터스에서 특수 스킬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무한회귀의 주인공인 카인에게서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수 스킬은 다른 스킬과는 완전히 다른 구동 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RP 시스템.’

나의 다른 스킬들과 달리 리메이크 스킬은 RP를 소모해 능력을 발현한다. 그래서 ‘특수 스킬’로 분류됐을 것이다.

다른 등장인물에게서 특수 스킬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RP를 운용할 수 있는 이는 이 세계에서 오직 나뿐일 테니까.

‘나는 무한회귀의 독자이자, 지구에서 온 이방인이니까.’

그렇다면 아스트레아의 천칭을 오른쪽 끝으로 기울여 이 세계를 현실로 인지하는 지금의 내 정체성은 무엇일까.

독자일까.

아니면 등장인물일까.

‘······.’

결론이 무엇이든, 지금의 나는 RP를 획득할 수 없는 상태다. 그뿐 아니라 지녔던 RP를 모두 소모한 뒤 리메이크 스킬마저 봉인됐다.

자연스레 하나의 가설이 떠오른다. 저 ‘새로운 스킬’은 특수 스킬이 아닐까.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 스킬이 어떤 능력을 지녔을지 예측했고, 그 예측이 맞는다면 분명 이 세계의 다른 등장인물은 지니지 못한 힘일 테니까.

그렇다면 스킬이 아직 해금되지 않는 상황도 납득할 수 있다. 봉인된 상태겠지. 리메이크 스킬처럼.

천칭을 왼쪽으로 기울여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

“레소빅!”

족장의 처소에 들어가자마자 족제비가 레소빅에게 달려갔다.

레소빅은 환히 웃으며 족제비를 품에 안았고, 우리를 돌아봤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 보인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니야오코네.”

족제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녀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뻔했다.

나는 지난번처럼 레소빅의 몸 안에 세계수의 혼돈을 불어넣었다.

이번에도 어두운 혼돈을 모두 몰아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어두운 혼돈의 일부는 전보다 더욱 단단히 그녀의 몸에 각인돼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시니야오코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레소빅은 자신의 몸 상태를 짐작할 것이다.

그녀의 생명력은 소진되고 있다.

나는 진행 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을 뿐이다.

“아리아나스를 보고 올게. 족제비, 너는 여기에 있어도 돼.”

“으, 응.”

“온 김에 활쏘기 점검도 좀 받고.”

“응. 알았어!”

레소빅의 처소를 나온 우리는 야니카와 님피엘을 따라 걸었다. 거주지를 벗어나기 전, 뒤를 돌아보니 족제비가 레소빅에게 궁술을 배우고 있었다.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

거주지를 벗어나 숲의 깊은 곳으로 진입하자 흙과 나무의 향이 나의 감각을 일깨웠다. 확실히 좋은 공기다. 지구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앞서 걷던 님피엘이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나와 시선이 맞닿자 싱그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바람처럼 다가온 세실이 내게 속삭였다.

“데미안. 조심해.”

“뭘?”

“님피엘. 여우.”

뭐?

“나. 데미안. 지켜.”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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