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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4

94화 다가오는 위험 (1)

94화 다가오는 위험 (1)

저 멀리 아리아나스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놀라움을 느꼈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두 배는 커다래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 덕분이에요. 시니야오코네.”

님피엘이 나를 향해 웃었다.

이제 보니 님피엘도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성숙해졌다. 더 아름다워졌다.

“어머니 나무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으려는데 세실이 나와 님피엘 사이로 끼어들었다.

세실을 돌아본 님피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뷔 오카츠바예차 엘류드.”

그녀의 엘프어에서 나는 낯익은 단어를 포착했다.

엘류드.

엘프의 피가 섞인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세실에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다, 오나 엘류드. 아리아나스 므네 스카잘.”

님피엘이 내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의미를 이해하신 것 같네요. 시니야오코네.”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다. 다만 대략적인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세실이 ‘엘류드’이고, 아리아나스가 그것을 알려줬다는 뜻이겠지.

나는 조금 멍한 눈으로 세실을 봤다. 세실은 자신이 엘류드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소설에서는 언급된 적 없었는데.

“이제 가요. 시니야오코네.”

님피엘이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나를 이끌었다. ‘아!’ 하는 세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등 뒤를 울렸다.

아리아나스에게 다가가며, 나는 확실히 느꼈다. 덩치만 커진 것이 아니다. 이그드라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리아나스는 이전보다 풍성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제 곁에 있어줘요.”

님피엘이 아리아나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내 손을 쥐고 있었기에, 자연히 나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며 님피엘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눈을 감은 님피엘이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러자 아리아나스의 가지에서 은은한 빛의 파장이 흘러나와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머니 나무가 당신을 반기고 있어요.”

나도 느꼈다.

이그드라실과는 미묘하게 다른, 아리아나스 특유의 온화한 기운.

님피엘의 속삭임이 숲의 바람처럼 흩어졌다.

“서쪽에서 불길한 어둠이 느껴져요.”

님피엘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위험해요. 그곳의 어둠이 당신의 운명을 흔들려고 해요.”

희미하게 빛나는 그녀의 녹색 머리카락이 부유하듯 허공에서 춤추었다.

“시련을 마주하게 될 거예요. 당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동료가 원치 않는 일을 겪게 될 거예요.”

님피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나스가 불길한 미래를 예지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내 몸속의 혼돈이 그것을 직감했다.

“아아······!”

님피엘이 갑작스럽게 나를 껴안았다.

공포에 질린 아이처럼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가면 안 돼요 시니야오코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님피엘이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루나, 세실, 카인이 혼란이 깃든 얼굴로 우리를 주시했다. 저들은 모두 님피엘이 하는 말을 들었으니까.

돌연 님피엘의 표정이 변했다. 아니, 지워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이질적이면서도 낯익은 기운을 느꼈다. 그녀가 내 귀에 입술을 가져와 속삭였다. 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너는 배신을 경험하게 될 거야.’

두근, 심장이 뛰었다.

목 아래에서 무언가 역류하는 듯했다.

님피엘의 몸이 허수아비처럼 무너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안았다.

“아리아나스카야!”

야니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울렸다.

.

.

.

님피엘은 아리아나스 아래 누워 있었다.

힘없이 감긴 두 눈.

야니카가 조용히 님피엘을 돌보았다. 그녀의 숙련된 손길은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데미안. 마지막에 님피엘이 뭐라고 한 거니?”

루나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우리는 아리아나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데미안. 내 말 들리니?”

“님피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는 굳이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루나의 표정에는 의문이 역력했다.

“님피엘이 이유 없이 네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는 말이니?”

“이유. 있어.”

세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님피엘. 여우.”

“여우?”

“지금은 듣지도 못한 이야기에 관해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편이 낫겠지.”

카인의 말이 맞다.

님피엘은 서쪽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다.

때마침 족제비가 데미안! 하며 달려왔다.

루나가 이곳에서 있었던 내용을 녀석에게 전했다.

“너,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데미안. 우리 당분간 여기 숨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떠나야 해.”

“하, 하지만 아리아나스가 위험하다고······!”

“족제비. 원한다면 너는 여기 있어도 돼.”

진심이었다.

족제비는 레소빅과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레소빅은 족제비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내가 리아논을 걱정하는 것처럼 족제비는 레소빅을 걱정하고 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데미안······!”

“레소빅은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족제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쩌면 족제비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까.

그렇다면 족제비는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겠지.

“그냥 쉬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야. 레소빅에게 제대로 궁술을 배우도록 해. 레소빅의 몸이 염려된다면 야니카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지.”

“하, 하지만 루나의 어머니도 아프신데······.”

“우리 엄마를 네가 왜 걱정하니? 만난 적도 없으면서.”

루나가 히죽 웃으며 족제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조아킴. 너는 너에게 소중한 사람 곁에 있어야지.”

눈물을 글썽이던 족제비가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루나를 끌어안았다. 뭐야 저 녀석. 갑자기.

처음에는 당황한 루나도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족제비를 마주 안았다.

“역시 막내네. 우리 울보 조조아킴.”

그러고는 족제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카인이 족제비의 덜미를 잡아끌었다.

“불쌍한 조조한테 왜 그러니!”

루나가 깜짝 놀라 카인에게 항의했지만, 카인은 막무가내로 루나에게서 족제비를 떼어냈다.

카인의 사나운 눈빛에 족제비가 겁에 질린 듯 딸꾹질을 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카인.

“일단은 님피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서쪽의 위험에 관해 물어봐야 하니까.”

“님피엘은 서쪽의 위험을 ‘어둠’이라고 표현했다. 그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을 것 같군.”

나도 카인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모르가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네몬도 있을지 몰라.’

그들이 맞는다면 왜 우리를 노리는 걸까.

의도는 알 수 없었다.

그 둘은 예측 불가능한 존재니까.

“최대한 빠르게 라이칸이나 루카스 의장과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어.”

지금 우리들의 힘으로 네몬이나 모르가나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인이 상당히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네몬과 모르가나는 이 세계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강자다.

최악의 경우에는 카인의 회귀를 카피할 각오도 해야겠지.

“전쟁의 진척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우리는 야니카에게 오를리안과 티롤의 전쟁 상황에 대해 물었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 다만 오를리안 왕국이 우세한 상황인 듯하군.”

야니카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다.

그녀는 ‘바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때, 님피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야니카의 말은 사실이에요. 전쟁은 오를리안 왕국의 승세로 기울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면서도 확고했다.

야니카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님피엘을 바라봤다.

“아리아나스카야. 더는 무리하시지 않는 편이.”

“저는 괜찮아요. 야니카.”

야니카의 도움을 받으며 님피엘이 몸을 일으켰다.

“······역시 떠날 셈인가요? 시니야오코네.”

내가 긍정하자, 님피엘은 금세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오를리안 왕국군은 티롤의 병력을 북으로 몰아냈어요. 남쪽 해안을 통하면 티롤군을 만나지 않고 오를리안으로 넘어갈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님피엘.”

님피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피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네가 본 서쪽의 위험에 대해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군. 님피엘 제피르나.”

카인의 말에 님피엘은 잠시 머뭇거렸다.

“······짙은 어둠이 있었어요. 불길한 검은 구체(球體)가 흩어진 것이 보였어요. 아주 커다랬어요. 작은 마을쯤은 충분히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나와 카인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검은 구체.

모르가나의 능력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그림자가 보였어요. 어쩌면 인간이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하나인 것 같기도, 여럿인 것 같기도 했어요.”

두려운 기억을 떠올리는 아이처럼 님피엘이 몸을 떨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아리아나스와 이그드라실의 시선에서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이그드라실은 마치 먼 우주에서 이 세계를 내려다보는 절대적 존재 같았다. 굳이 적당한 표현을 찾자면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듯한 존재감.

반면 아리아나스는 숲이 아닌 ‘나무’를 보는 듯했다. 거리감도 이그드라실처럼 멀지 않다. 신녀(아리아나스카야)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도 보다 구체적인 것 같고.

“어머니 나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어디에선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느껴져요.”

“힘이라고?”

“아주 오래된 힘이에요. 그 힘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려 해요.”

님피엘이 두 손으로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려워요. 어머니 나무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에요.”

님피엘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그녀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그대로 전달했다. 저러다가 또 혼절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될 만큼.

“시니야오코네.”

님피엘의 목소리가 진정되며 떨림이 멈췄다.

“당신에게서 이전에는 없었던 기운이 느껴져요.”

님피엘의 눈빛과 표정이 한순간에 평온함으로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저런 극적인 변화는 역시 신녀들만의 특징인 걸까.

“새로이 손에 넣은 물건이 있나요?”

나는 보물고에서 가져온 검을 보여줬다.

가늘게 눈을 뜨며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던 님피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불쑥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

그녀의 입술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나는 님피엘의 손가락이 먼지의 털을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먼지도 헥헥 혀를 내밀며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역시 당신은······.”

나를 보는 님피엘의 눈동자가 호수처럼 빛났다.

그녀의 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왔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검은 보석의 목걸이가 감겨 있었다. 어라? 분명 아공간에 넣어뒀었는데.

“앗! 내 목걸이!”

루나가 빽 소리쳤다.

님피엘이 손을 들어 목걸이를 바라봤다.

“이 목걸이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다.

“아주 오래된 힘.”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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