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밤은 춥다.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던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몸을 숨겼으니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쌀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일교차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텅!
락시아 대륙은 마기에 뒤덮여 있는 탓에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았고,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탓에 낮에도 종종 서늘한 느낌을 받곤 했으니까.
활활 타오르던 불길의 기세가 조금 사그라든 것 같아서 장작 한 토막을 집어넣었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던 불꽃이 장작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온기가 주변을 온화하게 감싸안았다.
“으음….”
셀린이 몸을 뒤척였다.
갑작스럽게 훈훈해진 공기가 낯선 모양.
그래도 몸을 감싸안는 온기가 싫은 건 아닌지, 셀린은 감고 있던 눈을 뜨거나 더 투정 부리지 않고 다시 조용한 숨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은은….
응, 잘 자고 있네.
미동도 없이 곤히 자고 있어서, 혹시나 하고 다은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본 나는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작은 바람을 느끼고 손을 거뒀다.
투웅!
“…학습 능력이 없나?”
일행을 살피던 중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 들렸다.
벌써 세 번이나 시도했는데 뚫지 못했으면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한숨을 쉬며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검을 뽑았다.
이런 자세로 검을 쓰면 위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오직 팔만으로 검을 휘두르는 거니 당연하지.
게다가 몸이 작은 탓에 서 있을 때도 땅에 끌리지 않게 신경 써서 휘둘러야 하는데, 앉은 채라면 오죽할까.
그걸 알면서도 땅바닥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은 건, 셀린의 성법으로 만들어진 장벽을 두드리며 귀찮게 하는 놈을 처리하기엔 이 정도로 충분하기 때문.
삭-
일순, 삭풍과 같은 바람 소리가 야영지를 스쳤다.
밤중에 예의도 없이 남의 집 문을 두드리던 진상을 침묵시키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색을 방해하는 놈은 사형이야.
실은 별생각 없이 불을 보며 멍때리고 있었던 것뿐이지만, 원래 말이란 건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다른 거니까.
“후아암….”
멍하니 불꽃이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하품이 새어 나왔다.
뭔가 나른한 기분이네….
내가 아는 야숙은 뭐랄까, 좀 더 긴장감이 흐르는 그런 분위기인데.
셀린의 성법 덕분에 어디 한적한 곳으로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렇게 불침번을 설 필요도 없었다.
웬만한 놈들은 저 신성력으로 된 장벽을 뚫지 못할 테고, 저것을 뚫을 힘이 있는 놈이라면 자는 와중에도 눈치챌 수 있으니까.
-그럼 왜 혼자 청승 떨고 있는 거냐.
‘…청승 떤 적 없어. 그냥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던 거지.’
-내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인다만.
‘도마뱀 눈깔은 사람이랑 다를 수 있지. 내가 이해해 줄게.’
-쯧, 말본새 하고는.
‘싫으면 떠나든가.’
‘혹시 진짜 떠나면 어쩌지….’ 같은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라시드가 나를 떠날 리 없거니와, 그거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바인데 걱정 같은 걸 할 리가 없지.
지겹게 달라붙는 변태 도마뱀을 떨쳐낼 기회인걸.
생각해 보면, 다은이 나를 보겠답시고 매일매일 찾아오는 걸 그나마 쉽게 받아들인 건 그라시드 때문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당연히 고맙다는 말은 아니다.
-…크흠! 싫다는 건 아니다.
‘그러지 않을 거면 조용히 해.’
내 생각대로, 말본새니 뭐니 떠든 내 엄포에 그라시드는 싱겁게 꼬리를 내렸다.
-고민이 많으면 내게 털어놓는 건 어떤가.
‘…내가? 너한테 고민을?’
-이래 봬도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속는 셈 치고 털어놔도 손해 보는 건 없지 않나.
‘손해 보는 게 없긴 왜 없어. 너랑 대화를 나눠야 하잖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날 이렇게 대한 인간은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할아버지.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세월이 흘렀음에도 드래곤은 여전히 경외의 대상으로 군림했으나, 그라시드가 지닌 위상은 예전만 못했다.
그러니까 왕족 놈들이 홍염 기사단을 그렇게 무시했겠지.
변태 도마뱀에게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싶지는 않아서 마침 떠오른 의문을 물어보았다.
‘네가 만든 왕국이 멸망했는데 아쉽진 않아?’
-내가 계약한 건 지그리드지, 그의 후손들이 아니다. 그리고 난 이미 충분한 호의를 베풀었지 않나. 그 반지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는지 아나?
‘크루모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것도 미루고 만드느라 고생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몇 번이나 들어서 이젠 듣기 전에 달달 욀 수 있었다.
‘정작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만들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명색이 드래곤이 하사한 물건인데 잡스러운 놈이 쓰면 그건 그것대로 체면이 안 살지 않나.
‘잘났어 아주.’
그러니까 사용자가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고려하지 않고 제 체면만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는 말이잖아.
드워프보다 뛰어난 물건을 만들 수 있으면 뭐 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거기다 ‘왕족의 피를 묻힐 수 없다’라는 귀찮은 제약까지 걸어놓기나 하고 말이야.
-정확히는 그냥 왕족의 피가 아니라 ‘지그리드의 피가 흐르는 왕족의 피’다.
‘뭐가 됐든.’
-누군가를 위해 만든 칼이 정작 그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꼴이 우습지 않나. 그런 사고가 일어나는 걸 방지한 거다.
‘결국은 또 체면 때문이라는 거네.’
역시 자기애의 화신인 드래곤.
처음부터 그라시스와 지그리드는 안중에도 없었구나.
그런 의지를 전하자 그라시드가 또다시 시끄럽게 쫑알거렸다.
애초에 자극하려고 했던 말이라 그가 뭐라고 반박하든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적당히 흘려넘겼다.
남의 머릿속에서 멋대로 떠들어댈 거라면 이런 식으로라도 값을 지불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다. 나름 중하게 여겨서….
‘-잠깐. 조용히 해봐.’
-….
시끄럽게 떠들던 그라시드의 입울 다물게 하자 삽시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굳이 따지면 의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원래부터 조용했지만.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길 위,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와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 소리 사이로 낯선 소리가 스며들었다.
…지익, 지익.
그것은 무언가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마물일까?
‘아니.’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마물의 기척은 아니다.
게다가 마물이었다면 진작 우리를 보고 달려들거나, 저렇게 소리를 내며 다가오지 않고 더 조심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척을 처음 느낀 것도 아니었다.
부상을 당해서 거동이 힘든 이들한테 곧잘 느낄 수 있던 기척이었으니.
그러니까 지금 다가오고 있는 것은.
“사람.”
아마도 마족, 그러니까 정화자 일족이겠지.
내 예상대로, 짙은 어둠을 헤치고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창백한 피부의 마족이었다.
비척비척 걸어오던 남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놀란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 보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찾아온 건 아닌 모양.
물론 연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저 표정이 진심으로 놀란 게 아니라 연기라면 속았다 해도 별로 기분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으니까.
“당신들은-”
“쉿.”
곤히 잠든 일행을 가리키며 눈치를 주니 남자가 입을 합 다물었다.
제법 눈치가 빠른걸.
다가오는 것에는 딱히 주의를 주지 않았더니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가 있는 야영지에 다가왔다.
턱.
“아…!”
셀린의 성법에 부딪힌 남자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숨을 토해냈다.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장벽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에델 님의 신성력…. 아아, 살아생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급기야는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기까지.
일련의 행동을 보고 있던 나는 떨떠름하게 눈을 깜박였다.
‘광신도 같네….’
이들에게 에델이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니 말은 하지 않겠다만.
신성력을 본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감격하는 반응은 아르디나 대륙에선 볼 수 없는 것이라 신선하게 느껴졌다.
여러 의미로 말이야.
한참 동안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장벽을 더듬던 남자가 겨우 소리 없는 오열을 그쳤다.
그는 퉁퉁 부은 눈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당신들은, 아르디나 대륙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맞아.”
숨길 이유가 없어서 떳떳하게 말했다.
“아티샤, 알아?”
“아! 그 아이를 만나셨나요?”
“응. 아티샤가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몸도 성하지 않을 텐데….”
신성력에 이어 아티샤의 이름을 들먹인 게 효과가 있었는지 남자의 경계가 조금 더 누그러들었다.
거짓말이면 어떻게 하려고 경계를 푸는지.
사기당하기 딱 좋은 사람이네.
그리고 말이야?
“몸이 성하지 않은 건 그쪽도 마찬가지 같은데. 시체가 걸어 다니는 줄 알았어.”
“…하하. 느껴지시나요.”
“시체 냄새를 그렇게 풀풀 풍기고 다니는데 어떻게 몰라. 시체 치우기 귀찮으니까 죽고 싶으면 다른 곳 가서 죽어.”
자는 중에 강제로 일어나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서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면 정말 시체 하나 치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기껏 조용히 한 보람도 없이 내 손으로 직접 셀린을 흔들어 깨워야 했다.
“셀린. 일어나 봐.”
“으, 으음…. 카나 님…? 무슨 일 있나요…?”
마물이 쳐들어온 건가요?”
나는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묻는 셀린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늘 있는 일이잖아.
셀린을 깨울 정도로 강한 마물이 쳐들어왔으면 이 주변은 이미 쑥대밭이 되었겠지.
“셀린이 필요해.”
“굉장히 두근거리는 말씀이네요. 고백인가요?”
“…아니야. 자다 깨서 졸린 건 알겠는데 정신 좀 차려 봐.”
“후후.”
언어의 장벽 탓에 거의 항상 다은하고만 대화해서 의도치 않게 셀린이 소외되는 일이 많았다.
그게 내심 찝찝했던 터라, 셀린과 대화가 통하게 된 건 좋은데….
어째 대화가 통하게 된 이후로 셀린이 급속도로 다은을 닮아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온화하고 자애롭게 느껴졌던 셀린이 이렇게 변하다니.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걸 좋아해야 할까, 아니면 다은에게 물들었다는 것에 통탄해야 할까.
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셀린을 남자에게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