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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9

99화 진실 (3)

99화 진실 (3)

카인은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등 뒤를 울렸다. 살수들이 군마를 타고 쫓아오고 있다.

뒤를 돌아본 카인은 양 갈래머리의 여자 살수가 없다는 것에 조금 안도했다. 보랏빛 눈의 사내도, 붉은 눈의 사내도 보이지 않는다.

“······카인?”

“깨어났어? 아벨.”

카인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아벨이 주위를 돌아봤다.

“백작 부인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어. 프란츠 경도.”

아벨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카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자랐다.

“적들이 쫓아오고 있지만 괜찮아. 따라잡히지 않을 거야.”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하센베르크의 군마는 주인을 알아보며, 주인과 함께할 때 최고의 주력을 발휘한다.

“걱정하지 마 아벨.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사하실 거야.”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마지막에 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아벨이 울먹거렸다.

“많은 사람이 죽었어······. 기사들도······. 프란츠 경도 팔을······.”

무어라 답하려던 카인은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진한 피 맛이 정신을 일깨운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다.

살아남는다.

아벨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너, 제법 빠르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카인은 소름이 돋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갈래머리의 여자 살수가 옆에서 웃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을 발하는 시커먼 표범을 타고서.

카인은 비명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자 살수는 왼손으로 가볍게 막았다. 손가락 자체가 어두운 날붙이인, 괴이한 무기.

“있지. 나는 너를 아주 천천히 괴롭히다가 죽일 거야. 왜냐고? 그야 지금 여기에는 일루산도, 네몬도 없으니까. 무슨 말이냐면, 너를 내 마음대로 해도 나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야.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 줄 아니? 정말 아주아주아주아주 신나는 일이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목소리에 카인은 아연해졌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욕구를 억눌러왔는 줄 아니? 일루산과 크쉬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했어. 심지어 가울에게도 있는 지휘권이 나한테는 없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이거 봐. 나는 쿼드잖니. 근데 가울은 트리플이거든? 정말로 너무한 처사가 아니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 살수의 안광이 들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일루산은 언제나 나를 아이 취급한다니까? 크쉬도 그렇고. 아, 근데 크쉬는 내가 막 조르면 엄청 곤란해한다? 일루산이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하면서, 은근히 나한테는 꼼짝도 못······.”

스겅, 카인은 여자 살수를 향해 휘두른 자신의 검이 허공을 나는 광경을 봤다.

절단된 오른팔과 함께.

“얘,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니?”

순식간에 지면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카인은 하나 남은 왼팔로 아벨을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온몸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카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가, 주저앉았다. 불그스름해진 시야 속에서 기묘한 방향으로 꺾인 다리가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마! 얘네들은 내 거니까!”

훌쩍, 표범의 등에서 뛰어내린 여자 살수가 다른 살수들을 향해 으름장을 놨다.

카인은 왼손으로 아벨의 검을 뽑아 들었다. 머리가 멍하다. 절단된 팔과 부러진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달아나. 아벨.”

아벨은 겁이 많다.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카인은 울컥 피를 토했다. 여자 살수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깡충깡충, 엇박자로 다가온다. 눈앞의 선물상자에 신이 난 아이처럼.

그때, 아벨이 단검을 손에 든 채 여자 살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로서는 놀라운 용기였다. 그러나 여자 살수의 손짓 한 번에 지면에 처박혔다.

“순서를 지켜야지? 꼬맹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여자 살수가 카인에게 다가왔다.

“있지? 나는 먼저 네 눈알을 파낼 거야. 네 눈빛이 꽤 마음에 들거든. 아, 물론 한쪽만. 왜냐고? 그야 지금부터 네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너도 봐야 하잖니? 그다음에는 네 두 다리를 자르고, 나머지 팔도 자를 거야. 그렇게 너를 꼼짝 못 하게 만든 다음에, 아주 천천히 네 배를 가를 거야. 너 본 적 있니? 네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카인은 몸에 든 모든 것을 게워 냈다.

“역시 나는 네 눈이 마음에 들어. 이런 상황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다니. 너무 갖고 싶어지잖니?”

콰득, 카인의 세계 반쪽이 어두워졌다. 한쪽 눈이 도려내어지는 끔찍한 감각을 느끼며, 카인은 여자 살수를 노려봤다. 정신을 잃을 것 같다. 그러나 견딜 것이다. 아직 최후의 수단이 남았으니까.

여자 살수가 입맛을 다시며 집중하는 사이, 카인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이걸 받거라. 카인.’

아버지가 건네주었던 검은 파편.

‘아버지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힘이다.’

파편을 손에 쥔 카인은 의지를 집중했다. 허공의 균열 속에서 등장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사용법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파편의 힘을 이용해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렇다면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지독한 악몽을 벗어나 어디론가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

“······어?”

돌연 여자 살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의 얼굴이 구깃구깃 일그러졌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아벨이 그녀의 옆구리에 단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너어어어어!”

눈이 뒤집힌 여자 살수가 카인에게서 손을 떼고 아벨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아벨!”

카인이 몸을 뻗어 아벨을 감쌌다. 그 순간, 카인은 검은 파편에서 가공할 에너지가 발산하는 것을 느꼈다.

.

.

.

미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번쩍, 어두운 빛이 발하는가 싶더니 소년 하나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얘. 방금 뭐였니?”

단검을 쥔 채 널브러진 소년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숨이 멎었으니까. 희미한 슬픈 미소를 머금고, 눈도 감지 못한 채.

“뭐였지? 방금 그건?”

미스트의 의문은 길지 않았다. 옆구리의 상처가 욱신욱신 아팠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그러나 피가 흐른다.

“피!”

미스트는 소년의 시체를 난도질했다.

***

일루산은 유령 표범을 타고 달렸다.

‘부디 늦지 않기를······!’

미다크 페이드린과 엘프들은 처리했다. 빌헬름 하센베르크와 그의 아내 역시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다.

네몬은 미스트에게 보냈다. 그러나 곧 눈치채고 따라올 것이다.

저만치 그림자 성으로 통하는 검은 구체가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었다.

“어머. 벌써 끝난 건가요?”

여자가 동그랗게 입술을 말았다.

“그런데 왜 혼자이신 건가요? 네몬은요? 다른 살수들은?”

암영이 대륙 곳곳을 신출귀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저 여자의 마법 덕분이다. 그러나 그녀를 직접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녀의 존재는 일루산과 네몬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으니까.

“뒤처리를 하고 있다.”

“뒤처리라고요?”

여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뒤처리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분’께서.”

“그분의 명을 받은 것은 나다. 현장의 변수를 해결하는 것 또한 나의 권한이다. 너는 너의 역할에 충실해라. 모르가나.”

“······차갑게 구시기는.”

눈웃음을 흘린 모르가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비켜섰다.

“뭐, 그게 당신의 매력이기는 하지만요.”

일루산은 검은 구체 속으로 뛰어들었다.

***

아니스 페이드린은 방문을 밀치며 뛰어든 일루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껏 남편의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곁에 있던 레이븐도 놀란 눈으로 일루산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에요 일루산? 왜 그렇게 다급한 얼굴로······.”

“떠나야 해. 아니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임무 중에 미다크 페이드린이 나타났어. 티스베리 엘프족과 함께.”

아니스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네몬의 계략이야. 서두르지 않으면 당신은 죽고 말아. 세실과 레이븐도 마찬가지야!”

“그, 그러면 어머니는······!”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일루산의 얼굴을 보며, 아니스는 상황을 짐작했다.

“어서 아니스! 곧 네몬이 올 거야!”

아니스는 흔들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일루산을 바라봤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페이드린 혈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던 살기등등한 모습. 당시 페이드린의 수장은 젊은 여성이었다. 미다크는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잦았기에 스스로 수장의 자리를 내놓았다.

전쟁은 치열했다. 그러나 수적 우세를 앞세운 암영 쪽으로 전세는 금세 기울었다. 그때, 미다크가 돌아왔다. 그녀와 함께한 티스베리 엘프족 덕분에 전투는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페이드린의 수장은 일루산과 독대했다.

그리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페이드린의 젊은 수장은 일루산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일루산을 따라 그림자 성으로 향했다. 어린 남동생이 함께였다.

그로부터 수년 뒤, 그녀를 쏙 빼닮은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일루산.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간다고 해도, 우리는 암영의 추적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일루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저는 세실이 평생 도망 다니며 사는 것을 원치 않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죽는 이는 저 하나면 족해요.”

“아니스!”

일루산을 바라보는 아니스의 눈빛은 결연했다.

“단, 당신의 손으로 죽여야 해요. 당신이 내게 직접 심판을 내려야 해요. 세실도 죽이려는 의지를 보이세요. 네몬과 그의 수하들은 분명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그만······.”

“그리고 레이븐이 세실과 함께 성을 떠나는 거예요.”

“그만해!”

아니스가 일루산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해요. 당신이 저를 죽이면, 그리고 세실마저 죽이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가문의 그 누구도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가주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죠. 당신의 위에 있는 자도 납득할 거예요.”

누구도 말한 적 없었지만, 아니스는 ‘그림자 군주’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당신은 블레오파드의 가주로 남아야 해요. 그래야 세실을 지켜줄 수 있어요. 네몬은 결코 세실을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더욱이 다른 피가 섞인 세실을 증오하는 이는 네몬만이 아니잖아요. 그들로부터 세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아니스가 일루산의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네요. 알아요.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지,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아니스가 미소 지었다.

“세실이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이어받아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 아이는 겉모습만 저를 닮았지 속은 당신과 똑같은걸요.”

미소 짓던 아니스의 얼굴에 슬픔이 차올랐다.

“세실에게 일부러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야 가문의 다른 이들이 페이드린의 피가 섞인 세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움켜쥔 일루산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손을 아니스가 쥐었다.

“당신은 세실과 레이븐을 강한 전사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의 힘을 숨겨주었어요.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죠.”

아니스를 보는 일루산의 눈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가 아니스를 품에 안았다.

“······고마워요. 일루산.”

고개를 떨군 레이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일루산과 아니스는 서로를 안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을 때, 일루산의 눈빛은 평소와 같았다.

“레이븐.”

“네.”

“세실은 곧 이곳으로 달려올 테지. 준비하게. 그리고.”

일루산이 잠시 말을 끊었다.

“세실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게.”

레이븐의 눈이 흔들렸다.

멍하니 일루산을 마주 보던 레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레이븐은 말없이 아니스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방을 떠났다.

일루산이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크쉬.”

그 말과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가 창 안으로 내려앉았다.

“네몬이 보이면 신호하라. 곧 나타날 것이다. 그 뒤, 레이븐의 탈출을 돕는다.”

“존명.”

크쉬가 사라졌다. 창을 닫는 일루산의 얼굴에 붉은빛이 내려앉았다. 오늘따라 석양빛은 지독하게도 붉었다.

멀리서 자그만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뭐가 그리 기쁜지 평소보다 경쾌한 발걸음.

창가로 걸어간 아니스가 일루산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종말의 임박을 감지한 입술이 소리 없이 되뇌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일루산과 세실리아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어.

“흐흑······.”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루산이 아니스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창밖에서 미세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때마침 돌아왔구나.

네몬.

귀여운 발소리는 이제 지척에서 들렸다. 아니스는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떨었다. 일루산의 몸도 공명하듯 함께 떨렸다. 아니스가 일루산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세실의 발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일루산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졌다.

콰득.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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