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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5

95화 다가오는 위험 (2)

95화 다가오는 위험 (2)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백사장이 햇살에 반짝였다. 하얀 거품을 머금은 물결이 부드럽게 모래를 쓰다듬는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수평선까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세실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의 향기를 머금은 습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긴 흑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파도와 함께 춤을 추었다.

바람숲을 벗어난 일행은 님피엘의 조언대로 남쪽 해안을 따라 이동 중이었다. 남쪽 해안은 즉, 루카스 의장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건너왔던 세르펜타인 해협을 말하는 것이다.

“어라? 배가 없네?”

데미안이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일행이 배를 정박했던 해안이다.

“배는 왜?”

“배가 있으면 타고 가려고 했지.”

“뭐라곳! 왜 멀쩡한 육지를 두고!”

데미안의 장난에 루나가 성을 냈다. 화내는 모습도 예쁘다. 미워할 면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아이. 그러니까 데미안이 좋아하는 거겠지.

“루, 루나. 너는 왜 뱃멀미를 하는 거야? 나는 배를 타도 아무렇지 않던데.”

“뭐얏?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조조아킴!”

“힉!”

족제비는 데미안의 말을 듣지 않고 바람숲을 나왔다. 물론 레소빅 앞에서 바보처럼 엉엉 울기는 했다.

사실 세실은 족제비가 바람숲에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오를리안 왕국에 영지전이 벌어졌던 그날 밤에도, 족제비는 데미안을 따라갔으니까.

‘가자 세실. 데미안을 도우러.’

그날 세실은 족제비를 다시 봤었다. 처음으로 멋진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족제비는 강해졌다. 세실의 훈련을 잘 따라왔고, 특히 활쏘기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어쩌면 내면의 성장이 육체의 성장을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엇. 배가 저기 있었네.”

“아, 안 돼!”

데미안이 ‘거짓말인데.’ 하며 다시 장난을 걸었고, 루나는 화를 내다가 깔깔 웃었다. 데미안이 즐거워 보여서 세실은 기분이 좋았다. 그냥 이렇게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지금처럼 웃는 얼굴일 때는 두 배로 더 좋았다.

데미안이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야니카 덕분이겠지. 세실은 일행을 호위하겠다며 따라온 야니카가 고마웠다. 그녀의 실력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다. 조아킴.”

야니카는 틈틈이 족제비에게 궁술을 가르쳤다.

“저, 저기, 자연의 화살은 언제 배울 수 있어요?”

“지금의 너로서는 무리다. 자연의 화살을 발현하려면 정령과 높은 친화력이 필요하니까.”

“정령과는 어떻게 친해질 수 있어요?”

“우선은 타고난 자연 친화력이 있어야겠지. 다음으로는 정령이 많은 장소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그들의 기운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사용 가능한 힘으로 변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정령사(精靈師)라고 부른다.”

“저, 정령이 많은 곳이 있어요? 그게 어딘데요?”

“······너는 정말 바보인 건가.”

세실은 괜히 부끄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죄송해요 야니카. 족제비가 바보라서.

문득 세실은 생각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쉴 틈 없이 사고할 수 있는데, 왜 입을 열면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는데.

나도 데미안과 오래, 즐겁게 대화하고 싶은데.

‘당신에게는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바람숲을 떠나기 전, 님피엘이 속삭인 말이었다.

세실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반갑구나 세실리아. 미다크라고 부르렴.’

미다크 페이드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

엘프를 닮았고, 어머니를 닮은 여자.

‘아니, 어머니가 미다크를 닮은 거겠지.’

미다크는 무얼 하고 있을까.

분명 살아있겠지. 엘프는 천 년을 산다고 들었다. 물론 미다크가 완전한 엘프는 아닐 테지만, 보통의 인간보다는 긴 수명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미다크의 피를 이은 나 역시도 보통의 인간보다 수명이 긴 것일까? 백 년? 아니면 이백 년? 너무 오래 살고 싶지는 않은데. 데미안이 사라진 세계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내가 데미안을 지키면 돼.’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내려 했지만, 세실은 이내 풀이 죽었다.

‘······나는 강하지 않아.’

데미안과 카인이 성장하는 동안 세실은 제자리걸음만 했다. 오히려 그림자 성에서 머무르던 때보다 약해진 것 같았다. 괜한 생각은 아니다. 세실은 아직도 블레이드를 발현할 수 없었으니까.

블레이드는 블레오파드가 지닌 최강의 블러디드다. 아버지에게 듣기로, 세실은 길고 긴 블레오파드의 역사 속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블레이드를 발현한 살수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대륙의 어떤 기사도 세실과 같은 나이에 오러를 발현하지 못했다고 했다.

‘잘했다. 세실리아.’

그때의 아버지는 조금 기뻐 보였다. 세실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칭찬받은 날이자, 진짜 이름으로 불린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실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자신 이전에 가장 어린 나이에 블레이드를 발현한 살수는 누구였느냐고.

정답을 예상하고 던진 물음이었다. 세실은 당연히 아버지일 거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블레오파드 최강의 살수이자 암영의 수장이니까. 세실은 아버지가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세실의 예상을 벗어났다.

‘네몬 블레오파드.’

세실이 블레이드를 발현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날의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네몬이 블레오파드 역사상 최고의 천재였다고 했다. 아버지가 네몬을 칭찬하는 모습을 세실은 처음 보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버지는 마치, 네몬을 가까운 친구처럼 말하고 있었으니까.

세실의 의중을 느낀 것인지 아버지가 대화를 멈췄다. 그러고는 원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불필요한 질문은 삼가도록.’

이후의 훈련은 평소보다 지독했다.

그날 밤 세실은 너무도 몸이 아파 이불을 움켜쥔 채 밤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왜.’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왜 내게 그렇게 가혹한 훈련을 시킨 걸까.

그리고 아버지는 왜.

어머니를 살해했을까.

‘그날부터였어.’

세실이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감정과 행동의 괴리가 깊어진 것도.

블레이드를 발현할 수 없게 된 것도.

모두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광경을 보았던 그날부터였다.

뚝. 뚝······.

창문 너머에서 들이치던 석양빛.

점점 흐려지던 어머니의 눈동자.

분수처럼 솟는 피.

츄우우우······!

세실은 블레이드를 발현하려 할 때마다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블레이드를 발현할 수 없었다.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극복해야 해.’

오래전부터 세실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지독한 훈련만이 계속되던 나날 속에서, 세실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당시 내렸던 답은 어머니였다.

아주 가끔이지만 어머니와 대화하고,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볼 때면 행복했다. 삶이 의미 있다고 여겼다. 나는 그래서 사는 거야. 그것이 고된 훈련을 가치 있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어머니를 잃은 후 세실은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레이븐과 도주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세실은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레이븐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레이븐은 어머니를 닮았으니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세실. 아니스를 위해서라도.’

레이븐이 죽기 전에 다시 한번 했던 말.

그제야 세실은 자신이 레이븐을 어머니처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유언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남기로 했다.

추격자의 눈을 피해 광산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한 소년을 만났다.

‘너. 누구.’

세실은 사실 소년을 알고 있었다.

카인이 그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다만 소년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왜였을까.

‘난 데미안. 데미안 라플라스.’

어머니를 닮은 예쁜 금발 때문에?

‘너는 세실이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꼴사납게 뒤로 물러난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레이븐에게 들었어.’

그의 입에서 레이븐의 이름이 나왔을 때 세실은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에서 레이븐으로 이어졌던.

그러나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상실하고 말았던 그것이.

소년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속에서 작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레이븐이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그때 세실은 다짐했다.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어머니와 레이븐의 유산을 잃지 않겠다고.

어쩌면 그것이 내가 사는 의미일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세실.”

데미안의 목소리가 세실을 생각의 파도에서 끌어냈다.

“조금만 더 가면 오를리안의 국경이야.”

“응.”

“지금으로 괜찮은 거야?”

“무엇이?”

데미안이 세실의 귀에 입술을 가져왔다.

“네가 여자아이라는 거. 밝히지 않는 이대로가 좋은 거야?”

솜털 하나 닿지 않았건만 세실은 어깨를 움츠렸다.

“데미안은······. 어떻게······.”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으. 응.”

세실은 데미안이 결정해 주기를 바랐다. 이끌어주었으면 했다.

나는 데미안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그러고 싶은데.

“세실. 그런 건 스스로 결정해야지.”

데미안이 싱긋 웃었다.

“나는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존중할 거야.”

데미안다운 대답.

하지만 그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닌데.

“이대로 무사히 라이칸이나 루카스 의장을 만나면 좋겠다.”

“······응.”

“야니카가 따라와 줘서 다행이야. 야니카는 엄청나게 강하거든. 게다가 ‘바람의 노래’로 라이칸의 위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으니까.”

바람에 흩날리는 예쁜 금발.

눈이 부셔.

“따지고 보면 뭐, 족제비 덕분인가? 멍청한 녀석. 그냥 바람숲에 있으라니까 말 안 듣고.”

투덜대는 말투와 달리 데미안은 족제비가 따라와서 좋은 것 같았다.

데미안은 동료들을 아끼니까.

“······바보. 족제비.”

침묵이 찾아들까 두려워 꺼낸 말이었는데, 데미안은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그래서 세실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며칠간 데미안은 세실의 곁에서 움직였다. 족제비가 시끄럽고, 또 루나와 카인이 너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기 싫다는 이유였다.

세실은 조금 의아했다. 루나와 카인은 전혀 달라붙어 있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루나는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데미안과 눈을 맞추려 하고 있는데.

그러나 세실은 그 사실을 데미안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속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말을 아꼈을 뿐.

“벌써 여름이네.”

은월섬을 떠난 뒤로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리아논과 디네베는 무사할까.

쿠훌린과 엘리샤도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세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세실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카인을 따라갈 거야?”

대답하기 어렵다.

카인과 데미안이 함께하는 방법은 없을까. 카인은 데미안을 많이 아끼는 것 같은데.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한다면, 데미안이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내 곁에 있으라고.

“세실. 나는 네가······.”

“데미안!”

루나의 외침이 데미안의 말을 끊었다.

세실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서둘러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기쁨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라이칸이 있대! 야니카가 알려줬어!”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세실은 저 멀리 은빛의 망토를 두른 무리를 발견했다. 세실의 입가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데미안도, 루나도, 카인도, 그리고 족제비와 야니카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라이칸!”

루나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라이칸을 불렀다. 고개 돌린 라이칸이 씩 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입꼬리만을 움직이는 무뚝뚝한 미소. 그러나 세실의 눈에는 무척 따스해 보였다.

세실은 신이 났다. 아리아나스의 예지와 달리 일행은 무사히 은월의 단과 합류했다. 이렇게 되면 흑마법사를 만나도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 라이칸이 우리를 보호해 줄 테니까.

루나를 보며 말을 달리던 라이칸이 돌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머지 은월의 단원들도 하나같이 위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환한 낮이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졌다. 세실도 머리 위를 바라봤다. 거대한 검은 구체들이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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