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01

햇빛 적당하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네.


“…며칠이나 쉬어서 정말로 미… 미… 미…친놈들아! 너희가 긁어서 그런 거잖아! 너희가 하도 약하다고 놀려서 수련하고 왔다, 어쩔래?! 솔직히 최근 들어 방송 많이 했잖아. 솔직히 말이야, 몇 주 동안 잠잘 때 빼고 하루 종일 켜고 있었는데 좀 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래 안 그래? 어? 그러냐고 안 그러냐고! 빨리 그렇다고 말해!”

누군가한테는 썩 좋은 날이 아닌 것 같지만.

다은이 일행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열을 올리며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꽤나 크게 떠들고 있는데도 아무도 의문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면 저쪽 세상에 관련된 말인가 본데.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가 결국 꼬리를 내리는 게 참으로 다은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손을 한데 모으고 물구나무를 서는 행동은 에델이 만든 필터에 걸리지 않는지, 다은의 기행은 셀린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샀다.

“…저니 님?”


“학, 흐아악…. …네? 불렀어요?”


“뭐 하시는 건가요?”


“…요즘 사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운동이에요.”


“그,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걸 왜…?”

“읏차…! 휴우, 요즘 몸이 좀 무뎌진 것 같아서요. 이게 또 허리 근육과 유연성, 균형 감각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거든요. 셀린도 해보실래요?”


“음, 죄송하지만 사양할게요. 몸 쓰는 일은 자신 없어서요.”


“흐으음….”


“…저니 님?”

“제가 보기에도 셀린은 안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셀린한테 그랜절 해 달라고 하면 만 원’은 무슨. 내가 너희 속셈 모를 거 같아? 크루모 뭐시기랑 싸운 건 클립으로 올려주기로 했고, 시키는 대로 그랜절도 했으니까 이제 끝! 하여튼 음란마귀들 같으니….”

“참 특이한 사람이야….”

“응, 동감이야.”

아티샤의 말에 나도 동의를 표했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다은이 특이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지도 못했을 테니까.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닌 건 아티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은을 보는 아티샤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니 덕분에 인간들에 대한 적대감이 꽤 줄었어….”

오랜 기간 이어진 마족과 인족의 전쟁.

2차 종족 전쟁은 서로를 향한 강한 적대감을 남겼다.

비록 빌미를 제공한 것은 마족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생존’이라는 사정이 있었기에.

자신들을 거부하는 인족을 이해하면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그들을 적대해야 했다.

특히 전쟁 중에 태어나거나, 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마족들은 전 세대 마족들처럼 복잡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 인간들을 향해 강한 적대감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크루모의 그림자가 마을을 습격한 날.

그들은 보게 되었다.

그들을 위해 몸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한 인간을.

일면식도 없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치는 영웅적인 면모를.

물론 그것만으로 지금까지 쌓인 적대감을 불식시키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착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서서히 나아지겠지….”

아티샤는 인간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신생 마족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증오의 굴레를 끊는다, 라.

…글쎄. 나는 모르겠네.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끊는다고 한들 저쪽은 여전히 굴레에 얽매여 있을 것 같은데.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내 일도 아닌데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아티샤의 말에 딴지를 거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준비는 다 됐어?”

“완벽해….”

락시아까지 타고 갈 배, 물자, 항로 등….

아티샤는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준비했다며 말하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운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네가 하는 거고?”

“응…. 배를 몰 수 있는 사람 중에서 나만큼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흐음.”

“왜…?”

“아니야.”

아티샤의 눈 밑에 길게 늘어진 다크서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괜찮겠지.

여차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깨우면 그만이고.

“…?”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았는지 아티샤가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제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결국 이상을 찾지 못한 그녀가 찜찜한 얼굴을 했다.

“이제 와서 물어보긴 늦은 거 같긴 하지만…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

“충분히 많이 쉬었어. 더 쉬면 오히려 근육이 퇴화할걸.”

“그건 그래….”

“네가 동의하면 안 되지.”

나를 병상에 가둬둔 범인 중 하나면서, 그런 적 없다는 양 내 말에 동의하는 꼴이 얄미워서 눈을 흘겼다.

“나는 원한을 잊지 않는 편이야. 알아 둬.”

“…그건 좀 무서울지도….”

아티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잠깐 무서워하다가 금세 방실 웃으며 안아오는 누군가와 다르게 아티샤의 반응은 매우 정석적이었다.

“카나 잡았다!”

“…에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 누군가가 다가와 나를 덥석 안아 올렸다.

나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내려.”

“싫~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며. 얌전히 언니에게 안겨 있도록! 히히, 부드럽다.”

“….”

머리에 따뜻한 온기가 와닿았다.

내 머리카락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비벼대는지.

이게 아빠가 그렇게 원하던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라면 난 아마 평생을 가도 여자아이 같아지는 건 무리일 거야.

계속 안고 있어봤자 힘든 건 다은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에서 힘을 쭉 빼고 늘어졌다.

그러자 다은이 또 좋다고 얼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 있으니까 고양이 같아.”

“고양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계획대로라면 진작 점검을 마치고 출항해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것은 다은의 갑작스러운 물구나무서기 쇼 때문.

나름 재밌게 구경했으니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끝났으면 이제 출발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도와줄 수 있는데.

돛대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항해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

나지막하게 덧붙이자 다은이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

그러고는 나를 안아 든 그대로 냉큼 배 위에 올라탔다.

아티샤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배는 상당히 컸다.

‘이런 큰 배에 고작 네 명만 탄다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낭비니 뭐니 따지는 게 아니라, 네 명만으로 이 큰 배를 몰 수 있을까 하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 크기의 배를 몰려면 손이 꽤 많이 들어갈 거 같은데.

‘할 수 있으니까 준비한 거겠지.’

설마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만으로 이런 배를 준비했을까.

“항해라면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느새 따라 올라온 아티샤가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바닷가 근처에 살면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거든…. 고기를 낚으려면 바다로 나가야 하니까…. 물론 그거랑 별개로 나는 항해하는 걸 좋아해서 익혔어….”

“오, 그래요? 뭐, 낚시가 취미라던가… 그런 거예요?”

“아니… 그냥 배를 모는 게 좋은 거야…. 파도에 출렁이면서 락시아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들거든….”

“어….”

“잘됐네. 그렇게 원하는 락시아에 갈 수 있게 돼서.”

“뭐… 그렇지…. 비록 땅을 디딜 순 없겠지만 말이야….”

어물거리는 다은의 말을 낚아채서 말하자 아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셀린까지 배에 오르고, 빼먹은 게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배에 이상이 없다는 것까지 꼼꼼하게 확인을 마친 아티샤가 돛을 활짝 펴고 해저에 박아놨던 닻을 끌어올렸다.

“끄응…차….”

“도와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듣는 이까지 힘 빠지게 만드는 기합 소리에 다은이 슬그머니 다가가 물었지만 아티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기합만 저렇지 닻을 감아올리는 모습은 그다지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항해가 취미라는 말을 괜히 한 건 아닌지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출항 준비를 마친 아티샤가 이마께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그러면, 출항해 볼까….”

“노는 안 저어도 돼요?”

“젓고 싶어…? 자….”

턱.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다은이 아티샤가 떠넘긴 노를 한쪽 팔로 들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한쪽 팔에 안아 든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을 폈다.

“그래도, 카나와 알콩달콩 노를 젓는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내가 왜?”

나는 한다고도 안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그녀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이러기야?”

“‘이러기야?’는 무슨. 나 같은 고급 인력을 노 젓는 데 써먹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오리배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라고, 다은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우울한 낯빛을 한 다은을 한심하게 올려다보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노를 확 낚아채서.

휘익.

저 멀리 내던졌다.

“아앗!”

“이런 건 필요 없어.”

애초에 아티샤도 직접 노를 저어 갈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다은을 놀리려고 한 말이겠지.

은근히 웃음을 참는 얼굴을 보면 확실했다.

살짝 눈치를 주자 아티샤는 표정을 다듬고는 두 손을 크게 펼쳤다.

고오오-

그녀의 활짝 편 두 손과 멀쩡한 한쪽 뿔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마기는 이윽고 세찬 돌풍이 되어 돛에 부딪쳤다.

“우왓?!”

급격하게 빨라진 속도에 다은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일순간 힘이 꽉 들어간 다은의 팔이 내 복부를 콱 조였다.

정말로 숨이 막힌 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압박에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힌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켁.”

“아, 미안…!”

“…미안하면 이제 좀 내려놓지 않을래?”

“힝, 언니가 싫어진 거야?”

“싫어질 거 같으니까 내려놔.”

나는 입술을 삐죽이는 다은에게서 풀려나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다.

팔을 하늘로 쭉 펴며 뻐근한 몸을 풀고 있으니 다은이 흐뭇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아니. 그냥, 스트레칭하는 게 귀여워서.”

“…?”

별걸 다 가지고 귀엽다고 하네.

익숙한 주접을 무시하며 뻐근한 몸을 푸는 걸 이어 나갔다.

결국, 스트레칭을 끝마칠 때까지 다은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Chapter 101

Chapter 101

햇빛 적당하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네. “…며칠이나 쉬어서 정말로 미… 미… 미…친놈들아! 너희가 긁어서 그런 거잖아! 너희가 하도 약하다고 놀려서 수련하고 왔다, 어쩔래?! 솔직히 최근 들어 방송 많이 했잖아. 솔직히 말이야, 몇 주 동안 잠잘 때 빼고 하루 종일 켜고 있었는데 좀 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래 안 그래? 어? 그러냐고 안 그러냐고! 빨리 그렇다고 말해!” 누군가한테는 썩 좋은 날이 아닌 것 같지만. 다은이 일행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열을 올리며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꽤나 크게 떠들고 있는데도 아무도 의문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면 저쪽 세상에 관련된 말인가 본데.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다가 결국 꼬리를 내리는 게 참으로 다은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물구나무를 서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손을 한데 모으고 물구나무를 서는 행동은 에델이 만든 필터에 걸리지 않는지, 다은의 기행은 셀린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샀다. “…저니 님?” “학, 흐아악…. …네? 불렀어요?” “뭐 하시는 건가요?” “…요즘 사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운동이에요.” “그,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걸 왜…?” “읏차…! 휴우, 요즘 몸이 좀 무뎌진 것 같아서요. 이게 또 허리 근육과 유연성, 균형 감각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거든요. 셀린도 해보실래요?” “음, 죄송하지만 사양할게요. 몸 쓰는 일은 자신 없어서요.” “흐으음….” “…저니 님?” “제가 보기에도 셀린은 안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셀린한테 그랜절 해 달라고 하면 만 원’은 무슨. 내가 너희 속셈 모를 거 같아? 크루모 뭐시기랑 싸운 건 클립으로 올려주기로 했고, 시키는 대로 그랜절도 했으니까 이제 끝! 하여튼 음란마귀들 같으니….” “참 특이한 사람이야….” “응, 동감이야.” 아티샤의 말에 나도 동의를 표했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다은이 특이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지도 못했을 테니까.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닌 건 아티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은을 보는 아티샤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니 덕분에 인간들에 대한 적대감이 꽤 줄었어….” 오랜 기간 이어진 마족과 인족의 전쟁. 2차 종족 전쟁은 서로를 향한 강한 적대감을 남겼다. 비록 빌미를 제공한 것은 마족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생존’이라는 사정이 있었기에. 자신들을 거부하는 인족을 이해하면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그들을 적대해야 했다. 특히 전쟁 중에 태어나거나, 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마족들은 전 세대 마족들처럼 복잡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 인간들을 향해 강한 적대감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크루모의 그림자가 마을을 습격한 날. 그들은 보게 되었다. 그들을 위해 몸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한 인간을. 일면식도 없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치는 영웅적인 면모를. 물론 그것만으로 지금까지 쌓인 적대감을 불식시키기엔 무리가 있었으나. “착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서서히 나아지겠지….” 아티샤는 인간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는 신생 마족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증오의 굴레를 끊는다, 라. …글쎄. 나는 모르겠네.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끊는다고 한들 저쪽은 여전히 굴레에 얽매여 있을 것 같은데.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내 일도 아닌데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아티샤의 말에 딴지를 거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준비는 다 됐어?” “완벽해….” 락시아까지 타고 갈 배, 물자, 항로 등…. 아티샤는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준비했다며 말하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운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네가 하는 거고?” “응…. 배를 몰 수 있는 사람 중에서 나만큼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흐음.” “왜…?” “아니야.” 아티샤의 눈 밑에 길게 늘어진 다크서클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괜찮겠지. 여차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깨우면 그만이고. “…?”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았는지 아티샤가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제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결국 이상을 찾지 못한 그녀가 찜찜한 얼굴을 했다. “이제 와서 물어보긴 늦은 거 같긴 하지만…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 “충분히 많이 쉬었어. 더 쉬면 오히려 근육이 퇴화할걸.” “그건 그래….” “네가 동의하면 안 되지.” 나를 병상에 가둬둔 범인 중 하나면서, 그런 적 없다는 양 내 말에 동의하는 꼴이 얄미워서 눈을 흘겼다. “나는 원한을 잊지 않는 편이야. 알아 둬.” “…그건 좀 무서울지도….” 아티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잠깐 무서워하다가 금세 방실 웃으며 안아오는 누군가와 다르게 아티샤의 반응은 매우 정석적이었다. “카나 잡았다!” “…에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 누군가가 다가와 나를 덥석 안아 올렸다. 나는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덤덤하게 말했다. “내려.” “싫~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며. 얌전히 언니에게 안겨 있도록! 히히, 부드럽다.” “….” 머리에 따뜻한 온기가 와닿았다. 내 머리카락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비벼대는지. 이게 아빠가 그렇게 원하던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라면 난 아마 평생을 가도 여자아이 같아지는 건 무리일 거야. 계속 안고 있어봤자 힘든 건 다은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에서 힘을 쭉 빼고 늘어졌다. 그러자 다은이 또 좋다고 얼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 있으니까 고양이 같아.” “고양이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준비됐으면 출발하자.” 계획대로라면 진작 점검을 마치고 출항해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것은 다은의 갑작스러운 물구나무서기 쇼 때문. 나름 재밌게 구경했으니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끝났으면 이제 출발해야 하지 않겠어? “아니면,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도와줄 수 있는데. 돛대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항해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 나지막하게 덧붙이자 다은이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 그러고는 나를 안아 든 그대로 냉큼 배 위에 올라탔다. 아티샤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배는 상당히 컸다. ‘이런 큰 배에 고작 네 명만 탄다고?’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낭비니 뭐니 따지는 게 아니라, 네 명만으로 이 큰 배를 몰 수 있을까 하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 크기의 배를 몰려면 손이 꽤 많이 들어갈 거 같은데. ‘할 수 있으니까 준비한 거겠지.’ 설마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만으로 이런 배를 준비했을까. “항해라면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느새 따라 올라온 아티샤가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바닷가 근처에 살면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거든…. 고기를 낚으려면 바다로 나가야 하니까…. 물론 그거랑 별개로 나는 항해하는 걸 좋아해서 익혔어….” “오, 그래요? 뭐, 낚시가 취미라던가… 그런 거예요?” “아니… 그냥 배를 모는 게 좋은 거야…. 파도에 출렁이면서 락시아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으면 그리운 느낌이 들거든….” “어….” “잘됐네. 그렇게 원하는 락시아에 갈 수 있게 돼서.” “뭐… 그렇지…. 비록 땅을 디딜 순 없겠지만 말이야….” 어물거리는 다은의 말을 낚아채서 말하자 아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셀린까지 배에 오르고, 빼먹은 게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배에 이상이 없다는 것까지 꼼꼼하게 확인을 마친 아티샤가 돛을 활짝 펴고 해저에 박아놨던 닻을 끌어올렸다. “끄응…차….” “도와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듣는 이까지 힘 빠지게 만드는 기합 소리에 다은이 슬그머니 다가가 물었지만 아티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기합만 저렇지 닻을 감아올리는 모습은 그다지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항해가 취미라는 말을 괜히 한 건 아닌지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출항 준비를 마친 아티샤가 이마께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그러면, 출항해 볼까….” “노는 안 저어도 돼요?” “젓고 싶어…? 자….” 턱.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다은이 아티샤가 떠넘긴 노를 한쪽 팔로 들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한쪽 팔에 안아 든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을 폈다. “그래도, 카나와 알콩달콩 노를 젓는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내가 왜?” 나는 한다고도 안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그녀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이러기야?” “‘이러기야?’는 무슨. 나 같은 고급 인력을 노 젓는 데 써먹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오리배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라고, 다은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우울한 낯빛을 한 다은을 한심하게 올려다보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노를 확 낚아채서. 휘익. 저 멀리 내던졌다. “아앗!” “이런 건 필요 없어.” 애초에 아티샤도 직접 노를 저어 갈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다은을 놀리려고 한 말이겠지. 은근히 웃음을 참는 얼굴을 보면 확실했다. 살짝 눈치를 주자 아티샤는 표정을 다듬고는 두 손을 크게 펼쳤다. 고오오- 그녀의 활짝 편 두 손과 멀쩡한 한쪽 뿔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마기는 이윽고 세찬 돌풍이 되어 돛에 부딪쳤다. “우왓?!” 급격하게 빨라진 속도에 다은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일순간 힘이 꽉 들어간 다은의 팔이 내 복부를 콱 조였다. 정말로 숨이 막힌 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압박에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힌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켁.” “아, 미안…!” “…미안하면 이제 좀 내려놓지 않을래?” “힝, 언니가 싫어진 거야?” “싫어질 거 같으니까 내려놔.” 나는 입술을 삐죽이는 다은에게서 풀려나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다. 팔을 하늘로 쭉 펴며 뻐근한 몸을 풀고 있으니 다은이 흐뭇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아니. 그냥, 스트레칭하는 게 귀여워서.” “…?” 별걸 다 가지고 귀엽다고 하네. 익숙한 주접을 무시하며 뻐근한 몸을 푸는 걸 이어 나갔다. 결국, 스트레칭을 끝마칠 때까지 다은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