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모의 그림자가 마을을 습격한 이후 이틀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난 병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내 눈앞에는 숟가락을 든 다은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카나, 아앙~”
“….”
“팔 떨어지겠다. 빨리, 아~”
“내가, 먹을 수, 있다고.”
“환자가… 말대꾸…?!”
“…에휴.”
“어, 어어, 이러다 흘리겠어! 카나가빨리받아먹지않으면하얀이불에새빨간스튜를흘려버릴테고그러면세탁해주시는분이엄청나게힘들어할텐데설마매정하게외면하겠어에이그럴리가카나가얼마나상냥한-”
“아-”
…이러다 귀에서 피 나겠네.
마지못해 입을 열자 그제야 다은의 입이 다물어졌다.
목적을 달성한 게 기쁜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다은.
나는 잘게 썰린 고기가 든 스튜를 우물우물 씹다가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내 생각엔 다은은 검사보다 음유시인이 나을 거 같아.”
“어? 그래? 하긴, 내가 입담이 좀 좋긴 해. 노래 실력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음….”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본인이 만족한 거 같으니까 그런 거로 하자.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기 새처럼 모이를 받아먹는 신세라니.
다시 한번 다은이 내미는 스튜를 받아먹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내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틀 전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이따금씩 올라오는 은은한 고통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수발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날 보는 일행의 시선은 꼭 날개가 꺾여 추락한 새를 보는 듯했다.
어제는 잠깐 산책이라도 갈까 해서 문을 나섰더니.
‘잠깐만! 카나, 어디 가는 거야?’
‘답답해. 바람 쐬고 올 거야.’
‘걷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창문 열어줄 테니까 그걸로 참자. 알겠지?’
‘싫어.’
‘…하는 수 없지. 셀린, 부탁해요.’
‘맡겨주세요.’
‘?!’
…성법까지 써가면서 막아 세우더라.
마음먹으면 뚫고 나갈 순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얌전히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라고 있는 성법이 아닐 텐데 말이야.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흐음… 호오… 그렇군….
‘…혼잣말은 제발 혼자만 들리게 하면 안 될까.’
-싫다.
‘자다 일어났다며. 빨리 다시 잠이나 자러 가.’
-잘 자고 있던 나를 깨운 건 네가 아닌가. 용건이 끝나자마자 가라고 하다니. 너무하는군.
몸이 조금 회복되자마자 귀신같이 눈치채고 귀찮게 하는 도마뱀이 있었으니까.
가호를 발동하기 싫었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드래곤이라면 그래도 조금 진중한 면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아는 드래곤은 저렇지 않은데.
-편견이다.
‘응. 널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그것도 편견이다. 내가 아무한테나 이런 모습을 보이는 줄 아나? 네 영혼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호의를 보이는 거다.
‘…으.’
…기분 나빠.
저렇게 말하면 ‘아이고 영광입니다!’라고 하면서 기뻐할 줄 아나?
도마뱀의 호의를 샀다고 해서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크나큰 오산이다.
뭐… 대충 그렇게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목마르다고 하면 물을 대령하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진수성찬…까지는 아니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대령하고.
무엇보다, 푸릇푸릇한 풀때기가 없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역시 편식하는 애들한테는 눈에 안 보이게 잘라주는 게 최고지.”
“응?”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무튼, 불편하냐 편하냐를 물으면 편하긴 했지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척척 대령해 주는데 불편할 리가.
다만 편한 것과 답답한 것은 별개의 이야기잖아.
“후우….”
얌전히 누워있던 게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내 예상보다 회복이 빨랐다.
그러니까 딱 하루.
많아도 이틀만 더 참자.
속으로 다짐하며 얌전히 다은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 * *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셀린을 보는 다은.
“…어때요?”
“맛있네요.”
“후흐, 그렇죠?”
셀린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나오자 비로소 안심한 다은이 기고만장한 웃음을 지었다.
최근 며칠 동안 다은은 일행의 식사를 도맡아서 준비했다.
마족들의 손을 거치면 식재와 음식에 마기가 깃들게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는, 사실 변명이지.’
요리를 할 줄 아는 게 마족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은의 옆에는 셀린이 있었으니까.
품이 별로 들지 않는 요리라면 셀린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다은이 번거로운 일을 자처한 이유는.
‘귀여워…!’
그녀가 만든 음식을 오물오물 먹는 카나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통통한 볼살이 움직이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는 걸 볼 때마다 다은은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기억을 되새기며 헤실거리던 다은의 표정이 문득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구나….”
카나가 건강을 회복한 건 당연히 좋다.
아프다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다은은 카나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병상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도, 손수 먹여주는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평상시에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카나는 그래 보이지 않아도 은근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니까….’
아앙~ 같은 짓을 했다간 아악!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실, 카나가 지금까지 다은의 고집을 들어준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그 일 때문이겠지.’
크루모의 그림자를 처리하고, 드래곤의 마나에 이끌려 온 몬스터 무리까지 정리한 그날.
다은과 카나는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은은 카나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난감하게 한 것에 대해 사과했고.
카나는 다은을 홀로 방치해서 위험한 일을 겪게 했다는 말과 함께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무슨 오해냐고 물어도 그것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서 미처 알 수는 없었지만.
며칠 동안 자신의 억지에 어울려 주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마음에 많이 걸린 모양이라고 다은은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한 걸까.”
다은은 그것이 궁금하면서도 카나에게 물어보진 않았다.
난감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는 작은 의문을 홀로 조용히 삭였다.
“드디어 내일이네요.”
다은을 도와 식기를 준비하던 셀린이 말했다.
“네? …아, 락시아로 가는 거 말하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참, 그랬지….
락시아에 관한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다은은 카나가 아티샤와 함께 배는 어떻고 일정은 어떻고 대화를 나누던 것을 떠올렸다.
더불어 당장 내일 출발하기로 했다는 것도.
“아직도 많이 긴장되세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다은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악명 높은 마대륙 락시아에 간다는 말을 카나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긴장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말하는 마족들의 마을, ‘쓰레기장’에 도착해 며칠 동안 마족들과 어울려 지내보니 세간에 알려진 마족의 이미지와 실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족은 포악한 마물을 다루고 인간을 산 채로 뜯어먹는 괴물이 아니었다.
뿔이 달려 있고 피부색이 다를 뿐이지, 그들 또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순박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듣는 것이 모두 정답은 아니다.
무언가에 대해 알기 위해선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느낀 다은은 더 이상 락시아가 두렵지 않았다.
“락시아도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일 테니까요.”
다은은 부엌 한쪽에 놓인 한 송이의 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은 마기 때문에 시들었지만, 한때는 화사한 빛을 뽐냈었지.
꽃을 내밀며 구해준 보답이라고 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은의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런데, 제가 버틸 수 있겠죠?”
하지만 불안한 건 여전해서.
게다가 최근에 있었던 습격 때문에 주제를 알게 된 다은은 쉬이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수많은 마족이 그녀를 칭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괜찮을 거예요.”
“으, 으음….”
어차피 다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따라가는 것밖에.
게다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걸. 자신만만하게 약속해 놓고 무섭다고 도망칠 순 없잖아.’
마도구와 셀린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다소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다은이 그릇에 스튜를 퍼담았다.
락시아에 가는 건 가는 거고, 식사는 든든히 해야지.
다은은 야채를 아주 잘게 썰어서 넣은 스튜를 들고 카나의 방으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 출발이면 내일부터 본업으로 돌아가야겠구나.
카나를 간호한다는 이유로 내팽개친 방송을 켤 때가 다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쉴까?’
팬카페 등을 통해 방송을 켰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는 다은이 망설였다.
갑작스럽게 방송을 끈 데다가 며칠 동안 안 켰으니 아주 난리도 아니겠지.
마음속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솔직히 지금까지 열심히 달렸잖아. 조금만 더 쉬어도 괜찮을걸?’
그에 질세라 천사도 속삭였다.
‘이왕 쉬는 김에 불이 완전히 꺼졌을 때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천사 맞나?
자세히 보니 날개가 까맣게 물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달콤한 유혹이 다은을 흔들었지만 결국 그녀는 유혹을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
“일단 사정부터 설명하고….”
과거의 나야, 도대체 왜 그랬니.
‘하지만 아파하는 걸 보여주고 싶진 않았는걸.’
그건 절대로, 우스운 일이 아니니까.
멍청한 년, 무책임한 년….
다은은 생각나는 온갖 말들로 과거의 자신을 씹어대며 착잡한 마음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