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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8

98화 진실 (2)

98화 진실 (2)

어떤 본능적인 직감으로, 카인은 아벨의 손을 잡아끌었다. 흐릿하게 지나가는 문밖의 풍경 속에서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진 병사들을 봤다. 카인은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장악한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어머니.

정신없이 복도를 달리며, 카인은 조금 전까지는 닫혀 있던 많은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로 물든 방.

팔다리가 잘린 채 널브러진 시체들.

“우욱······!”

아벨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토사물을 쏟았다. 카인은 아벨을 잡아 일으키며 뒤를 돌아봤다.

보랏빛 눈의 사내가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카인도 주저앉고 싶어졌다. 나는 달아날 수 있을까. 어머니를 구할 수 있을까.

“정신 차려! 아벨!”

두 소년은 다시 달렸다. 계단을 뛰어오르자 날붙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의 외침도 들렸다. 카인의 눈동자에 빛이 살아났다. 기사단장, 프란츠 바우어 경이다.

“기사단이 왔어!”

하센베르크 기사단은 슈타인탈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전투력을 지녔다. 아니, 최고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인 빌헬름 하센베르크를 포함해, 하센베르크 기사단에는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으니까.

“카인! 아벨!”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두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방 안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열었다.

살아남은 기사들이 방으로 모였다. 프란츠 경과 눈빛을 주고받은 그들이 다시 복도로 달려 나갔다. 비밀 통로의 어둠으로 진입하며, 카인은 등 뒤에서 어머니가 주문을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

미다크는 카인과 아벨을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예상치 못한 이들을 조우했다.

“미다크 페이드린.”

“당신들이 이곳에 무슨 일이지?”

미다크는 적대적인 시선으로 여자를 마주 보았다.

“그대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타깃은 블레오파드니까.”

“블레오파드라고?”

“이것은 그대를 향한 예우입니다. 반쪽짜리이기는 해도, 그대에게는 우리 ‘티스베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미다크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아무리 정령의 힘을 극한으로 발휘하는 티스베리 엘프족이라 해도, 블레오파드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블레오파드가 이곳에 있다는 근거는?”

“내통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통자? 당신은 그 말을 믿는다는 건가.”

“그대 역시 ‘그’의 이야기를 믿고 이곳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미다크 페이드린.”

여자 엘프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흑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 모르가나로부터.”

미다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블레오파드에게 전쟁을 선포할 셈인가.”

“그들은 위험한 존재입니다.”

엘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설마 방해하려는 것입니까? 그대의 하나뿐인 딸, 아니스 페이드린에게 블레오파드의 그늘이 드리웠다는 이유로.”

그때, 미다크는 성 방향에서 퍼져 나오는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

“아무래도 벌써 도착한 모양이군요. 그들은.”

미다크는 뒤돌아 성을 향해 달렸다.

***

통로는 어두웠다.

이 통로의 존재는 아버지와 어머니, 기사단장 프란츠를 포함한 소수의 기사와 카인만 아는 비밀이었다.

“발밑을 조심해. 아벨.”

카인은 아벨을 챙겼다. 아벨은 이 통로의 존재를 몰랐다.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에서 자그만 마법 등불이 떠올랐다.

“미안하구나 아벨. 미처 신경 쓰지 못했어.”

카인은 지금껏 어머니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물론 어머니가 ‘아르카넘 홀’이라는 제국의 특별한 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마법을 발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인 듯했다. 방으로 뛰어들던 적 하나가 어머니의 마법을 맞고 허수아비처럼 날아갔으니까.

프란츠 경이 속삭였다.

“곧 출구입니다. 빛은 이만 갈무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밀 통로를 지나자 덤불로 가려진 공간이 나타났다. 카인은 아벨의 손을 꼭 잡은 채 덤불의 어둠 속을 걸었다.

덤불을 벗어나자마자 기사들이 어디선가 군마를 끌고 왔다. 일행이 서둘러 말에 올랐을 때였다.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갈 셈인가요?”

어둠에 물든 음산한 목소리.

카인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처럼 붉은 눈을 뜬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쟤들을 전부 죽이면 되는 거야? 네몬.”

붉은 눈의 사내 옆에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가 있었다.

그들 뒤로 몇 명의 살수들이 더 보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미스트. 단, 소드마스터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붉은 눈의 사내가 달려들었다.

.

.

.

카인은 멍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프란츠 경의 왼팔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호오. 급소를 피한 건가요?”

붉은 눈의 사내가 웃었다.

카인은 바들바들 턱을 떨었다. 프란츠는 왼팔을 잃었고,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반면 적의 수는 줄지 않았다. 갈래머리의 여자 살수 때문이었다. 그녀가 모든 기사의 목을 베었다. 어머니의 마법이 없었다면 카인과 아벨도 죽었을 것이다.

“제법이네? 너.”

그녀가 어머니를 보며 웃었다. 카인은 그 웃음에서 순수한 광기를 봤다.

그때, 하늘 위의 변화가 카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허공이 이지러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균열이 생성됐다. 그 안에서 검을 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인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카인은 희망을 느꼈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지면에 내려선 아버지가 붉은 눈의 사내를 공격했다. 붉은 눈의 사내는 일순 당황한 듯했다.

갈래머리의 여자를 포함한 모든 살수가 아버지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발현한 오러 블레이드가 그들의 몸을 뒤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대단했다. 역시 아버지는 왕국 최강의 소드마스터였다.

“헬레나! 카인!”

아버지가 달려왔다. 아버지는 놀란 와중에도 침착해 보였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예견한 것처럼.

아버지의 등장 후, 적의 위세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잠시간의 대치 상황이 만들어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걸 받거라. 카인.”

아버지가 카인에게 건넨 것은 자그만 검은 보석이었다.

아니, 투박하게 부서진 파편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힘이다.”

카인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카인의 손에 억지로 검은 파편을 쥐여줬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릅뜨며 뒤를 돌아봤다.

“빌헬름 하센베르크.”

아버지가 바라보는 곳에는 보랏빛 눈의 사내가 서 있었다.

“······일루산 블레오파드.”

아버지는 저 사내를 아는 듯했다.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오필리아에게는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가!”

“이유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보랏빛 눈의 사내, 일루산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될 저주받은 힘이다!”

“그 저주받은 힘을 연구하도록 도운 것은 하센베르크 가문이 아니었던가.”

“하센베르크는 힘의 위험성을 깨닫고 연구를 포기했다.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그 힘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이다!”

“빌헬름 하센베르크. 너는 어떻게 그 감옥에서 빠져나와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나.”

아버지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일루산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야말로, 네가 말한 그 ‘어리석은 오만’을 부린 것은 아닌가.”

카인은 손에 쥔 검은 파편을 품 안에 숨겼다.

이것을 적에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말이 맞는가. 빌헬름 하센베르크.”

아버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일루산이라는 사내가 등장한 후, 아버지는 평상심을 잃었다.

무언가를 각오한 눈으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어머니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의도를 직감했다.

“아버······!”

어떤 무형의 힘이 카인과 아벨을 강타했다. 어머니의 마법이다. 덜미를 잡혀 끌려가듯 두 소년이 공중을 날았고, 카인은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얼굴을 봤다.

카인의 몸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몸을 일으킨 카인의 옆에는 군마가 있었다. 어머니를 향해 달리려 하는데, 어머니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오지 말라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카인은 어금니를 깨물며 옆을 돌아봤다. 조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아벨은 기절한 채였다.

***

일루산은 군마를 타고 달아나는 두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빌헬름 하센베르크를 제압하는 것이 우선이다. 소년들은 이후에도 얼마든지 추적할 수 있다.

일루산은 세실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군주의 명령이다. 고통 없이 끝내는 것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일 뿐.

“내가 빌헬름 하센베르크를 맡는다.”

일루산은 달렸다. 두 소드마스터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발현됐고, 여자 마법사의 손에서는 마력이 결집됐다. 일루산은 웃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 혼자서도 저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

그때, 어떤 날카로운 마력이 일루산의 측면을 기습했다. 일루산은 순간 당황했지만 블레이드를 뻗어 그것을 막았다.

‘지원군이?’

뒤따르는 살수들을 멈춰 세우며, 일루산은 마법의 시전자를 돌아봤다.

그리고 석상처럼 굳어졌다.

파아앙! 다시금 날아온 마법이 일루산의 몸을 뒤로 밀려나게 했다. 이번에도 일루산은 블레이드로 막았다. 블레이드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미다크 페이드린.”

“페이드린 혈족에 이어 하센베르크 가문마저 없애려 하는가! 일루산 블레오파드!”

일루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그였다. 그 정도로 미다크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엘프들이 서 있었다.

‘왜······ 지금······!’

일루산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의 곁으로 네몬이 유령처럼 다가섰다.

“수장.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네몬을 돌아보는 일루산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아니스 페이드린이 보낸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엘프까지 동원했지요.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일루산의 안구에서 툭 툭, 혈관이 불거져 나왔다. 네몬은 지금, 가문의 안주인을 함부로 부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아니스 페이드린은 가문의 배신자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그녀는 블레오파드가 아니지요. 이것은 결국 수장의 변덕으로 인해 초래된 일입니다.”

일루산의 블레이드가 네몬의 목을 겨눴다.

손끝이 떨려온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인가.

아니,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도 공교롭다.

“저를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이어진 네몬의 속삭임은 일루산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군주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이것이었던가.

불길한 예감의 정체는.

“미스트. 부하들과 함께 소년들을 추격하라.”

“아, 알았어!”

일루산의 살기에 바짝 움츠려 있던 미스트가 황급히 답했다. 일루산의 시선이 네몬에게서 떨어져 미다크와 빌헬름을 돌아봤다. 그렇게 살기의 대상이 바뀌었다.

“네몬. 너는 나와 함께.”

씹어뱉었다.

“저자들의 숨통을 끊는다.”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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