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의 이벤트로 시작된 축제의 장.
모두가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와중에도 맘 놓고 즐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함?”
“내 말이 그 말이야. 아… 이번엔 퍼클하나 했는데.”
“에이, 그래도 구라는 치지 말자. 한 대도 못 때렸는데 퍼클은 무슨.”
“넌 누구 편이냐?”
“너 이 새끼, 묘지기가 시키드나?”
바로 ‘피자는역시하와이안’ 공대를 비롯하여, 묘지기라는 레이드 보스의 퍼스트 클리어를 위해 달리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묘지기는 정복해야 할, 그러나 도저히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거대한 산 같은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부조리라는 단어를 형상화하여 캐릭터로 만들면 그게 바로 묘지기일 거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묘지기의 공략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넘어야 할 산이 높을수록 넘었을 때의 성취감이 크기 때문이었다.
“레이드가 어려워야 재밌지. 쉬우면 그게 레이드냐?”
동료들과 힘을 합쳐 높은 산을 넘는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물론 그에 따라올 명예가 탐나는 것도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자그마한 빈틈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 생각엔 묘지기가 어려운 건 현실적인 보스라서야. 다른 말로 하면 MMORPG의 보스답지 않아서고.”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현실이라면 보스가 사람들 머리 위에 ‘얘 때릴게요!’하고 표식을 찍어줄까?”
“어… 아니지?”
“그러니까 우리도 현실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데미지받는 걸 감수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맞아야 한다는 마인드로. 당연히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제아무리 현실적인 실리아 온라인이라고 해도 지금까지의 보스들은 MMORPG의 규칙을 따랐다.
적개심이 가장 높은 플레이어를 공격하고, 정해진 순서로 패턴을 이행하거나 정해진 패턴 중 무작위로 하나를 꺼내 공격한다는 규칙을.
물론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서 플레이어 개인의 능력도 배제할 순 없었다.
그러나 묘지기는 다르다.
그동안 보스들을 얽매던 시스템의 사슬을 벗어던진 존재.
묘지기가 데모닌스의 오점 취급을 받으며 플레이어들에게 욕을 먹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좋든 싫든, 그런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선 묘지기와 똑같이 기존에 가진 상식을 탈피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힐러들은 굳이 힐 주려고 하지 말고 최대한 뒤에 있어. 탱딜은 피 깎이면 힐러들한테 가서 힐받고. 위험할 것 같으면 쉴드만 넣어줘. 묘지기가 온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탱커들은 쫄지 말고 싸워. 목숨 걸고 붙잡는다는 느낌으로 물고 늘어지라고. 혼자 몸 사려서 살아봤자 어차피 다른 사람 다 죽으면 끝이잖아. 힐러 쪽으로 가면 바로 붙어 주고.”
“마지막으로 딜러들, 탱커가 붙잡고 있을 때 기회 보고 알아서 때려. 아무렇게나 공격하지 말고 서로 합을 맞춰서 피할 공간을 없앤다는 느낌으로 공격해. 언제든지 공격이 날아올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잘만 쓰던 시스템의 틀에서 벗어나 실전 같은 전투를 치르려고 하니 온갖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힐이 들어오길 기다리다가 사망.
보호막을 믿고 버티다가 사망.
억지로 쫓아가려다 균형을 잃으며 사망.
사망, 사망, 사망.
그나마 나갔던 진도가 퇴보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커뮤니티 속 군중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비웃었다.
그러나 두 걸음 전진을 위한 한 걸음 후퇴라 했던가.
“보였다, 너의 공격 패턴…! 강강강강강! 으아아, 살려줘요!”
챙!
딜러 중 한 명이 처음으로 묘지기의 검을 받아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어지는 검격에 곧바로 죽긴 했지만 무척 고무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네가 인간이 되었구나….”
“딜도 못 넣고 죽던 검가촉천민이 밥값을 하다니. 이 공대장은 이제 여한이 없다….”
감격에 겨운 공대장은 그날 저녁, 매우 중요한 날에 마시려고 아껴 왔던 와인을 땄다.
망나니처럼 날뛰다 죽기만 하던 검가촉천민이 사람이 됐는데 이날만큼 중요한 날이 또 있을까.
공격에 익숙해지고 몸을 움직이는 게 더 부드러워졌다.
피자는역시하와이안 공대와, 그들과 정보를 공유하던 다른 공대들이 활짝 웃었다.
지지부진하던 진도를 드디어 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잘못 만든 보스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자유로운 실리아 온라인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보스인 것 같기도 해요.”
급기야 수십 번씩 자신들을 썰어 넘긴 묘지기를 미화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행복회로가 얼마나 눈부시게 불타오르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불꽃이 어찌나 눈부셨는지,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저러다 회로가 다 타서 없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때, 명예 소방관 저니가 나타났으니.
쏴아아아!
“….”
“….”
냅다 찬물을 끼얹어 버린 저니 덕에 그들의 작고 소중한 행복회로는 지켜질 수 있었다.
“아이 씨, 뭐가 문제야? 저쪽은 저쪽대로 내버려두고, 우리는 그냥 계속 머리 박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뭐, 레이드 안 할 거야?”
침울해진 분위기 속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럼에도 이들을 감싼 침울한 분위기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묘지기가 보인 약간의 인간적인 모습.
말이 통하는 저니를 살리고 뒤돌아가던 모습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 뒤를 급하게 따라간 저니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묘지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모습.
그 인간적인 모습에 커뮤니티가 들끓은 것이다.
무자비한 레이드 보스가 아니라 인간적인 NPC였다는 것부터 시작해 급기야 묘지기 레이드에 도전하는 이들을 폭력적인 사람으로 모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눈치를 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적이라고 해도 어차피 레이드 보스 아닌가.
클리어에 성공한다고 한들 다시 살아날 텐데 왜들 그리 호들갑인지.
“우리가 개 털리고 있을 때는 별말 안 했으면서!”
“우린 사람도 아니냐!”
억울함이 샘물처럼 퐁퐁 솟았지만 아무리 큰 샘이라고 해도 드넓은 바다 앞에선 한 방울의 물일 뿐.
심지어 외국 쪽 커뮤니티도 난리인 마당에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한 번에 한 파티밖에 입장하지 못 하는데, 방송을 보고 묘지기를 보러 산을 오르는 사람까지 생겨서 트라이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
사실 여론보다는 그쪽이 더 문제였다.
“차라리 잘 됐어.”
추이를 지켜보던 공대장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원래 했던 대로 계속 머리 박아도 깰 확률이 희박하긴 했잖아. 말이 희박이지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었고.”
의욕을 잃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할 수 있다고 최면을 걸었지만 클리어 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애써 외면하던 진실을 언급하자 모든 이들의 눈이 공대장에게 쏠렸다.
“우리도 대세에 편승하는 거야.”
“포기하자는 말이야?”
“아니. 잠시 쉬자는 거야. 일주일 정도 쉬면서 정보도 수집하고, 컨트롤도 갈고 닦고. 검술서를 찾아보거나 검도 학원을 잠깐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네. 정 귀찮으면 소울류 게임이라도 하든가.”
“능력 향상을 꾀하라는 말이구나.”
“그렇지. 만약 그 사이에 묘지기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고.”
“그런 거라면 뭐….”
“만화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네. 이거 완전 강적을 만나 꺾이고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그런 클리셰 아니야?”
포기 선언인 줄 알고 날카로워졌던 눈매들이 다시 유순해졌다.
잠시 식은땀을 흘렸던 공대장이 짐짓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공대들에도 말해 놓을게. 잠깐만 쉬어 가는 건 어떠냐고.”
“싫다고 하면 어떡해?”
“달려서 클리어할 수 있으면 클리어해 보든가.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클리어했겠지. 그리고 다른 공대들도 우리랑 상황이 비슷할 거라 웬만해선 거절 안 할 거야.”
과연, 공대장의 말대로 선두를 달리는 공대 중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공대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함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기적의 대통합.
피 튀기는 승부욕은 잠시 접어두고 화합의 장이 열렸으니, 이것이 후에 ‘하와이안 피자 회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평화 회담의 시초였다.
* * *
“끄악!”
“왜, 왜 우리는?!”
사도의 무리가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무어라 외치며 날아간다.
그래봤자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절벽을 향해 날릴 순 없으니 그들이 올라온 산길을 향해 집어 던지니 애처로운 메아리와 함께 나무들 사이로 쏙 사라진다.
“방향 좋고, 힘 좋고.”
골프였다면 홀인원이 아니었을까 싶은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마지막 사도를 배웅했다.
어쩌면 나는 골프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몰라.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재능이 있었던 사실조차 몰랐던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아아, 주입식 교육의 폐해로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스러지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으음… 그래도 이 세계보단 나은 거 같기도.”
아니, 확실히 낫지.
한국도 온갖 문제가 다 터지는 나라기는 했지만 적어도 매일 목숨 걱정하면서 살진 않았잖아.
이 세계는 주입식 교육은커녕 그냥 교육조차 받지 못 하고 단검을 쥐는 법부터 익히는 애들이 한가득인걸.
노오오옾으신 분들의 자녀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만.
음, 어쨌거나 이걸로 이번 디펜스는 끝났다.
검에 간 금이 더 커진 것 같아서 오늘은 검보단 체술 위주로 싸워 봤는데, 몸을 더 움직여서 그런지 이게 또 스트레스 해소 효과가 쏠쏠하네.
먼지를 털듯 손을 탁탁 털어내고 있을 때 산길 밑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하아… 하아… 저, 저기 있다…!”
새 웨이브인가.
전투를 준비하던 때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안녕!”
“…?”
그 목소리는 분명, 저니인가 뭔가 하는 여자의 것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제법 자연스러운 발음으로 인사를 건넨 저니가 헉헉대며 내 앞에 섰다.
친한 친구 집이라도 찾아온 것 같은 자연스러운 작태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