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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1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에게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허나 그 시간은 말 그대로 아주 잠깐일 뿐, 그가 원래 누릴 수 있었던 수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승천 의식의 실패로 몸과 영혼, 격까지 모두 망가진 이에게는 호사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객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제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유예를 얻은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셀린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음에도, 남자의 미소를 보자 셀린의 얼굴에 죄책감이 깃들었다.

“제가 드린 유예가 길지는 않을 거예요.”

“예. 저도 제 목숨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저는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았습니다. 새싹이 움트고 꽃잎이 저무는 모습을 수백 번을 봐왔지요. 아, 오래 산다고 자랑하는 건 아닙니다.”

“별로. 자랑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아무튼… 기나긴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떠나려고 하는 걸까.

남자의 기색을 알아챈 셀린이 그를 붙잡았다.

“마기가 희박한 곳에서 정양하시면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요. 비록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원하신다면 추천장을 써드릴 테니 성국으로 가시는 건 어떤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

“네. 저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던 분들…. 그분들의 시신을 수습해 드리려고 합니다. 예전부터 바랐던 일인데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군요.”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진작 했으면 되는 거 아니야?”

“행여나 제가 찾아갔다가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분들의 유지를 더럽히는 꼴이니까요. 과한 걱정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게 아닌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아… 그래서….”

“그러나 이젠 저도 그분들처럼 승천 의식을 치른 몸. 더 이상 거리낄 필요는 없겠죠. 이 비루한 몸으로는 숭고한 희생에 걸맞은 무덤을 만들 수 없겠지만 수습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제 마지막 불꽃마저 남을 위해, 떠나간 이들을 위해 태우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살려줬으면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니야? 살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바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멀리 갈 것도 없어.

남자와 같은 마족들도 그런 이유로 아르디나 대륙으로 이주했잖아.

아, 그 마족들을 탓하려는 건 아니야.

단지, 다른 사람은 발버둥 쳐도 얻을 수 없었던 기회를 거머쥐었음에도 쉽게 포기하는 게 이해가 안 돼서 물은 것뿐.

나 또한 예전엔 기적과 같은 기회가 찾아오길 바랐던 몸이니까.

“남의 희생을 토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

“자식 대신 칼에 찔려 죽는 부모가 어찌 아쉽지 않겠습니까. 다만, 부모는 자식이 살았음에 안도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목숨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남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내게 푸근한 웃음을 보냈다.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 네 자식이나 친구가 죽은 널 살리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취한다면. 그러면 어떨 것 같아?”

“글쎄요. 아마 비참한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타인의 희생 위에서 살고 싶진 않거든요.”

“만약 그게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목숨이라고 해도?”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말입니다.”

남자의 말대로라면 전쟁터에서 검을 들고 달려드는 상대도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그의 목숨을 취한다면, 그의 목숨을 취함으로써 내가 살아나는 셈이니까.

하기야 저런 성격이니까 에델이 내린 사명에 매달려 살 수 있는 거겠지만….

역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네.

“저도 제 성격이 답답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일평생 이렇게 살아왔더니 다른 삶은 생각하기 힘들군요. 그러니 답답하셔도 양해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양해는 무슨. 내가 네 주인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살든 내 알 바 아니야.”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남자의 시선이 흘깃 위를 향했다.

자욱한 마기의 안개 너머로 어렴풋한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두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이젠 정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수녀님의 말마따나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아…! 잠시만요…!”

남자의 손을 잡은 셀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비록 같이 가드리진 못하지만, 에델 님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셀린이 그의 안녕을 빌어 주고, 남자가 떠날 채비를 마쳤다.

채비라고 해봤자 등에 멘 작은 보따리의 주둥이를 조이는 게 다였지만.

남자는 옷에 자글자글 잡힌 주름과 먼지까지 탁탁 털어내며 허리를 숙였다.

“하시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이 위험한 락시아까지 찾아오신 걸 보면 분명 높은 뜻이 있으신 거겠지요. 여러분들께도 에델 님의 빛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희미한 빛을 담은 검은색 눈동자 속에 분홍색 소녀의 모습이 담겼다.

“제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귀인의 고민을 들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뭐야. 보호자 행세라도 하려는 거야? 안타깝게도 내 보호자 자리는 이미 만석인데.”

“아하…. 혹시 그 보호자가 지금 뒤에서 주무시고 있는 분인가요?”

“…뭐, 뭐?!”

나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냈던 나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내가 낸 소리가 잠에서 깨어날 만큼 크지는 않았는지 다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은의 목소리를 확인한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체 왜 그런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한 거야?”

“그런가요? 아까부터 계속 저분을 신경 쓰시는 게, 각별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각별…. 백번 양보해서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보통은 일행을 배려한다고 생각하지,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비약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흠, 확실히 그렇군요. 불쾌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것까지는 없고.”

“하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뭐, 꼭 보호자가 아니더라도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잔소리하는 게 노인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자신을 노인이라 칭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어리게 보이고 싶어서 갖은 애를 쓰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인 언행.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보다 내 앞의 남자가 더 젊어 보이는 건 우습다면 우스운 일 아닐까.

그 대가가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하면 과연 좋은 일인가 싶긴 하지만.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끊임없이 고찰하고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철학 선생님 납셨어. 시간 없다며?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떠나기나 하지 그래.”

남의 마음을 멋대로 짐작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나 하고 말이야.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세간의 상식으로 따지면 예의 없다며 손가락질받을 만한 말이었지만.

무얼, 새삼스럽게 그런 걸 생각하겠어?

그런 걸 생각할 것 같았으면 반말을 쓰지도 않았겠지.

이 세계의 최고 어르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델에게도 반말을 찍찍 내뱉었는데, 이제 와서 예의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귀찮은 군식구를 쫓는 것처럼 휘적휘적 손을 젓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응. 너도.”

건강하라느니, 몸조심하라느니.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소란스러운 작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하기엔 낯간지럽기도 하고.

서서히 어둠 속에 잠겨 드는 남자의 등을 배웅하던 셀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볼 수야 있겠지. 어떤 모습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

셀린이 책망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가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건 상당히 신선한 일이라서,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삭막한 말이었던 것 같기도.

알고는 있어도, 상냥한 말로 위로하는 건 내 성격상 무리야.

“동정하는 건 좋지만 너무 연연하지는 마. 어차피 할 일이 끝나면 해결될 문제니까.”

“…그래요. 그랬었죠.”

위로라기보다 현실을 다시금 직시하게 만든 것이지만.

결과만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

결연한 표정을 짓는 셀린의 의지를 고취시킬 겸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마, 날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지? 상냥한 견습 성녀님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어.”

“당연하죠. 에델 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기꺼이 그랬을 거예요. 귀여운 카나 님을 잃는다는 건 전 인류적 손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이상하네. 주접까지 떨어달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주접이라뇨. 제 진심인걸요.”

셀린이 누구한테 저런 몹쓸 짓을 배웠을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보나 마나 내 뒤에서 쿨쿨 자고 있는 사람이 원흉이겠지.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야 낫다만, 저런 소리를 들어도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만 들 뿐.

“카나 님, 귀가 빨개졌어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은데.”

모닥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나는 내 앞에서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불처럼 은은한 온기를 머금은 셀린의 눈을 무시했다.

“갑자기 깨워서 미안. 깨워줄 테니까 다시 잘래? 동이 트고 있긴 해도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을걸. 여차하면 출발 시간을 늦춰도 되니까.”

“아뇨. 이왕 깬 거, 일출을 보며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카나 님이야말로 아예 안 주무신 것 같은데 괜찮나요?”

“명색이 마스터인데 괜찮아야지.”

나는 셀린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해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비록 하늘을 덮은 마기 때문에 본래의 찬연함이 바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더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출을 지켜보던 우리는 다은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날 때가 돼서야 주섬주섬 야영지를 정리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도 깨워주지…!”

우리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투정 부리는 다은은 덤이었다.

못 일어난 게 잘못이지.


           


Chapter 111

Chapter 111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에게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허나 그 시간은 말 그대로 아주 잠깐일 뿐, 그가 원래 누릴 수 있었던 수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승천 의식의 실패로 몸과 영혼, 격까지 모두 망가진 이에게는 호사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객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제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유예를 얻은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셀린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음에도, 남자의 미소를 보자 셀린의 얼굴에 죄책감이 깃들었다. “제가 드린 유예가 길지는 않을 거예요.” “예. 저도 제 목숨의 불꽃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저는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았습니다. 새싹이 움트고 꽃잎이 저무는 모습을 수백 번을 봐왔지요. 아, 오래 산다고 자랑하는 건 아닙니다.” “별로. 자랑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아무튼… 기나긴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떠나려고 하는 걸까. 남자의 기색을 알아챈 셀린이 그를 붙잡았다. “마기가 희박한 곳에서 정양하시면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요. 비록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원하신다면 추천장을 써드릴 테니 성국으로 가시는 건 어떤가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 “네. 저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던 분들…. 그분들의 시신을 수습해 드리려고 합니다. 예전부터 바랐던 일인데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군요.”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진작 했으면 되는 거 아니야?” “행여나 제가 찾아갔다가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분들의 유지를 더럽히는 꼴이니까요. 과한 걱정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게 아닌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아… 그래서….” “그러나 이젠 저도 그분들처럼 승천 의식을 치른 몸. 더 이상 거리낄 필요는 없겠죠. 이 비루한 몸으로는 숭고한 희생에 걸맞은 무덤을 만들 수 없겠지만 수습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제 마지막 불꽃마저 남을 위해, 떠나간 이들을 위해 태우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살려줬으면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니야? 살기 위해서 남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바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멀리 갈 것도 없어. 남자와 같은 마족들도 그런 이유로 아르디나 대륙으로 이주했잖아. 아, 그 마족들을 탓하려는 건 아니야. 단지, 다른 사람은 발버둥 쳐도 얻을 수 없었던 기회를 거머쥐었음에도 쉽게 포기하는 게 이해가 안 돼서 물은 것뿐. 나 또한 예전엔 기적과 같은 기회가 찾아오길 바랐던 몸이니까. “남의 희생을 토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 “자식 대신 칼에 찔려 죽는 부모가 어찌 아쉽지 않겠습니까. 다만, 부모는 자식이 살았음에 안도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목숨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남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내게 푸근한 웃음을 보냈다.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 네 자식이나 친구가 죽은 널 살리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취한다면. 그러면 어떨 것 같아?” “글쎄요. 아마 비참한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타인의 희생 위에서 살고 싶진 않거든요.” “만약 그게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목숨이라고 해도?”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말입니다.” 남자의 말대로라면 전쟁터에서 검을 들고 달려드는 상대도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그의 목숨을 취한다면, 그의 목숨을 취함으로써 내가 살아나는 셈이니까. 하기야 저런 성격이니까 에델이 내린 사명에 매달려 살 수 있는 거겠지만…. 역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네. “저도 제 성격이 답답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일평생 이렇게 살아왔더니 다른 삶은 생각하기 힘들군요. 그러니 답답하셔도 양해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양해는 무슨. 내가 네 주인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살든 내 알 바 아니야.”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남자의 시선이 흘깃 위를 향했다. 자욱한 마기의 안개 너머로 어렴풋한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두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이젠 정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수녀님의 말마따나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아…! 잠시만요…!” 남자의 손을 잡은 셀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비록 같이 가드리진 못하지만, 에델 님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셀린이 그의 안녕을 빌어 주고, 남자가 떠날 채비를 마쳤다. 채비라고 해봤자 등에 멘 작은 보따리의 주둥이를 조이는 게 다였지만. 남자는 옷에 자글자글 잡힌 주름과 먼지까지 탁탁 털어내며 허리를 숙였다. “하시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이 위험한 락시아까지 찾아오신 걸 보면 분명 높은 뜻이 있으신 거겠지요. 여러분들께도 에델 님의 빛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희미한 빛을 담은 검은색 눈동자 속에 분홍색 소녀의 모습이 담겼다. “제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귀인의 고민을 들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뭐야. 보호자 행세라도 하려는 거야? 안타깝게도 내 보호자 자리는 이미 만석인데.” “아하…. 혹시 그 보호자가 지금 뒤에서 주무시고 있는 분인가요?” “…뭐, 뭐?!” 나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냈던 나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내가 낸 소리가 잠에서 깨어날 만큼 크지는 않았는지 다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은의 목소리를 확인한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체 왜 그런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한 거야?” “그런가요? 아까부터 계속 저분을 신경 쓰시는 게, 각별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각별…. 백번 양보해서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보통은 일행을 배려한다고 생각하지,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비약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흠, 확실히 그렇군요. 불쾌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것까지는 없고.” “하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뭐, 꼭 보호자가 아니더라도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잔소리하는 게 노인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자신을 노인이라 칭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어리게 보이고 싶어서 갖은 애를 쓰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인 언행.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보다 내 앞의 남자가 더 젊어 보이는 건 우습다면 우스운 일 아닐까. 그 대가가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하면 과연 좋은 일인가 싶긴 하지만.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끊임없이 고찰하고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철학 선생님 납셨어. 시간 없다며?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떠나기나 하지 그래.” 남의 마음을 멋대로 짐작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나 하고 말이야.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세간의 상식으로 따지면 예의 없다며 손가락질받을 만한 말이었지만. 무얼, 새삼스럽게 그런 걸 생각하겠어? 그런 걸 생각할 것 같았으면 반말을 쓰지도 않았겠지. 이 세계의 최고 어르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델에게도 반말을 찍찍 내뱉었는데, 이제 와서 예의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귀찮은 군식구를 쫓는 것처럼 휘적휘적 손을 젓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응. 너도.” 건강하라느니, 몸조심하라느니.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소란스러운 작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하기엔 낯간지럽기도 하고. 서서히 어둠 속에 잠겨 드는 남자의 등을 배웅하던 셀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볼 수야 있겠지. 어떤 모습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 셀린이 책망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가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건 상당히 신선한 일이라서,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삭막한 말이었던 것 같기도. 알고는 있어도, 상냥한 말로 위로하는 건 내 성격상 무리야. “동정하는 건 좋지만 너무 연연하지는 마. 어차피 할 일이 끝나면 해결될 문제니까.” “…그래요. 그랬었죠.” 위로라기보다 현실을 다시금 직시하게 만든 것이지만. 결과만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 결연한 표정을 짓는 셀린의 의지를 고취시킬 겸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마, 날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지? 상냥한 견습 성녀님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어.” “당연하죠. 에델 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기꺼이 그랬을 거예요. 귀여운 카나 님을 잃는다는 건 전 인류적 손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이상하네. 주접까지 떨어달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주접이라뇨. 제 진심인걸요.” 셀린이 누구한테 저런 몹쓸 짓을 배웠을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보나 마나 내 뒤에서 쿨쿨 자고 있는 사람이 원흉이겠지.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야 낫다만, 저런 소리를 들어도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만 들 뿐. “카나 님, 귀가 빨개졌어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은데.” 모닥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나는 내 앞에서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불처럼 은은한 온기를 머금은 셀린의 눈을 무시했다. “갑자기 깨워서 미안. 깨워줄 테니까 다시 잘래? 동이 트고 있긴 해도 한두 시간은 더 잘 수 있을걸. 여차하면 출발 시간을 늦춰도 되니까.” “아뇨. 이왕 깬 거, 일출을 보며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카나 님이야말로 아예 안 주무신 것 같은데 괜찮나요?” “명색이 마스터인데 괜찮아야지.” 나는 셀린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해가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비록 하늘을 덮은 마기 때문에 본래의 찬연함이 바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더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출을 지켜보던 우리는 다은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날 때가 돼서야 주섬주섬 야영지를 정리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도 깨워주지…!” 우리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투정 부리는 다은은 덤이었다. 못 일어난 게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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