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얼대는 다은을 대충 달랜 우리는 뜻밖의 만남을 뒤로 한 채 중심부를 향한 여정에 올랐다.
여느 때처럼 덤벼오는 마물들을 처리하고, 마족들이 살던 집을 구경하며 길을 걷다가 해가 지면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 준비를 한다.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로 보이는 어딘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음.”
나는 우리를 가로막은 검은 장벽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세데스 성국을 수호하던 성법, 그리고 셀린이 펼친 성법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일렁이는 검은색 때문에 장벽을 보고 있으면 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이건, 조금 곤란할지도.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뚫을 수야 있지.”
다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것뿐.
장벽의 목적은 안과 밖을 가르는 거잖아.
그러니 장벽을 세웠다는 건 안과 밖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인데, 함부로 구멍을 뚫었다가 그 의미가 퇴색되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는걸.
예를 들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마물이 튀어나온다든가….
뭐, 그럴 가능성은 무척 낮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여기는 마족의 본거지니까 괜히 오해 사는 일은 피하고 싶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자 다은이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카나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게 신기해서… 악!”
…아무튼.
이 정도로 짙은 마기라면 통째로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고, 사람 셋 지나갈 정도의 구멍을 뚫어도 금방 복구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문제 될 짓은 웬만하면 피하는 게 낫겠지.
그렇다 해도….
흘깃.
내 시선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낑낑대는 다은의 얼굴을 스쳤다.
다은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다은이 들었다면 아마 ‘카나가 정강이를 차서 그런 거잖아!’라고 말하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다은의 안색은 나에게 정강이를 차이기 전에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락시아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에는 아직 괜찮았지만, 주변을 잠식한 마기가 짙어질수록 어두워지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흙빛을 하고 있었다.
하긴, 오래 버티긴 했지.
다은의 수준은 엑스퍼트.
다은보다 훨씬 경지가 높은 나도 락시아의 마기는 부담스러운데 다은은 오죽할까.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엑스퍼트치고 충분하다 못해 과하게 오래 버틴 셈이었다.
아마 다은이 가진 마도구 덕분이겠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인 모양.
“셀린. 저니한테 성법 좀 걸어줘.”
“네. 알겠어요.”
“어, 어?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으면서 그럴 필요 없기는.”
“…아하하. 들켰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한다며.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 아직 버틸 만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정 못 버티겠으면 그때 말할 테니까….”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중얼중얼 이어지던 다은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애초에 셀린에게 힘을 아끼라고 한 건 이때를 위해서였어.”
도대체 뭐 때문에 힘을 아끼라고 했다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에델의 가호가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아프지는 않겠지만, 그게 멀쩡하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괜찮지 않은 티를 줄줄 내면서 그렇게 말하면 ‘아, 그렇구나’라고 받아주겠어?
“아하하….”
“번거롭겠지만 부탁할게.”
“맡겨주세요.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셀린의 신성력이 휘감자 다은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휴… 도트뎀이 없어졌네. 포션 마셔야 하나 했는데 다행이다. 뭐? 포션 값 아껴서 쌀먹하려고 하는 거라고? 쌀먹은 무슨 쌀먹이야! 넌 괘씸해서 안 되겠어.”
안도의 한숨을 쉴 거였으면 왜 성법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건지.
알 수 없는 다은의 행동에 고개를 저으며 장벽을 살폈다.
아르디나 대륙으로 피난을 간 마족들이 세운 마을, 그곳에 세워진 목책과 달리 이 장벽은 입구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네.”
짧게 중얼거리며 검을 뽑았다.
내 행동을 지켜보던 다은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까 안 뚫는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오해를 사는 일은 피하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응. 그랬는데?”
“근데 검은 왜 빼 든 거야? 헉, 설마 그 검으로 나를 베려고…!”
“떠드는 거 보니까 이제 좀 살 만해졌나 봐?”
그러고 보니 어제랑 오늘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했던 게 다은의 헛소리가 적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
치대는 일도 평소보다 적었고.
이런 말을 하면 ‘우리 카나, 언니가 안아주지 않아서 외로웠구나? 자아, 마음껏 안기렴’ 같은, 짜증 나는 소리를 할 게 분명하니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장벽을 부수지 않아도, 반응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면 반응이 오겠지.”
마당에서 폭탄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나는데 과연 무시할 수 있을까?
손에 든 검에 마나를 가득 불어넣었다.
우우우우웅-!
마나가 잔뜩 주입된 검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울부짖음을 토했다.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만들었기에 버티는 거지, 어중이떠중이가 만든 검이었으면 진작 박살 나서 쇳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건 검의 내구성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기교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식하게 마나를 때려 넣을 뿐인 행위니까.
쩌적.
하지만 이 검도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네.
바람에 섞여 묻혀 놓칠 수도 있는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한껏 강화된 내 청력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한계에 내몰린 검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여기서 마나를 더 불어 넣는다면 단말마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겠지.
소란을 일으키기엔 지금까지 모은 마나로도 충분한데, 굳이 낭비해서 쓸 만한 무기를 잃을 이유는 없어서 나는 마나를 넣는 것을 멈췄다.
내 손에 들린 것은 대검이라고 부를 법한 거대한 분홍색의 검이었다.
나는 본래의 색도, 형체도 잃어버린 검을 쥐고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분홍색 검기가 비상했다.
검기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마땅히 베어 넘겨야 할 적도 없건만.
가가가각-!
“으윽…!”
“…!”
나는 물론이고,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다은과 셀린도 일제히 귀를 막았다.
곧게 뻗어나간 검기가 거친 소음을 자아냈다.
그것은 ‘벤다’라기보다 ‘갈아버린다’, 혹은 ‘분쇄한다’에 어울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곧, 내가 쏘아 보낸 검기가 무엇을 벴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생각 못 했는데.”
검기가 지나간 자리.
검기의 궤적을 따라 푸른 하늘이 고스란히 비쳤다.
나는 어두컴컴한 마기 사이로 푸른 하늘이 비치는 이질적인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래, 마기가 있었지.
내가 날린 검기가 베어 가른 것은 하늘을 가로막은 마기였다.
마나가 적었으면 마기에 먹혀 사라졌을 테지만, 무식하게 때려 넣은 덕에 내 검기는 짙은 마기를 가르고 저 높은 하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그냥, 간단한 충격만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사정없이 귀를 긁어버리는 강렬한 소음도, 뻥 뚫린 시원한 풍경도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원래 나의 의도는 막대한 양의 마나를 운용하는 것뿐이었다.
주변을 울릴 정도로 많은 마나를 모은다면 어지간히 실력이 없는 이가 아니라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늘을 향해 검기를 쏘아 보낸 것도 우리의 위치를 더 소상히 알리기 위해서였지, 힘을 과시하기 위함도,
“하늘… 갈랐다고….”
…다은이 방금 한 말처럼, 오글거리는 말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래도, 며칠 만에 푸른 하늘을 보니까 나쁜 기분은 아니네.
비록 오래 가진 못하겠지만.
“내가 주는 선물이야.”
이 정도면 집들이 선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무심하게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물었다.
어느새 나의 뒤엔 여러 명의 마족이 도열해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철컹!
그리고 나는 철창으로 가로막힌… 그러니까,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에?”
…어째서?
그보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 * *
다행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장벽에 아무 피해도 가하지 않고 안에 있는 마족을 부르기 위해서 그랬다는 나의 진술과, 설득 확률 100%에 빛나는 셀린의 신성력 덕분이었다.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의 비중이 큰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내 공도 0은 아니지 않겠어?
“지도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사과는 하지 않으마.”
나를 감옥에서 꺼내준 여자가 말했다.
며칠 전에 봤던 남자도 젊어 보였지만, 지금 앞에 있는 여자는 그것보다 더 어려 보인다.
인족으로 따지면 대략 20대 초반 정도일까.
유순하게 늘어진 눈꼬리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왜 다들 가슴이 이렇게 큰 거야….”
쿡.
시기 어린 눈으로 여자를 보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다은의 옆구리를 찔러 주의를 주었다.
고작 지방 덩어리일 뿐인데 왜 부러워하는 건지.
절대, 자격지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애초에 저렇게 되는 건 바라지도 않는걸.
저런 거는 있어봤자 검을 휘두를 방해만 되잖아.
“지도자? 네가 마족의 족장이야?”
“…말이, 조금 짧지 않느냐?”
“버릇이라서.”
“안 좋은 버릇은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 몸에 뿌리내린 버릇을 고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나, 고치자고 하면 고치지 못할 것도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려무나.”
“안 좋은 버릇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리고 난 에델한테도 반말을 썼어. 혹시 네가 에델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라면 존댓말을 써줄게.”
“…공사다망하신 에델 님이 고작 너 같은 계집애와 친히 말을 섞으실 리 없지 않느냐.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나를 기망할 생각이라면-”
“카나 님의 말씀은 사실이에요.”
“….”
만약 거짓이었다면 에델 교의 수녀가 가장 먼저 분개하며 일어섰을 터.
그러나 분개하기는커녕 나를 변호하는 셀린을 본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불신하는 눈으로, 그리고 복잡한 눈으로 나와 셀린을 번갈아 보던 여자가 반쯤 뗐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말세로구나.”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문득 내 마음속에서 충동이 일었다.
만약, 그녀에게 에델의 진짜 모습을 알려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에델 님이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할까, 아니면 그조차 받아들일까.
매우 궁금했지만, 내 계획은 귀신같이 눈치채고 만류하는 셀린에 의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너무 곤란하게 하지는 마세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감옥에 가둔 것 때문에 조금 심술을 부린 것뿐이야.
그나저나, 인상이 묘하게 익숙한데.
나는 검집을 툭툭 건드리며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너, 아티샤랑 무슨 관계야?”
“…아티샤를 아느냐?”
“여기까지 데려다준 게 그녀니까 당연히 알지.”
“그랬구나…. 그래, 그 아이는 잘 있더냐?”
“글쎄.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 것 같던데.”
“다행이구나.”
여자의 눈이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아련하게 빛났다.
“그래서, 물음에 대한 답은?”
“내 딸이니라.”
“아, 역시.”
예상했던 범주 내의 답이라, 그다지 충격적이진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걸 보면 다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