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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5

94. 거지남매 – 베르크 추기경

“실례했습니다. 왕자님.”

베르크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굽신 고개를 숙였지만, 진심을 담은 예의로는 보이지 않았다.

레오도 그러려니 하며 사제를 대하는 왕자의 예법을 취했다.

“앉으시죠. 할 이야기가 많겠군요.”

추기경은 레오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준비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티스푼이 반짝, 하얗게 빛났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찻물에 신력을 담아 내놓았다.

“날이 추운데 이 늙은이가 왕자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이런 것밖에 없군요. 카넬라 같은 향신료라도 가져다드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드릴까요?”

레오는 잠시 답하지 않고 건네받은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그리고 앞에 편안하게 앉은 추기경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지금 추기경의 말은 마치 ‘귀족의 대화’를 제안하는 것 같아서 살짝 혼란이 왔다.

사제들은 보통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말을 사용했는데, ‘추운 날에 찾아온 왕자에게 줄 것이 없다.’라는 말은 난 당신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며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레오는 조금 능청을 떨어볼 필요를 느꼈다.

“아닙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추기경께서 몸소 차를 타주시니 그 마음 씀씀이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내게 직접 차를 타줬으니 날 돕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 아니냐? ─ 고 물으면서, 동시에 평범해 보이는 답변이었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시지요.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루티나가 많이 변했지요?”

분명하다. 이 자는 지금 귀족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바릭 모나크… 이 사람이 정말로 모나크 가에서 사라진 서자일까?’

의구심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레오는 뱉어낼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워낙 어릴 적에 떠난 도시라 기억나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몸을 누일 장소를 구하는 것도 힘들어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네요. 그래도 이 교회는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늘 그리웠습니다.”

‘날 도와주는 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방금 뜨겁다며 요청을 거절한 것이 진심이냐?’라고 묻자 추기경이 푸근하게 웃으며 답했다.

“허허,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교회는 모두에게 반가운 곳이지요. 그렇지않아도 왕자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신 분이 두 분 계십니다. 제오프 윌렌드 백작과 데니스 아르네 후작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대체 무슨 꿍꿍이지?’

레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추기경은 도울 생각이 없다고 재차 강조하면서도 두 귀족을 소개해주려 하고 있다.

제오프 윌렌드 백작과 데니스 아르네 후작.

이들은 레오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에릭 드 예리엘 왕자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테르탄 공작과 대립했던 귀족들이었다.

지금은 각자의 영지에 돌아가 있어서 포섭하기를 포기한 인물들이기도 했다. 에릭 왕자와 세력싸움을 할 생각도 없고…

문제는 추기경의 저의였다.

아까는 카넬라같은 향신료를 주겠다고 하더니만, 이제는 대놓고 소개를 해주려 한다.

‘이 사람은 내가 에릭 왕자랑 대판 붙기를 바라는 건가? 한번 크게 붙어보라고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을 소개해주는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으나, 레오는 답변을 회피했다. 굳이 소개를 받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추기경의 말에 따라줄 생각도 없었다.

“하하하.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군요. 여행 중에 모나크 남작을 만났는데, 그분도 여기가 그립다고 하시더군요.”

“…”

레오는 그를 떠볼 생각으로 모나크 남작을 언급했다. 역시나, 반응이 있었다.

베르크 추기경의 허허로운 얼굴이 경직됐다.

“모나크 남작이라… 왕자님께서는 그분을 잘 아십니까?”

“글쎄요? 게스타브 페테르, 아니, 모나크 남작은 정말 검소한 분이시죠.”

레오가 ‘페테르’라는 단어를 흘리자 베르크 추기경의 가면에 균열이 갔다.

그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자신의 백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한껏 날카로워진 눈으로 말했다.

“놀랍군요. 게스타브 녀석이 여기가 그립다고 할 줄이야…”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죠.”

“……”

“뭐, 좋습니다. 레오 드 예리엘 왕자님께서는 발이 정말 넓으시군요. 아는 것도 많으시고… 그래서 제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추기경이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탁자에 양 팔꿈치를 얹고, 깍지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도발적인, 귀족의 대화 따위는 집어치우자는 듯한 태도였다.

레오는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안 되는군.’

일단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과 베르크 추기경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분명해졌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부자(父子) 관계일 확률이 매우 높았기에 슬그머니 떠보았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부자 관계고 자시고를 떠나서 친밀한 사이는 아닌듯하다.

‘그냥 물러나야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더 자극하면 위험해.’

당신과 게스타브 간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밝히거나, 당신의 본명이 바릭 모나크임을 알고 있다고 말해봐야 얻을 것은 없어 보였다.

협박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지금 이자의 행동과 말투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되려 ‘좋을 대로 떠들어보라’라는 적의가 깔려 있었다.

레오는 재빨리 미련을 버렸다.

자칫했다가는 지금껏 해놓은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를뿐더러, 이 거지남매 시나리오에서 추기경이 왜 필요한 것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뭔가 놓친 것 같아서 불안하지만…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는 이유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다.

“전 아버지의 용태를 여쭤보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레오가 주제를 확 꺾으며 발을 빼자 베르크 추기경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는 깍지를 풀고 온화해진 말투로 말했다.

“한데 조금 늦으셨습니다. 왕께서는 작년부터 병이 더 악화되셔서 이제는 신력으로도 그분의 목숨을 연장하기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추기경은 피식, ‘아들놈들이 그럼 그렇지’라는 듯한 웃음을 보였다.

“에릭 왕자님께도 알려드렸으니 레오 왕자님께도 알려드려야 공평하겠지요. 왕께서는 아마 올해를 넘기지 못하실 겁니다. 아니지, 한 달이나 더 가실까? 상태가 정말 좋지 않으십니다.”

“…그렇군요.”

레오는 침통하다는 듯 고개를 떨궜으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여기도 시간제한이 있었군.’

왕이 승하하고, 에릭 드 예리엘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일이 심각하게 꼬일 터였다. 지금 레오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은 대부분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이들이지만, 에릭 드 예리엘 왕자의 불명예스러운 행동과 정통성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에릭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정통성 있는 왕자를 복위해야 한다는 명분이 퇴색되면서 기사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었다.

주종 관계 업적이 있기는 하지만…

[ 업적 : 주종 관계 – ‘144’,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는 한,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레오를 믿고 따릅니다. ]

이 업적은 보기보다 강력한 능력이 아니었다. 일견 시나리오 보상만큼이나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뚜렷한 한계가 명시되어 있었다.

– 충성심이 흔들리지 않는 한.

충성을 맹세했을 때, 그 충성심을 고정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 업적은 충성을 맹세한 이들의 숫자를 세어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능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달이라…’

레오는 추기경을 찾아와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이길 자신이야 있지만…

레오의 침묵이 길어지자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동안 에릭 왕자에게 불만을 품고 저를 찾아온 귀족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왕자님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노골적이다.

레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그래봤자 본심을 듣지는 못할 테고… 답답하다.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뭔가 있을 것 같은 사람인데 알 수가 없으니…’

이미 대화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레오는 뭣 하나라도 건져내겠다는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추기경께서는 어째서 그동안 아버지의 목숨을 붙들고 계셨습니까? 에릭 형님이 싫어하지 않던가요?”

“사제가 경각에 달린 환자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 외의 목적이 있겠습니까?”

“왕께 퍼부은 신력이면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평민 수백 명의 목숨보다 왕족 한 명의 목숨이 더 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왕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하던 추기경의 눈동자가 슬쩍 찻잔을 향했다. 단정적인 어투를 버리고 되묻는 방식으로 은근슬쩍 질문을 회피하려 했는데…

“이런, 추기경께서는 본인이 내놓은 이론과는 전혀 상반된 말씀을 하시는군요.”

“…”

레오의 일침에 추기경은 허를 찔린 듯 말문을 잇지 못했다.

레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베르크 추기경은 ‘이 세상 모든 이들은 사제가 될 수 있다!’라는 [만인사제설]를 내놓아 십자교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의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신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검증된 사람에게만 세례를 내리는 십자교회의 관행에 반기를 들었다. 이 관행에 대한 논란은 꽤 오랜 옛날부터 있었지만, [만인사제설]처럼 정립된 이론으로 반박된 것은 처음이었다.

베르크는 이 이론을 통해 신께서는 신력을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구별한 적이 없으시고, 세례에서 신력을 적게 받아들인 사람이라 해서 그것을 빨리 키우지 못하리란 법이 없음을 꼬집었다.

[만인사제설]이 발표되자 수많은 수도사가 이에 동의를 표했다. 의식에서 탈락해 사제가 되지 못한 그들도 나름의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수도사들의 불만과 베르크의 야심찬 이론은 현실에 무릎 꿇었다.

신력은 소모되는 것이었기에 모든 이들을 사제로 만들 만큼 넉넉하지 못했고, 그의 이론은 신분제를 부정하는 요소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평민이었건 귀족이었건 사제는 태생과 관계없이 신분의 제약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베르크의 주장은 특권층들에게 매우 불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냉혹한 현실을 마주한 젊은 베르크.

한창 뜨겁게 달아올랐던 논란은 그가 현실을 인정하고 신분제를 옹호하는 이론을 추가로 발표하면서 사그라들었다.

“…옛날 일입니다. 좋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치료비가 목적이었습니다. 그 돈이면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었으니까요. 내년부터는 그것도 끝이지만요. 그보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추기경은 화제를 돌리려 했고, 그 이후로 레오는 의문스러웠던 것들을 쏟아내었다.

“돈보다 신력이 더 충당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아버지께 걸린 병이 무엇입니까? 어째서 치유하지 못하나요?”

“에릭 왕자가 당신을 압박하지 않던가요?”

허나 추기경은 적당히 답하거나 얼버무리면서 속 시원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결국, 레오는 그에게서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네요.”

“이 늙은이가 왕자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귀족들을 소개해주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에 들렸다는 것만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야 물론입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습니다.”

레오는 짙은 피로를 느끼며 교회를 떠났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추기경.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권할 뿐, 끝내 레오를 돕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별것 아니겠지…’

추기경에 대한 정보는 흔히 있는,그가 얻은 수많은 정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페테르 백작과 관련이 있어서 내심 찜찜하지만, 레오는 애써 불안감을 털어버렸다.

설마 큰 탈이야 있겠는가? 나한테는 백 명이 넘는 기사가 있는데…

시끌벅적한 장터를 가로지르는 그는 고독을 느꼈다. 누구도 쉽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녀를 제외하면.

‘카시아 누나는 잘 도착했을까?’

레오는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었던 카시아를 떠올리며 무겁게 땅을 밟았다.

그는 카시아가 남긴 신발을 신고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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