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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7

97화 진실 (1)

97화 진실 (1)

“저곳인가.”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망토를 흔든다.

미다크 페이드린은 슈타인탈 왕국 북동쪽의 들판을 걷고 있었다. 찾는 이가 있다. 하센베르크 백작 가문의 가주, 빌헬름 하센베르크.

지난달 티롤 왕국에서 만났던 검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빌헬름 하센베르크는 대륙의 이상 현상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수께끼 같은 자였어. 게다가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검은 후드를 눌러쓴 의문의 검사를 떠올리자 미다크는 몸에 한기가 돌았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내며, 미다크는 성벽을 향해 걸었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의 눈빛이 날카롭다. 제대로 훈련받고 있다는 증거다.

“들어가십시오.”

신원을 확인한 경비병이 문을 열었다.

사실 미다크가 지닌 능력이라면 이런 성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넘을 수 있지만, 그녀는 굳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백작 나리께서 이런 곳에 사신다는 말이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영지.

미다크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숲길을 걸었다. 인공적인 도로보다는 이런 자연 속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였다. 아마도 몸 안에 절반가량 섞인 엘프의 피 때문이겠지.

“아하하하! 빨리 와!”

저만치에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언덕을 향해 달리는 두 소년이 보인다. 흑청색 머리카락의 소년과 금발 소년.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뻔했다. 언덕의 정상에 우뚝 선 저 커다란 나무겠지.

미다크는 그중 한 소년에게 눈이 갔다. 밤하늘을 닮은 흑청색 머리카락. 늑대의 눈빛을 연상케 하는 호박색 눈동자.

미다크는 방향을 틀어 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봤으면 까무러치듯 놀랐을 것이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하듯,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으니까.

“얘들아?”

미다크가 싱긋 웃으며 소년들을 불렀다.

두 소년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미다크를 돌아봤다.

“나는 미다크 페이드린이라고 한다. 하센베르크 백작을 만나러 왔지.”

“아, 페이드린 가문에서 오셨군요. 저는 카인 하센베르크라고 해요.”

소년의 말투는 겸손하고 친근했다. 예상대로 백작 가문의 권위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영리해 보이는 아이. 이제 13살 정도일까?

그러고 보니 세실리아도.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안 계세요. 볼일이 있어 제국에 가셨거든요. 하지만 곧 돌아오실 거예요.”

카인의 표정에 약간의 고민이 비쳤다.

미다크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두 소년은 모두 가죽 갑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훈련용 검을 차고 있었다. 아마도 훈련 중에 몰래 빠져나온 거겠지.

“안내해 주지 않아도 괜찮단다. 나는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하거든.”

미다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카인이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성으로 가시면 관리인이 머무르실 방을 안내해 드릴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소년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카인이 금발 소년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서 가자! 아벨!”

.

.

.

그동안 대륙을 유랑하며 많은 귀족의 성을 봤지만 이렇게 꾸밈없는 장소는 처음이었다.

이런 곳이 슈타인탈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세를 지닌 하센베르크 백작의 거처라니.

“페이드린 가문에 관한 이야기는 빌헬름을 통해 종종 들었어요. 선조들께서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셨다고.”

더 놀라운 점은 관리인이 아닌, 하센베르크 백작 부인이 직접 미다크의 안내를 맡았다는 것이다.

“빌헬름은 조만간 돌아올 거예요. 그때까지 제게 대륙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하센베르크 백작 부인은 자신을 ‘헬레나’라고 소개했다. 소녀처럼 순수한 여자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본래 그녀는 귀족이 아니었다.

하센베르크 백작과는 제국의 명문 학교인 ‘아르카넘 홀(Arcanum Hall)’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마법을 수련하신 모양이군요, 백작 부인.”

“조금 흉내만 낼 뿐이에요. 편하게 헬레나라고 불러주세요.”

잠시 후, 작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완전무장한 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카인이 또 훈련 중에 아벨과 함께 달아났다고 했다.

헬레나는 백작이 돌아올 때까지만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다.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지나치게 열심히 훈련하는 아이예요. 가끔은 풀어주는 것도 필요하겠죠. 그 아이의 곁에 아벨이 있어 주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답니다.”

해 질 녘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카인이 돌아오지 않자 헬레나는 슬슬 걱정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카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산책할 겸 제가 데려오죠. 사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을 만났었거든요.”

“하지만 손님께 그런 부탁을 드릴 수는······.”

“저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편이 익숙하답니다.”

미다크는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

“수장.”

창밖을 내다보는 일루산의 옆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언뜻 무표정해 보였지만, 그가 근심에 빠져있다는 것을 모를 크쉬가 아니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너는 이곳에 남아 아니스와 세실을 지켜야 한다.”

군주의 명을 받은 일루산은 임무를 위해 그림자 성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까닭 모를 불안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네몬의 계략이 있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오래전부터 일루산은 네몬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혈족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 ‘그림자 군주’와 함께.

“네몬은 내가 데려간다.”

일루산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방심하지 마라. 예감이 좋지 않다.”

그림자 군주를 만날 수 있는 이는 일루산과 네몬 뿐이었다.

그 둘 외에는 아무도 군주의 존재를 몰랐다.

물론 ‘카이라’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다.

‘······카이라가 살아 있었다면.’

군주에게 명을 받는 이는 원래 일루산이었다. 네몬은 군주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뀌었다.

세실이 태어난 날부터.

‘이 아이의 이름은 세실이 좋겠군.’

군주는 직접 세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일루산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군주가 지닌 특별한 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장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루산은 또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세실의 성별을 숨기고 ‘세실리아’라는 진짜 이름을 만들었다.

위험한 외줄 타기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블레오파드는 그림자 군주의 ‘절대명령(?對命令)’에 지배받는 존재니까.

“크쉬. 세실을 데려와라.”

“존명.”

크쉬가 사라지자 일루산은 방의 비밀 장소에서 어떤 물건을 꺼냈다.

아지드의 망토.

일루산 이전의 수장이었던 ‘아지드 블레오파드’의 유품이다.

그는 죽기 전, 이 망토를 일루산에게 맡겼다. 망토에는 위대한 아지드의 힘이 녹아들어 있다. 오직 그만이 지녔던 특별한 영력 역시도.

“······아버지.”

일루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지드의 아들이었다.

본래는 가문의 수장이 된 자신이 착용했어야 하는 망토.

그러나 일루산은 오랜 세월 이 망토를 숨겨 두었다.

“수장. 세실을 데려왔습니다.”

세실은 크쉬의 옆에서 우물쭈물 일루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루산도 물끄러미 세실을 바라봤다. 아니스와 같은 빛을 지닌, 아름다운 연녹색 눈동자.

“크쉬. 네몬에게 블레이드 1개 분대를 선별해 대기하라고 전해라. 나를 포함해 열둘이 간다.”

“존명.”

크쉬가 사라진 뒤에도 세실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세실.”

“네! 아버지!”

“이리 오거라.”

세실은 종종거리며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조금 이상했다.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의 목소리에서는 온화함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받거라.”

아버지가 건넨 것은 그림자 망토였다.

“이제 네 것이다. 다만 착용하지는 말고, 항상 몸에 지니고 있거라.”

두 손으로 공손히 망토를 받으며, 세실은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그림자 망토는 영력을 처음 익힐 때 사용하는 훈련 장비였으니까. 즉, 지금의 세실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세실의 입꼬리는 꿈틀꿈틀 위를 향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인 것이다. 어서 빨리 어머니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는 네몬과 함께 임무를 떠난다. 네 훈련은 크쉬가 대신해 줄 거다.”

“네! 아버지!”

세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미소한 일루산이 세실의 이마를 톡, 손날로 두드렸다.

.

.

.

“일루산! 나만 빼고 어디 가려는 거야!”

그림자 성을 떠나려던 일루산의 발이 멈춰 섰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옆에서 네몬도 한숨을 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잔뜩 찡그린 얼굴의 누이동생과, 그녀의 옆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크쉬가 보였다.

“미스트.”

“나도 갈 테야!”

“지휘관 둘과 1개 분대만 간다. 더 이상의 병력은 필요 없다.”

“열두 명이 간다고?”

“그렇다.”

크헉······!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트리플 블레이드 한 명이 고꾸라졌다.

기절한 그의 등에 한쪽 발을 올리며 미스트가 웃었다.

“한 명이 아프다는데? 특별히 내가 빈자리를 메꿔줄게!”

***

“어머니! 저희 왔어요!”

카인과 아벨이 성으로 돌아왔다. 어찌나 신나게 놀았는지 두 소년 모두 온몸이 흙먼지투성이였다.

헬레나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 기사단장께서 찾아오셨던 거 알고 있니?”

“저, 정말요?”

두 소년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내렸다. 아, 내일 하루는 정말 힘들겠구나.

“그런데 손님이 오시지 않았어요?”

“너희들을 데려오겠다며 나가셨는데, 마주치지 않은 거니?”

“아······.”

카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라도 손님이 자신들이 있는 곳을 말할까 봐, 중간부터는 장소를 옮겨서 놀았던 것이다.

“저희가 손님을 모셔 올게요. 어디로 가셨는지 알 것 같아요.”

카인이 히죽 웃으며 아벨을 돌아봤다.

아벨도 카인을 보며 웃었다.

손님을 모셔 온다는 구실로 조금 더 놀 수 있게 되었으니까.

“가자! 아벨!”

어머니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두 소년은 방을 나서 복도를 달렸다. 성에는 늘 최소한의 하인만 머물렀기에 방해하는 이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지나치게 조용한데?

카인은 킁킁,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평소처럼 저녁 메뉴를 맞추는 내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묘한 냄새가 난다. 음식 냄새와는 거리가 먼, 마치 녹슨 쇠에서 나는 것 같은.

“······방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

아벨의 목소리에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어딘가에서 들려온 불온한 소음을 느꼈다.

귀를 기울였다.

“성 밖이야.”

두 소년은 계단을 지나 1층으로 내려갔다. 네모진 창밖에는 서서히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억누르며, 카인은 출입문을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끼이익······.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는 문이었건만, 지금만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내는 듯한 음산함이 느껴졌다. 문 너머에는 새까만 그림자가 서 있었다. 살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가 카인을 노려봤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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