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 발동의 후유증으로 병상에 누운 며칠.
그리고 락시아로 항해하는 며칠.
나는 마족의 의사소통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나를 병상에 눕게 했던 가호의 후유증은 이제 아주 미세하게 남아서 몸을 움직이는 덴 무리가 없었으나, 은근히 갉작갉작 신경을 긁어댔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게 슬슬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말 전체를 이해하는 건 여전히 힘들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사과가 정말 싸고 맛있네요.’라는 말을 했다 치면 나에게는 그 말이 ‘사과, 싸다, 맛있다’라고 전해진다.
다소 하자가 있는, 맥이 툭툭 끊어진 단편적인 정보였지만.
‘의도가 워낙 직설적으로 전해져서 뜻을 이해하는 덴 충분하거든.’
그래서 대화하는 것보다 더 이해하기 쉬울 때도 있었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끼워 맞추는 거야 맥락을 읽을 수 있는 어휘력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교육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라고 해도 그 정도의 어휘력은 있다고.
아직 숙련도가 부족해서 종종 읽지 못할 때도 있었고, 내 말이 전해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차차 나아질 테니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습격…인가요?”
그래서 시체를 본 셀린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니.”
나는 해변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 중 하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부패가 조금 되긴 했지만 아직 형체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사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큰 상처가 없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
얼핏 본 다른 시체들도 마찬가지였고.
자잘한 상처가 있기야 한데 죽음에 이를 정도로 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우욱…!”
다은이 연신 신물을 토해냈다.
하기야, 지구인인 다은이 이런 광경을 볼 일이 뭐가 있겠어.
분쟁 지역에 살고 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다은 만큼은 아니지만 셀린도 꽤나 충격받은 듯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글쎄.”
이제 막 도착한 처지인 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무엇 때문에 죽은 건지.
그리고 왜 시체를 이렇게 방치한 건지.
‘…마족들은 장례 문화가 없나?’
그렇다고 하기엔 아티샤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죽은 이들을 수습하는 걸 봤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생각하는 것을 잠시 멈췄다.
그러는 사이 간신히 헛구역질을 멈춘 다은이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으, 흐으…. 카나야. 너는 괜찮아…?”
“익숙하니까.”
부패 중인 시체를 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심심찮게 봐왔는데 시체 좀 봤다고 유난 떠는 것도 웃기지.
이보다 더한 것도 많이 봤는걸.
무엇보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날뛴 주제에 이제 와서 다은처럼 헛구역질하고 있으면 나에게 죽은 놈들이 비웃을 것이다.
“….”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 그들을 죽인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아빠의 말을 들어서 평화로운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과거로 돌아가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생각은 해 볼 수 있잖아?
나는 짧게 숨을 뱉으며 몸을 한 바퀴 돌렸다.
눈을 감고 명복을 비는 셀린, 핼쑥한 얼굴의 다은.
이전보다 확연히 밝은 빛을 내는 다은의 반지를 보며 말했다.
“시간 없어. 이제 출발하자.”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언제까지나 여기 계속 눌러앉아 추모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러려고 저 먼 동쪽 끝에서부터 이곳까지 온 게 아닌걸.
어차피 원하든 원치 않든, 중심부로 가면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티샤의 말에 따르면 거기엔 아직 살아있는 마족이 남아 있는 것 같으니까.
“으, 으응….”
“….”
나는 넋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다은을 걱정스레 올려다봤다.
괜찮으려나….
내 욕심 때문에 끌고 오긴 했는데, 영 불안한 모습을 보니 데려오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돌려보내야 하나.”
아티샤가 탄 배가 꽤 멀어지긴 했어도 아직은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우리가 갈아탔던 작은 보트로 따라잡을 순 없을 테니 내가 좀 수고해야겠지만.
“아니야! 나 정말 괜찮아!”
“…정말?”
“그럼, 괜찮고말고! 이 우락부락한 근육이 안 보여?”
“안 보이는데.”
“엥? 내가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는데 그럴 리가! 자, 카나! 자세히 봐봐.”
“나랑 팔씨름해서 이기면 인정할게.”
“저는 물렁물렁한 순살입니다. 저를 맛있게 드셔주세요. …아야야야야! 물었어?! 진짜 물었어?!”
다은이 다급하게 팔을 뺐다.
조금 전까지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끌어올려 근육을 자랑하던 다은의 뽀얀 팔에 선명한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입가를 슥 훔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에퉤퉤. 맛있게 먹어달라며.”
“그냥 해본 말이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딨어!”
“으음, 여기.”
“…아으으! 평소에는 말 안 들으면서 왜 이럴 때만 잘 듣는 건데?!”
“이제부터라도 잘 들으면 좋은 거 아니야?”
“그건 맞지. 그런데….”
짐짓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던 다은이 별안간 눈을 번뜩였다.
“카나는 안 그럴 거잖아!”
“부으으으-”
이 얄미운 꼬맹이!
다은이 양손으로 내 볼을 잡고 꾹 눌렀다.
만약 지금 누가 나를 본다면 입이 툭 튀어나온 게 붕어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후후, 물고기 같네요. 귀여워요.”
아니나 다를까.
셀린이 푸스스 웃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소감을 내놓았다.
“부우우우-”
확 침 뱉어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뭔가, 인간의 밑바닥을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튼 긴장은 풀린 것 같으니 다행이네.
내가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는 걸 다은은 아마 모르겠지.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응. 그렇고말고.
“…뭔가 눈빛이 불손한데?”
“-부우?”
“에휴…. 애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다 들려.”
“들으라고 한 말이야.”
다은이 꼭 누르고 있던 내 볼을 꼬집듯이 살짝 잡았다가 놔주었다.
새로운 의사소통 능력을 배운 덕에 이제 다은이 하는 말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게 됐지만.
“먼저 반한 게 죄지…. 뭐? 로리콘이냐고? 야! 반했다는 말에 그런 의미만 있는 줄 알아? 순수하게 마음이 이끌렸다는 의미도 있거든? 안 되겠어. 넌 머리 좀 식히고 와라. 북극곰 어쩌구 치는 놈들도 싹 다 강퇴야!”
셀린과 다르게 다은의 말은 알아들어도 알아듣는 게 아니었다.
…북극곰? 갑자기 북극곰이 왜 나오지?
내가 기억하는 북극곰은 북극에 사는 곰인데, 다른 게 있나?
“모르겠어….”
비단 다은의 말만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동향 사람인 다은의 언행에서 친근함보다 낯설다는 감정을 먼저 느끼는 걸 보면 역시 나는 지구인보다 실리아인에 가까운 거겠지.
차원 사이의 거센 소용돌이도, 고된 경험도 끝내 지우지 못한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도 말이야.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았으니까.”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때 가서.
“평안히 잠드시길….”
엄숙한 셀린의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체가 가득한 해안가를 떠났다.
셀린은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고 가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지만, 묻어주고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대신 아르디나 대륙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약했을 뿐.
아티샤의 말대로 닦여 있는 길을 따라서 우리는 락시아의 중심을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
“….”
“….”
길 상태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언제 깔았는지 모를 돌바닥은 여기저기 깨져서 울퉁불퉁한 게 예삿일이었고, 검게 물든 덤불이나 잔해 따위가 길을 막기 일쑤였다.
확실한 건, 보행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길을 만드는 목적이 통행의 편리를 위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다지 제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걷기 편하려나.’
“우왓?!”
다은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지 내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은이 툭 튀어나온 돌바닥에 걸려 휘청거렸다.
나는 다은이 넘어지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조심해.”
“고, 고마워.”
가슴을 쓸어내리는 다은을 뒤로 하고 주변을 살폈다.
“답답하네.”
“으, 응? 나 말한 거야…?”
“아니. 공기가.”
“휴우, 난 또 나보고 답답하다고 하는 줄 알았어….”
“답답한 면이 있긴 하지.”
“뭐어?!”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은에게 한 말이 아니라 몸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공기를 두고 한 말이었다.
걸음을 딛는 간단한 행동도,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걸을 때보다 더 힘을 주어야 했다.
글쎄. 락시아가 얼마나 큰지는 몰라도 섬이 아니라 ‘대륙’이라는 말을 쓴 거면 그렇게 작지만은 않을 텐데.
벌써부터 이 정도면 중심부는 어느 정도일지.
“아직 사람은 안 보이네요.”
“시체는 보이지만.”
“어, 음….”
처음 발을 디뎠던 해변만큼 많지는 않지만 길가를 걷다 보면 이따금씩 싸늘하게 죽어 있는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도 아까 그 사람들처럼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던 걸까?”
“그럴지도.”
다은의 말을 적당히 긍정하며 검을 빼 들었다.
저 멀리서 으르렁대며 다가오는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서.
“귀찮게 하지 마.”
캬아악!
아직도 락시아에 숨 붙이고 사는 놈답게 제법 질겼지만 딱 거기까지.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던 마물은 연이어 날린 검기에 영원한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저놈은 어떤 생물이 변한 거였을까.
뿔이 달린 걸 보면 어쩌면 소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몇 차례, 길을 걸으며 나타나는 마물을 처리하고 있으니 다은이 쭈뼛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카나야, 왜 이번엔 싸우라고 안 해?”
아하.
왜 계속 검을 잡았다 놓았다, 발을 뗐다 붙였다 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나 했더니 내가 싸우라고 시킬까 줄 알고 그랬던 모양이네.
“여기 녀석들은 제법 강하니까.”
방금 나타난 놈 정도는 다은도 전력을 다하면 이길 순 있겠지.
하지만 괜히 힘 빼서 마기에 중독되기라도 하면 낭패인걸.
마기라는 이름의 폭탄 심지가 시시각각 타들어 가고 있는 마당에 여유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지막으로-
“여기서는 지켜준다고 했잖아.”
“카나야…!”
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야.
그러니, 그렇게 감동한 표정을 지을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