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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6

96화 다가오는 위험 (3)

96화 다가오는 위험 (3)

‘짙은 어둠이 있었어요. 불길한 검은 구체가 흩어진 것이 보였어요. 아주 커다랬어요. 작은 마을쯤은 충분히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님피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의 예지대로 하늘 위에는 불길한 빛을 발하는 검은 구체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인간의 그림자가 보였어요. 어쩌면 인간이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하나인 것 같기도, 여럿인 것 같기도 했어요.’

부르르 진동하던 구체 하나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것이 허공에서 수십 개의 작은 구체로 분열했고, 지면과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 안에서 어둠의 생명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명체의 대부분은 짐승이나 몬스터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부푼 근육과 비율이 맞지 않는 육체.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인간 형상의 괴물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고,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는 검은 구멍으로 변해 있었다.

“은월의 단! 루나프레나를 보호하라!”

이곳에는 은월의 단 외에도 오를리안 왕국의 여러 병력이 있었다. 티롤 왕국군도 보였다. 일정 거리를 둔 대치 상태였던 것 같다.

우리도 라이칸을 향해 마주 말을 달렸다. 그러면서 나는 눈앞의 풍경이 묘하게 이지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간이 비틀려 있다. 모르가나는 이 장소에 많은 공을 들인 듯하다. 그래서 일부러 오를리안군에게 밀려 북으로 이동했던 건가?

“저것이 어둠의 군대인가.”

어둠의 군대가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지만 카인에게서 두려움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족제비와 달리.

“힉! 저, 저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고······?”

“집중해라 조아킴. 너는 젤렌루치니크라 불리던 궁수가 아닌가.”

“하, 하지만 야니카······!”

“잘 보거라.”

야니카가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탄력적인 진동음과 함께 자연의 화살이 쏘아졌다. 화살은 멀어질수록 크기를 부풀렸다. 소설에서 읽은 적 있다. 공기를 가르며 생성되는 바람을 화살이 끊임없이 재흡수하며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윽고 팽창의 임계점을 맞은 화살이 하늘 위에서 폭발했다. 그것이 수십, 수백의 화살비가 되어 어둠의 군대를 습격했다. 야니카의 특별한 기술, 폭풍의 비!

퍼퍼퍼퍼펑!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수십 마리의 괴물이 죽거나 다쳤다. 일행이 놀란 눈으로 야니카를 돌아봤다. 폭풍의 비에 대해 알고 있던 나조차도 크게 놀랐다. 소설에서 읽은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가, 가르쳐 주세요!”

족제비의 호들갑에 야니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면 살아남거라.”

선두로 튀어 나간 야니카가 활을 쏘며 길을 뚫었다. 자연의 화살은 아니다. 엘프의 장기인 자연의 화살은 기사의 오러와 마찬가지로 발현량의 한계가 있다. 게다가 ‘폭풍의 비’는 그 엄청난 파괴력에 비례해 많은 정령의 힘을 필요로 한다.

“우와! 야니카는 대단해!”

루나가 신이 나서 외쳤다. 동감이었다. 저렇게 많은 적과 싸울 때는 광역 공격기를 지닌 마법사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나와 카인은 아직 유의미한 광역기를 갖지 못했다. 그 자리를 야니카가 메운 것이다.

아니, 사실 나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

투트트트틋······!

내 손에서 세계수의 혼돈이 뻗어나갔다. 세계수의 혼돈은 치유의 기운을 지녔지만, 어둠의 군대에게는 더없이 효과적일 것이다. 어둠 속성과 대척되는 힘이니까.

예상대로 세계수의 혼돈은 놈들에게 큰 타격을 줬다. 카인도 강해 보이는 개체를 타깃으로 소서러의 힘을 발현했다. 나머지 동료들은 루나릭서를 무기에 발라 적을 공격했다.

“루나!”

“라이칸!”

루나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라이칸과 합류했다.

“멀지 않은 곳에 루카스 의장도 있다.”

“우리가 해냈어요 라이칸! 치유제의 재료를 전부 모았다고요! 이제 가족들을 살릴 수 있어요!”

루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환히 웃었다. 라이칸도 웃었다.

그들을 보던 나는 눈앞의 공간이 다시 한번 이지러지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공간을 가로질러 내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결과로 루나와 라이칸을 포함한 은월의 단원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데미안!”

세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즉각 고개를 돌렸지만 세실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인, 족제비, 야니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던 장소가 바뀌었다. 해안의 풍경은 사라지고, 어둠과 고요가 감도는 낯선 공간으로 변했다. 어두운 안개가 흐른다. 공간이 끊임없이 비틀리며 움직이는 듯했다.

카앙! 날카로운 소음이 공기를 찢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하나의 목이 어두운 무기에 의해 몸통에서 분리되며, 기사가 쓰러졌다. 죽은 기사의 검에서 흐르는 기운은 특별한 것이었다.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발현 가능한 신기, 오러 블레이드.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자가 고작 이 정도인가.”

검은 옷의 남자가 조소하듯 말하며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은 차가운 보랏빛으로, 감정 없는 깊이를 담고 있었다.

‘일루산 블레오파드!’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세계수의 혼돈을 발현했다.

***

카인은 침묵 속에서 냉정하게 주변을 살폈다. 갑작스럽게 변한 공간. 주위는 어둠과 안개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둠의 군대는 그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카인은, 지금과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숨어있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카인의 목소리가 고요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성미가 급하군요? 당신은.”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후드를 깊게 눌러쓴 검은 로브의 여자가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난번처럼 무작정 공격하지는 않을 셈인가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왜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궁금한가요? 그게 아니면.”

모르가나의 검붉은 입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데미안의 안전이 염려되는 건가요?”

조롱하는 듯한 어투.

카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동료들은 어디에 있지?”

“그들 모두는 적당한 장소에 떨어뜨려 놓았답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거든요. 물론 그것을 위해 수많은 마법진을 숨겨놓느라 애를 먹었지만 말이죠.”

“우리의 행로를 예측했다는 건가.”

“예측일까요? 아니면 당신들이 제가 원하는 장소로 와준 걸까요.”

“또 말장난할 셈인가.”

카인의 목소리에 차가움이 서렸다.

모르가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말장난이라니. 너무한데요? 제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당신이 봤다면 분명 눈물을 흘리며 저를 위로했을 거랍니다?”

카인의 눈동자가 파괴의 힘으로 채워지며 푸른빛으로 변했다.

모르가나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오늘은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답니다? 그런데 듣지도 않고 저를 공격할 셈인가요?”

“궁금하지 않다.”

퍼엉! 카인이 발현한 능력이 모르가나의 얼굴 절반을 날려버렸다. 반쪽이 된 얼굴로, 모르가나는 기이하게 웃으며 검은 피를 쏟았다. 그 피는 이내 여러 마리의 까마귀로 변신해 허공을 가로질렀다.

되살아난 검붉은 입술이 카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세실의 비밀을 알고 있나요?”

***

세실은 순식간에 변해버린 상황을 목격했다. 시커먼 구체가 루나와 라이칸을 삼키는 것을 보았고,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카인도 사라졌다.

이어 또 다른 검은 구체가 데미안을 향해 밀려들었다.

“데미안!”

데미안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돌연 사각에서 등장한 검은 구체가 세실의 몸을 삼켰다.

세실은 낯선 장소에 서 있었다.

주위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과 침묵뿐.

“······!”

세실은 빠르게 몸을 돌리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카앙! 갑작스러운 공격이 세실을 뒤로 튕겨 나가게 했다. 세실은 바닥을 구르며 충격을 흡수했다. 데미안이 준 단검이 아니었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실은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상대는 세 명의 살수. 모두 트리플 블레이드다.

세실은 블레이드를 발현하려 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그럼에도 세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데미안을 찾아야 하니까.

피핏!

그림자 도약을 발현한 세실이 한 살수의 목을 정확히 베었다. 이어지는 동작으로 또 한 명을 공격했지만 상대는 빠르게 반응하며 막았다.

그림자 도약을 처음 본 살수들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적 하나를 해치울 수 있었으나 추가 공격에는 실패했다. 세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저들은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살수들이 세실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의 세실로서는 틈을 찾기 어려운 협공. 세실은 죽음을 직감하며 단검을 꽉 쥐었다. 그때, 어두운 섬광과 함께 두 살수의 몸이 절단됐다.

쓰러진 두 살수의 몸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았다. 그 너머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세실.”

피에 젖은 쿼드 블레이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아마빛의 눈동자.

“······크쉬.”

세실은 놀라움과 혼란이 뒤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크쉬는 암영의 서열 2위이자, 아버지의 가장 충직한 부하다.

그런 그가 혈족을 죽이다니. 무엇 때문에?

“······왜. 나를.”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조금 전 그의 움직임은 세실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세실을 구했다.

“수장의 명령이니까.”

“거짓말!”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럴 리 없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던 모습을.

“거짓말이 아니다.”

“듣기! 싫어!”

세실은 절망적인 분노를 느끼며 그림자 도약을 발현했다. 그러나 크쉬의 빠른 반격에 당해 바닥에 쓰러졌다.

“쓸데없는 행동하지 마라.”

세실은 배를 움켜쥐며 크쉬를 노려보았다.

크쉬의 말이 맞다.

어떤 수를 써도 그에게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말해.”

짓씹듯 내뱉었다.

“······날. 죽이려던. 자가. 어째서.”

크쉬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수장은 너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

“······뭐라고?”

“너는 잘못 알고 있다. 레이븐은 정말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게. 무슨······.”

크쉬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그는 고뇌하고 있었다. 수장은 절대로 세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명했다.

레이븐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네 어머니가 죽었던 그날, 어떻게 네가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레이븐이······.”

“수장이 정말로 너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레이븐이 달아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너를 품에 안은 채로 말이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정말 그러려고 했다면 죽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거지? 게다가 그날 보았던 아버지의 살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건 사실이다. 수장은 네 어머니, 아니스 페이드린을 죽였다.”

“왜!”

울부짖었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쉬의 눈빛이 깊어졌다.

“세실. 너를 살리기 위해서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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