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이 된다고 해서 번식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물이 되면서 번식력이 더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해.
일단 마물이 되면 이전엔 다른 종이었던 생물들끼리도 생식을 통해 새끼를 낳는 게 가능했으니까.
내 말을 들은 학구열이 넘치는 다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신기하네. 종이 다른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글쎄.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난 마물학자도, 생물학자도 아닌걸.”
“어, 그렇지….”
이 세계에 산 세월이 있으니 아는 게 다은보다 많은 거야 당연하지만, 지식은 또 다른 얘기니까.
그건 지구도 다르지 않을 텐데.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마물들이 달려드는 것을 처리하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살기 좋은 곳이었겠네.”
이렇게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걸 보면 말이야.
간만에 마기에 오염되지 않은 먹잇감을 발견해서 기쁜 건지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달려들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서걱.
가벼운 절삭음이 들리며 내게 달려들던 마물이 목이 하늘을 날았다.
먹잇감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든 마물은 식탐에 물든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녀석의 시체는 굶주린 마물들의 양식이 될 것이다.
먹기 위해 달려든 놈의 최후가 다른 놈들에게 먹히는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네.
“귀찮게, 정말.”
마나를 줄기줄기 흘리고 다니기엔 아깝고, 달려드는 걸 하나 때려잡자니 귀찮기 짝이 없고.
알아서 피해줬으면 좋겠는데, 주제를 좀 알고 달려들면 안 되나?
이런 걸 보면 야생 동물은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이 뛰어나다는 말이.틀린 것 같기도 해.
“본능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카나가 만만하게 보인 게 아닐까? 카나는 작고 귀여우니까!”
“응, 일리가 있네.”
“뭣…?!”
다은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드디어 네가 귀엽다는 걸 인정하기로 한 거야 카나?”
“…? 또 헛소리야?”
“헛소리라니! 일리 있다고 카나가 직접 말했으면서….”
“그걸 말한 게 아닌데.”
보아하니 아주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친절하게 다은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만만하게 보인다는 거 말이야. 그러니까 저니가 작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
다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굴러다니는 꼴을 보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모양.
그러다가 다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진실을 알린 게 죄라면…!! 난 그 죗값을 달게 받겠소…!”
“…아, 그러셔.”
구국을 위해 전쟁터에 뛰어드는 기사처럼 결연한 어조로 말하니 되레 맥이 빠져버렸다.
대놓고 장난치는 말이니 반응을 해주지 않는 게 올바른 대응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른 법.
“흠….”
한 뼘, 두 뼘.
손을 차근차근 옮기며 가늠했다.
“뭐 하는 거야?”
“길이를 재고 있어.”
“길이? 무슨 길이?”
“얼마만큼 잘라내면 나와 키가 같아질지.”
대충 이 정도인가?
쭉 벌린 손가락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으니 허리에 묵직한 무게감이 매달려 왔다.
“살려줘!”
“조금 잘라낸다고 해서 죽지 않아. 다리가 잘리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사인엔 쇼크사라는 것도 있다고…! 다리가 절단돼서 죽는 사람도 많아!”
“그렇구나. 그건 몰랐네. 그러면 다리가 아니라 위쪽은 어때. 위든 아래든 전체적인 길이만 줄일 수 있으면 상관없는데.”
“…그건 진짜로 죽어. 확실하게 죽어서 소생의 가능성조차 없다고.”
“그렇지만 저니는 살아나잖아?”
“오… 그건 생각 못 했는데?”
‘의표를 찔려버렸네’라고 다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대부분의 경우엔 셀린이 만류하러 오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분, 장난은 거기까지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장난?”
“…장난이었잖아. 빨리 그렇다고 말해 줘.”
“으응… 장난, 맞아. 장난이었어.”
원하는 대로 말해줬건만 다은은 불안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까지 케어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기에 나는 검을 빼 들었다.
다은의 키를 축소하는 수술이 아니라 군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잡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직후 마물의 머리들이 하늘을 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새로운 날이 밝았고,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여전히 이어졌다.
꽤 많이 걸어오긴 했는지 해변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마기가 사방에서 일행을 압박해 왔다.
수준이 다르게 강한 마물이 덤벼드는 건 덤이었고.
샤악!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잔상이 희끗 남을 정도로 상당히 빠른 속도였지만 내 눈은 그것의 정체를 놓치지 않았다.
마기를 잔뜩 머금은 거대한 발톱.
저것에 닿아 생채기라도 나면 곧바로 마기 중독으로 죽지 않을까.
아니, 웬만한 사람들은 마기 중독 이전에 몸이 두 동강 나서 죽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게 닥쳐오는 발톱을 막거나 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발톱이 내 몸에 닿으려는 순간
쾅!
금빛 빛이 번쩍이더니 나에게 쇄도하던 발톱이 우뚝 멈춰 섰다.
-그르륵?
마물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막아 세운 금빛의 벽이 이상한지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흉흉한 얼굴이 한순간에 어리둥절하게 변하는 게 퍽 우습더라.
“이해 못 하겠어? 괜찮아. 이해하지 않아도 돼.”
나도 죽은 놈한테 나불나불 설명하는 취미는 없거든.
시체를 좋아하는 성벽도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서.
철컥.
-털썩!
검을 집어넣으며 마물에게서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커다란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다은이 내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맞아! 원래 진정한 강자는 폭발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거든.”
“…그런가?”
다은의 요구에 맞춰 행동하긴 했는데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낭만이라는 건 어렵구나.
“그러니까 낭만 아니겠어?”
“으음… 그런가?”
다은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가 됐든 의뢰주가 만족했다고 하니 된 거 아니겠어?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서 고개를 돌리고 셀린에게 말했다.
“덕분에 이번에도 쉽게 잡았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본래 달려드는 마물을 처리하는 건 나 혼자 전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습격을 막아냈던 어느 때에 셀린이 내게 제안했다.
“비록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카나 님이 싸울 때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처음에는 셀린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물이 무리를 지어서 습격하든, 숨 돌릴 틈 없이 습격하든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귀찮을 뿐.
그런 상황에서 셀린의 손까지 빌리는 건 과잉 대응이자 과투자라고 생각했다.
“과투자가 아니라 효율적인 투자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혼자선 3의 힘을 써야 하는 일도, 두 명이라면 각각 1의 힘만 써도 되는 때도 있잖아요. 그리고, 카나 님이 싸우는 걸 보고만 있으려니 죄책감이 느껴져서요.”
-이런 식으로, 셀린은 나를 계속 설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만일을 대비해서 셀린의 전력은 온존해 두고 싶었는데, ‘그건 카나 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다은도 셀린의 말을 적극 지지해서, 결국 나는 그녀의 참전을 허락했다.
다수결은 어쩔 수 없지.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모를까, 전투 상황에서 성직자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는 터라 고집을 부릴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상처 입는 걸 겁내지 않아도 되니 더 편하게 마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회피나 방어에 쓸 여력을 온전히 공격에 쏟아부을 수 있으니까.
“견습 성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네.”
“칭찬 고마워요. 카나 님도 굉장히 잘 싸우세요.”
“나야 밥 먹고 한 게 이런 것뿐이니까 당연히 잘해야지.”
“저도 늘 에델 님을 모시기 위해 수련한 몸이니 잘할 수밖에요.”
“…하여간, 한마디도 안 지네.”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승패를 따질 수조차 없는 대화인데도 말이야.
슬쩍 눈을 흘기자, 셀린이 입가를 살포시 가리며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마물의 습격 때문에 잠시 잊었던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집.
여기를 살펴보려고 했었지.
“그나저나, 역시 여기도 비었네.”
고개를 쭉 내밀어 집 안을 살피며 말했다.
남의 집을 허락도 없이 들여다본다는 책망은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야 노크를 할 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허락해 줄 집주인도 없는데 어쩌겠어.
한때는 문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흔적을 넘어 집 안을 살펴봐도 생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콜록, 콜록! 어후, 먼지가…. 셀린, 혹시 먼지를 치워주는 성법 같은 건 없어요?”
“마, 만들어 볼까요…?”
“헉,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뽀얗다 못해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은 가구들을 둘러보다 밖으로 나왔다.
더러운 곳에서 깨끗한 곳으로 나왔으니 상쾌한 느낌이 드는 게 정상일 텐데, 짙은 마기 때문에 별로 체감되진 않았다.
중심부로 향할수록 대륙의 변방에서 볼 수 없었던 민가들이 보이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것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한편, 기이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가 본 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쥐새끼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중심부로 갈수록 마기가 강해지면 오히려 변방에 사람이 많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작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정반대이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 다른 둘의 생각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가 됐든 곧 알게 되겠지.”
중심부에 도착하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던졌다.
저 지평선 너머, 불길하게 휘몰아치는 마기의 군집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