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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3

연(1)

오싹!

나는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신의 기(氣)가 딱딱하게 굳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힘을 잃었다.

[보자, 보자, 보자… 맑고 투명한 놈이로다. 그리고 그 맑은 심상이 바깥으로 삐져나왔어. 그걸 휘둘러서 결단경 요족을 족친 건가.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정신금제?]

괴군.

미치광이 노인이, 내 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너무 신기하군. 어떻게 이런 족속이 있는 거지? 네놈 뭐냐. 인간이 맞느냐? 아니면 인간 형상의 특수한 요족이냐?

의식의 특이함으로 결단경 요족을 사냥하긴 했는데, 정작 본인은 결단경은 아니야. 아무 법력도 없는 범인에 불과한데… 또 의식은 축기 후기급이고.]

그는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나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제길, 왜 이 자가 벌써 나타난 거지?’

나는 원인을 고민해보았다.

‘생각해보면 천인기 수도자들 셋과,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 해룡왕 등은 전부 다른 방향에서 온 반면. 괴군은 늘 승천문 방향에서 날아왔지.’

어쩌면, 괴군은 다른 어떤 천인기 수도자들보다도 빨리 승천문에 도착해 있다가, 나중에 김 주임이 의식을 각성하고서야 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회귀 초반에는 등선향에 아예 이 자가 붙어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아마 여우와 내 싸움의 여파를 느끼고 우리를 구경하다가, 특이한 의식형태를 지닌 나를 관찰하다가 온 듯 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음?’

문득, 괴군의 의념을 읽던 중, 나는 그의 심상을 엿볼 수 있었다.

‘크윽…’

나는 그의 심상에서 느껴지는 어둠에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심상은 다 썩어버린 고목(枯木)이었다.

시커멓게 썩은 고목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었다.

고목에서는 오직 실같은 연분홍빛의 생기만이 남아 겨우겨우 고목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고목은 수시로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목이 무너져 내리려 할 때마다 괴군의 눈빛에 서린 광증이 도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목에서 느껴지는 어둠과 음습함, 그리고 그 고통은 나조차도 눈쌀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혈목자 원립보다 역겨움은 덜했지만, 암담한 어둠만은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 썩어버린 마음이군.’

괴군의 심상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나는 괴군의 시선을 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내가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자, 문득 괴군 역시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뭣… 네놈.]

그의 눈빛에 당황이 어렸다.

내 몸을 붙잡던 그의 기운이 풀려나갔고,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 제 심상을 읽지 않았습니까?”

[네놈, 내 심상을 읽은 거냐?]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던 와중.

갑자기 괴군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이 놈… 보이는구나. 무슨 짓을 해서 도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심상을 읽을 수 있군. 그렇지?]

‘무슨…’

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괴군이 월도입천에 도달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괴군의 행동거지를 몇 번이고 관찰했었다.

그에게선 무공을 익힌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월도입천에 도달할 때까지, 수백 년을 무공을 익혀왔다.

절대로 짧은 시간 동안 무를 연마하지 않았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괴군은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무인도 아니었고, 무를 연마하지도 않았다.

[크흐흐흐, 놀랍군. 정말 놀라워. 나와 같은 시야를 각성한 놈이 이 세계에 또 있다니. 최소한 상계로 올라가야 있을 줄 알았는데… 아주 기분이 좋구나!]

콰악!

그가 갑작스레 내 머리통을 잡았다.

무공수법이 아니라, 그냥 천인기 특유의 천지원기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내 몸을 조종해서 한 짓이었다.

그리고, 괴군의 의식이 내 의식을 침투했다.

‘이런 젠장…!’

[너무 마음에 드는군. 너도 내 세계에 받아들여, 더욱 더 우월한 존재로 진화시켜 주마. 너를 연구하면 그녀와의 재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오싹!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이 자는 지금, 나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개조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인기 수도자의, 광증이 서린 의식이 내 의식으로 침투한다.

전신의 통제권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파아아앗!

상단전 안쪽.

혼백 깊숙한 곳에서, 핏빛이 일더니, 오행혈주번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오행의 변화를 담은 핏빛이, 괴군의 의식을 몰아낸다.

“끄으으으윽!”

아득한 고통이 내 정신을 휘감았지만, 고통과 함께 내 정신이 또렷하게 유지된다.

오행혈주번은 내 의식을 금제하는 동시에, 내 의식을 보호하였다.

[흐음?]

괴군이 눈쌀을 찌푸리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오호, 그 법술 어디서 본 법술인데… 어디서 봤었지..? 아, 그래. 사막의 그 결단기 뱀 같은 녀석이 쓰던 법술이었지?]

그는 내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답천사막의 결단기 녀석과는 무슨 관계냐.]

“그건..”

[아니, 아니다.]

괴군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내 머리통을 다시 잡더니 히죽히죽거렸다.

[내가 알아보면 되지. 우월한 존재로 진화하지도 못한 놈과 무슨 대화를 할꼬.]

콰드드득!

다시금 그의 의식이 내 뇌리를 침투했다.

동시에 오행혈주번이 일어나며 자극된다.

“…..!”

아득한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괴군이 무언가 법술을 발동했다.

파츳, 파츠츳…

허공에 새파란 주술문자가 새겨지더니, 갑자기 등선향 바깥.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저건, 저주문?’

음혼귀주문을 익혔었던 나는 저 주술문의 종류를 눈치챘다.

괴군은 내 오행혈주문을 자극시켜 나온 그 기운을 역추적해서, 그곳으로 저주문을 날린 것이었다.

[흐음, 그 결단기 애송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건가? 뿌리는 같지만 반응이 세지는 않군. 아, 그래. 그 결단기 애송이와 같은 사문이라거나 그런 놈이로구나.

크하하, 역시 이 몸은 천재야. 그렇지, 당신?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괴군은 혼자고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고, 소중한 연인을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었다.

뭔가 있나 했지만, 요족의 지각, 의념의 흐름, 영혼의 존재를 감지해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냥 괴군의 상상 속 인물인 듯 했다.

‘빌어먹을, 미치광이 늙은이에게 잡혔다.’

이대로 잡혀가야 하는 건가.

나는 광증이 도져서 허공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미치광이의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화두가 있었다.

“선배님, 후배가 올릴 말이 있습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결단기 애송이… 혈목자 원립이라는 놈은, 실은 정체를 숨긴 원영기입니다.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하기를 기다렸다가 이 세상을 삼킬 생각을 하고 있는 야심에 찬 녀석일진데, 그런 이를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아, 네놈 서휼 놈 주최로 맺은 조약을 말하는 거냐.]

괴군은 정신을 차렸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어쩌라는 거냐. 그 놈 심상이 더럽긴 해도, 서휼 놈이나 다른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선배님께서 비승하시고, 선배님의 친지나 가문이 그 혈목자 놈에게 유린당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 가문?]

킥킥…

괴군이 히죽 웃더니 말했다.

[그거, 수백년쯤 전에 내 손으로 다 몰살시켰다만. 내가 왜 걱정해야 하느냐?]

‘뭣…’

나는 당황에서 할 말을 잃었다.

가문을 얘기하는 괴군의 눈은, 어쩐지 분노에 차 있었다.

분노에 찬 그의 눈빛은 오히려 광증이 가시고 또렷해 보였다.

[내게 의미있는 존재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를 죽인 가문은 이 대지에 남아있지 않느니라. 그런데 내가 뭘 하러 그런 것을 걱정하느냐.]

나는 괴군의 심상을 보았다.

그의 심상에 남은 어둠이 더욱 더 짙어지며, 살아있는 듯 끓어올랐다.

[그래도 고맙군. 오랜만에 그 씹어먹을 것들을 떠올리게 해 주어서.]

툭, 툭…

그는 자신의 머리를 몇 번 톡톡 두들겼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차서 오히려 광증이 가셔 있었다.

[그나저나, 그 결단기 놈과 네가 같은 법술을 가지고 있단 건… 그 녀석도 뭔가 뜯어보면 너와 비슷한 게 있다는 말인가?]

괴군은 턱을 쓰다듬더니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파츠츳!

허공에 푸른 불빛이 일더니, 그가 방금 쏘아올렸던 저주문이 떠올랐다.

동시에.

파아아앗!

저주문이 빛났다.

[그래, 일단 그 놈도 혼백을 뽑아와서 연구 좀 해 봐야겠어. 생각해보면 그 녀석 결단기 주제에 의식의 크기가 상당히 크기는 했지…]

우드득…

그가 허공을 틀어쥐었다.

푸른 저주문이, 피에 물들듯 점차 붉게 변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음?]

괴군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릉, 우르릉…

허공에 먹장구름이 끼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괴군의 시선이 오혜서 대리에게 향했다.

[이건 또 뭐야. 호풍환우는 해룡왕의 권능인데… 왜 저 녀석이 발하는 거지?그리고…]

번쩍!

쿠르릉!

한 줄기 푸른 벼락이 울렸고, 어느새 장내에는 푸른 장포를 입고, 선한 미소를 띈 점잖은 기색의 미청년이 들어와 있었다.

[이게 누구야. 사갈(蛇蝎)왕 서휼이 아닌가? 흐하하, 늦게 출발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허겁지겁 미친 듯이 달려온 거지?]

“하하, 괴 노야. 늦게 출발하려던 이유는 저희 일족 중 하계에 남는 아이가 있어, 그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서였습니다만.

대화를 나눠보니 충분히 자기 앞길을 헤쳐나갈 아이라 생각되어…”

[시끄럽고, 본론을 말 해라.]

콰드득!

괴군이 허공을 더욱 거세게 틀어쥐었다.

그가 띄워올린 저주문이 더욱 더 시뻘겋게 물들었다.

서휼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괴 노야. 새파란 후배들을 겁박하지 마시지요. 지금 틀어쥔 후배의 목을 그만 놓아주시고, 지금 괴롭히는 이들도 조금 풀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 그렇군. 네놈이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이유가, 사막의 애송이 놈이 죽으려 하니 달려온 것이로구나. 너, 뭘 꾸미는 게야? 이 사갈 같은 놈.]

“괴 노야. 선배된 입장으로서 약자를 그리 괴롭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 하시고 이제 그 자를 놓아주시지요.”

우웅!

서휼 역시 손을 뻗어 허공을 틀어쥐었고, 시뻘겋게 변모했던 저주문이 점차 다시 푸른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원립은 지금, 난데없이 천인기 수도자들의 손아귀에 잡혀 목을 졸리는 중인 건가.’

아무리 등선향이 답천사막 위에 있다고는 해도, 등선향과 원립이 있을 흑색의 성은 수백 리는 되는 거리인데, 그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서 그를 가지고 둘이 싸우는 것이었다.

‘이게 천인기 수도자…’

“이미 난데없이 재액을 맞아 내상도 입었을 터인데, 그만 하시는 게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우우웅..

괴군이 내보인 저주문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명백히 괴군이 서휼에게 밀리는 모습이었다.

괴군은 히죽 웃더니 허리춤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냈다.

쿠웅!

나무상자는 커다랗게 변하다니, 괴군의 옆으로 떨어졌다.

[이 놈이, 내 본신의 힘이 네놈보다 떨어진다고 나를 무시하는구나. 좋아, 한번 해 보려느냐?]

“……”

서휼의 안색이 살짝 굳었으나, 이내 돌아왔다.

“괴 노야.. 우리 그런 재미없는 얘기는 비승을 한 후에 하는 게 어떤지요? 승천문이 며칠 후면 열릴텐데, 이런 상서로운 시기에 어찌 그런 짓을 하려 하십니까.

그런 상서롭지 못할 일 보다는, 여기 재능있는 이들에 대해서 조금 얘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서휼이 인자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는 오혜서 대리를,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우욱-

먹은 게 없는 탓인지, 뭐가 올라오진 않아서 참을 순 있었지만.

그래도 역겹다.

아니, 역겨운 것 뿐이 아닌, 그 어둠조차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미친, 이게… 정상적인 존재가 가지는 심상인 건가?’

괴군의 심상도 시커먼 어둠 속에 쌓여있는 고목이었으나.

월도입천에 이른 후 보게 된 서휼의 심상은 그것보다 더했다.

괴군의 고목에, 마치 실 같은 생기가 있었다면, 서휼의 심상에는 그런 희망적인 것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칙칙하며, 역겹고 더럽다.

인면수심, 철면피 같은 것을 넘어, 그냥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심상.

악(惡)

그는 끝없는 악의(惡意) 그 자체였다.

원립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

그것이, 서휼이었다.

“저런, 괴 노야. 보십시오. 후배들이 천인기 수도자들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 하잖습니까…”

서휼은 딱한 눈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괴군에게 말했다.

그러나, 괴군은 오히려 내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알았는지 클클거리며 웃었다.

[흐흐, 이거 걸작이군. 저 놈이 비틀거리는 게 우리 기세 때문이라고? 어쩌면 너무 역겨운 걸 봐서 속이 메스꺼운 걸지도 모르지. 나도 네 얼굴을 볼때마다 토가 마려운데 네가 말하는 연약한 후배들은 어떻겠느냐. 이 마음이 망가져 버린 괴물아.]

“늘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여하튼, 이 후배가 괴 노야의 마음에 드는 듯 하니 괴 노야의 제자로 삼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저 처자가 제 혈맥에 공명하며 특이한 권능을 부리기에 해룡족원으로 맞이하려 합니다만.”

[이 사갈 같은 놈이. 자꾸 말을 돌리는구나. 사막의 애송이 놈으로 또 뭘 꾸미는 거냐 물었다, 오물같은 놈…!]

끼이이익…

괴군이 상자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주변에 천인기 수도자들도 없고, 해룡왕과 단신으로 맞서는 탓인지, 그는 뚜껑을 드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괴군, 당신 정말 등선향을 무너뜨릴 요량이오…!?”

[등선향 하나 사라지고 오물을 치울 수 있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지. 정 승천문에 문제가 생기면 봉명인의 축복도 있는데 뭐가 문제겠느냐…?]

끼이익, 철컥!

그리고, 괴군의 상자가 완전히 열렸다.

다음 순간.

괴군의 상자에서 뭔가, ‘많은 것들’이 튀어나왔고.

해룡왕이 다급한 기색으로 요술을 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어?’

꿀렁, 꿀렁…

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주변을 마구 둘러보았다.

물.

물이었다.

등선향 전체가, 갑자기 물에 뒤덮혀 있었다.

나도, 다른 동료들도, 갑자기 등선향을 뒤덮은 물살에 눈을 뜨고 꼬르륵 대며 허우적 대고 있었다.

쿠우우우!

거기에, 물은 그냥 존재만 하지 않았다.

물 속에서도 수류가 존재하여, 나와 동료들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괴군이 상자를 열었고, 서휼이 뭔가를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이렇게 되었다.

내가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할 때였다.

[흐하하하하하!]

천지영기가 울리며, 괴군의 음성이 물 속 곳곳까지 퍼져나간다.

[물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의 수계법술이라니. 과연 해룡왕이로구나. 등선향이 무너지는 걸 보호하려 함이냐.

아직 천인기 급 괴뢰도 절반밖에 안 꺼냈고, [그녀]는 심지어 팔밖에 안 꺼냈는데, 과연 해룡족 전원이 덤벼도 나와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 성 싶으냐?]

쿠구구구구!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천지영기가 저절로 들끓으며, 괴군과 서휼의 힘에 반응한다.

‘지금, 등선향 전체가 서휼의 요술에 뒤덮힌 건가?’

천공도라고는 하지만, 등선향은 절대로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연국의 성 몇 개를 합친 것과 같은 거대한 영토였다.

나는 서휼이 꺼내든 요술의 규모에 기함하면서도, 어째선지 지금 서휼이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그녀]가 어깨까지 나왔다. 천인기 해룡족을 다 데려와야 하지 않겠느냐?]

저 하늘 너머.

어딘지 보이지도 않을 그곳에서, 서휼과 괴군이 일전을 벌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서휼의 법술에 의해 등선향이 물에 뒤덮혀 사방이 어지러웠다.

‘일단 동료들을 찾아야 해.’

나는 물 속에서 무형검을 뻗어 중심을 잡고는, 동료들을 탐색했다.

‘김영훈, 저기 있고. 전명훈도 찾았다.’

나는 차례대로 강민희, 오현석, 김연, 오혜서까지 전부 찾아냈다.

그 중 오혜서 대리는 해룡왕의 권능에 뭔가 영향을 받는 것인지, 칠규에서 피눈물을 좔좔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제길, 이게 무슨 꼴인지.’

나는 물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동료들을 끌어모아, 혈을 눌러 일단 물 속에서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하고, 내공으로 폐에 찬 물을 억지로 빼냈다.

‘버텨야 한다.’

저 괴물같은 작자들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우릉, 우르릉…

물에 뒤덮힌 등선향.

저 먹장구름이 덮힌 하늘 위의 어딘가.

그곳에, 괴군과 서휼 말고도, 뭔가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더 여럿 모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기척은…’

천인기 수도자들이, 등선향의 이변을 감지하고 저 위쪽에 더욱 더 많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촤아아아아!

등선향 전체를 뒤덮은 물이 싹 빠지고, 먹구름이 증발되어 버렸다.

파직, 파지지지직!

먹장구름의 중심에서는 금색 장포를 입은 금벽호가, 금빛의 번개를 뿌리며 마치 태양처럼 먹구름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얼마 후, 익숙한 얼굴들이 하늘 너머로 보였다.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은 괴군을 중심으로.

해룡왕 서휼, 금신천뢰문 태상문주 금벽호, 흑색귀골곡 백골귀마 허곽, 창천개벽문 창호자 청문선우.

그리고 전체적으로 퉁퉁한 배불뚝이 백의여인, 바싹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갈의 중년인.

사자의 갈기처럼 수염을 기른 험상궂게 생긴 녹의 거한, 해골처럼 마르고, 손톱을 잔뜩 기른 흑의 여인 등이 괴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천뢰문, 귀골곡, 개벽문, 해룡족, 거호족, 성붕족, 정도선파 연합, 마도선파 연합의 장들이 이 늙은이 하나 둘러싸고 있다니. 영광이구만 그래.]

괴군은 히죽히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하나씩 입을 열었다.

[선을 넘지 마시오, 괴군! 등선향이 무너지면 승천문이 어찌될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리 교만하단 말이오!]

[도대체 왜 그리 천방지축이오! 해룡왕이 아니었으면 등선향이 무너지고 승천문이 무너져,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의 꿈이 좌절될 뻔 했단 걸 모르는 거요!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거요!]

[이 미친 늙은이, 상서로운 시기라 그냥 놔두려 했다만, 등선향에서 ‘그걸’ 꺼내들어? 우리가 다 모이면 네놈이라고 무사할 것 같나?]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의 중심에서도, 괴군은 히죽거리며 상자에 다시 손을 얹을 뿐이었다.

그러자, 하늘에 모인 모든 천인기 수도자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거렸다.

[물론 이 정도 세력들이 전부 연합한다면 못 이기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언제라도 자폭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네놈들은 이 정도 각오가 있느냐?]

[이익, 헛것이나 보는 정신나간 늙은이가…!]

얼마간 괴군과 천인기 수도자 무리는 대치를 이어갔고, 그러던 중 해룡왕이 웃는 얼굴로 중재를 시작했다.

[모두들 이러시지 마시지요, 이런 상서로운 시기에 이래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괴 노야께서도 당신의 연인을 위해서라면 상계로 비승하는 게 이득이 맞지 않습니까?]

해룡왕은 천인기 수도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들을 중재했고, 얼마 후 그들은 서로 합의를 하고 괴군과 어떠한 불가침조약을 맺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금벽호가 문득 이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문득 전명훈과 눈이 마주쳤다.

[뭣, 잠깐… 이건…]

그리고 금벽호를 비롯해서 백골귀마, 창호자 역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고, 이전과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서휼과 괴군 외에도 정도선파 연합의 수장,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 거호족, 성붕족의 수장으로 보이는 천인기 수도자들도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동료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탐을 내는 모습이었다.

[허허, 정말 금신천뢰문 개파설화에 나오는 천상금뢰지체란 말인가? 금신자 양수진이 지녔다는? 우리도 조금 탐이 나는데…]

[귀도음화선근이라니, 꼭 흑색귀골곡에 들어가는 것보다, 내 제자로 들어와도 잘 가르쳐줄 수 있는데…]

정도,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들이 각각 전명훈과 강민희를 보며 입맛을 다셨고, 성붕족과 거호족의 수장들 역시 오현석 차장에게 군침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인족이 일문성체를 타고나? 허 참…]

[거호족의 진원진혈을 주어 거호족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나, 금벽호가 으르렁거리며 전명훈을 잡고 말했다.

[오합지졸들 모임의 대장이랍시고 꺼드럭거리는 놈들이… 감히 본문의 예비 제자를 빼앗아 가겠다고..? 심지어 개파시조님과 같은 체질이란 걸 알면서도? 이 놈들이 정녕 본문과 척을 지고 싶단 건가?]

[험, 금 태상장문인. 그런 것이 아니라…]

[당장 꺼져라. 얌전히 승천문 앞에서 승천문이 열리기 전까지 대기나 하고 있으시지.]

백골귀마 역시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강민희 대리를 노리는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을 보았다.

[이 아이는 본곡에서 데리고 가기로 했소만.]

[아니, 하지만 꼭 재능있는 자를 흑색귀골곡에서만 데려가라는 법이…]

[섭명함 맛 좀 보고싶소?]

[이익… 개 같은 귀골곡 놈들. 됐소, 알아서 하시오!]

정도,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은 금벽호와 백골귀마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거호왕과 성붕왕은 오 차장에게 눈독을 들였으나, 창호자가 헛기침을 하자 둘은 창호자의 눈을 피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청문 수사를 화나게 할 수는 없지.]

[암, 창호자 대협이라면 잘 키워줄 걸세.]

그러나 성붕왕과 거호왕은 다시 오혜서 대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칠규에서 피를 흘리며, 호풍환우뿐이 아닌 뭔가 다른 현상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성붕왕과 거호왕의 눈빛에 탐욕이 깃든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여인은 선수(仙獸) 혈통의 권능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는 것 같은데…]

[우리 요족들에겐 어쩌면 굉장한 자질인 듯 싶소만…]

둘은 오혜서 대리에게 다가갔고, 그런 그 둘을 서휼이 은근슬쩍 막아서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서휼이 무어라 입을 달싹이자, 둘은 잠시 서휼의 말을 듣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서 용왕이 그러하다면야…]

[아무래도 서 용왕의 성품이라면 훨씬 더 기품있게 저 여인이 가진 선수의 자질을 끌어낼 수 있겠지요.]

결국,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다시 흘러갔다.

모든 동료가 각자에게 해당된 천인기 수도자들에게로 딸려갔고.

이번에 비승을 하는 천인기 수도자들의 대표 중 약한 이들은 그저 손가락만 빨며 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 나눠먹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인원들이 배분되자, 남은 이들의 시선이 나와 김영훈, 김연 주임에게 향하였다.

[그나저나 저기 남은 녀석들은 혹시 뭐 다른 자질이 없으려나…]

[일단 저 인족 놈은 뱃속에 인족 주제에 요핵을 품었는데…]

[반요인가? 일단 하나하나 다 뜯어보지요. 뭔가 엄청난 재능이 발견될지도 모르니…]

이윽고 천인기 수도자들은 우리에게 손을 뻗었고, 나를 비롯해서 김영훈, 김연은 천지영력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마구 비명을 질렀다.

그 중 김연 주임은 그 와중 의식을 각성해서 정도선파 수장이라는 퉁퉁한 백의여인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나와 김영훈은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에 의해 마구 쥐어짜이고, 의식을 압박당하는 둥 온갖 궂은 일들을 당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

나는 그냥 조금 특이한 체질일 뿐 아무 자질도 없다는 판정이 나왔고, 김영훈은 특이한 체질도 뭣도 없는 일반인이라는 판정이 났다.

창호자가 우리를 치료해주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둘은 솔직히 별 기대할만한 자질은 없는 듯하니, 그냥 버리고 가야겠군요.]

[이 특이체질은 조금 연구해보고 싶긴 한데… 어떻게 인족 뱃속에 요핵이 든 건지…]

[됐소. 그래봤자 이 녀석은 상식범위 안의 특이체질이고, 굳이 데려갈 만큼의 신화적인 자질은 아니외다. 그냥 가는 게 낫겠지.]

천인기 수도자들은 두런두런 떠들며, 이내 다시 승천문으로 날아갈 채비를 하였다.

‘제길, 이번 생은 시작부터 모든 게 혼란스럽군.’

나는 머리를 살짝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잊으면 안 되는 게 있지…’

나는 답천사막에 숨어있는 혈목자 원립에 대해 말하려 했다.

“선배님들께 아룁니다. 혹여, 답천사막에 사는 혈목…”

툭-

그때였다.

해룡왕이 다가와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들겼다.

“본왕도 그 자를 알지. 인족임에도 불구하고 열의가 있고 재밌는 기술을 많이 알고 있더군. 본왕도 법술을 하나 배우기도 했고… 자네 역시 그 법술을 전수받은 듯 한데.”

오싹!

나는 문득, 전신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혈목자에 대해 말하면, 지금 해룡왕에게 살해당한다.

그의 눈빛에선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직감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불길함을 경고하고 있었다.

꿀꺽…

해룡왕은 선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들겨 주곤 일어섰다.

“자네 같은 반요 혈통이라면 어쨌든 본왕도 무시할 순 없지. 받게. 반요들이 익히기에 적합한 요수공법서이네. 그리고 공법서를 주는 대가로, 혹시 간단한 심부름을 하나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나?”

서휼은 호풍응룡변과 파공주를 내밀며 내게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묵묵히 그에게서 공법서와 법보, 심부름을 전달받았다.

모든 것이 운명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고, 동료들은 모두 예정된 이들에게 잡혀갔다.

김 주임은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백의 여인에게 잡혀갔지만, 괴군은 수시로 퉁퉁한 백의 여인과 김연 주임 쪽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고.

나는 어쩐지 정도선파 연합의 수장이란 저 여인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괴군은 나를 보면서도 살짝 입맛을 다셨지만, 그는 이번에는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포위되어 얌전히 승천문 방향으로 함께 날아갔다.

휘이이이-

한차례의 폭풍이 우리를 쓸고 지나갔다.

‘…그래도, 변한 게 있군.’

이번에는, 누구도 나와 김영훈을 공간균열을 열고 어딘가로 보내주지 않았다.

또한, 여우의 요단은 그대로 내 손에 들려있었다.

마도연합의 천인기 수도자가 내 요단을 뺏으려 하자, 창호자가 왜 후배 것을 갈취하냐며 눈치를 준 탓이었다.

나와 김영훈이 등선향에 버려지고, 내게 여우의 요핵이 남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운명대로 흘러갔다.

나는 뭐가 뭔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김영훈을 잠시 다시 재운 후, 손에 든 요핵을 바라보았다.

요핵 안쪽에는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결단경 요족이 모아온 영성과 천지영기이니만큼, 안의 영기를 흡수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영력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요핵을 손에 들고 요핵의 흡수를 시작했다.

* * *

등선향에서 반년이 지났다.

쿠릉, 우르릉…

나는 하늘에서 으르렁대며, 내 무형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흩어지는 먹장구름을 바라보았다.

천기가 변화하며, 내게 300년의 수명이 부여된다.

나는 결단경 중기 여우의 요단을 흡수해서, 축기기 극초기, 각수(角宿)의 경지를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回歸修仙傳, 회귀수선전
Score 9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On the way to a company workshop, we fell into a world of immortal cultivators while still in the car. Those with spiritual roots and unique abilities were all called to join cultivation sects, living prosperously. But I, having neither spiritual roots nor special abilities, lived as an ordinary mortal for 50 years, complying with fate until my death. That’s what I thought. Until I regr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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