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113

나는 다시 찬찬히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이전에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대답을 듣고 나서 보니 아티샤와 닮은 부분이 더 확실하게 보인다.

유순하다 못해 나른해 보이는 눈매나, 갸름한 턱선이나.

목소리도 은근히 아티샤와 닮은 것 같고….

아티샤의 얼굴에서 피로를 빼면 저런 인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얼굴이었다.

“저 외모에 장성한 딸이 있다고…? 완전 사기 아니야…?”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긴 뭐가 그럴 수 있어! 아티샤와 동갑이거나 더 어려 보이는데….”

“딸보다 어려 보이는 엄마라니. 그런 건 만화에나 있을 법한 일 아니냐구.”라고 다은이 중얼거렸다.

마족이 불로장생하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뭘 새삼스럽게.

뭐, 그래도 다은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족장의 외모는 조금 후하게 치면 미성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내 딸이 데려온 이들이라면 믿어도 될 터. 유스티나. 이 몸의 이름이니라.”

“말투가 이상해.”

“버릇없는 아이야, 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이더냐?”

“흠. 그렇긴 하지.”

괜스레 트집을 한 번 잡았더니 곧바로 반격이 날아왔다.

치사하게 정론으로 맞서다니…. 한 일족의 수장답게 굉장히 현명하네.

“카나리아. 그냥 카나라고 불러.”

물꼬를 튼 유스티나의 소개를 시작으로 나와 다은, 셀린까지 모두 소개를 마쳤다.

다은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 저희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머뭇머뭇 묻는 다은의 목소리에서 긴장하는 티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왜 그렇게 긴장해?”

“…인족 기준으로 보면 왕을 알현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난 오히려 꼬박꼬박 대꾸하는 카나가 더 신기한걸.”

“흠… 그런가.”

다은의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납득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다은이 지금까지 만난 인물들은 어디 평범한 사람이었던가?

당장 그녀의 옆에 있는 나와 셀린만 해도 전 기사단장과 견습 성녀인 데다가, 부단장과 심지어 왕자도 만났었는데 말이야.

그때는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긴장하는 건-

“설마, 이미 멸망한 왕국이라고 무시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그런 사람이었어?

실망했다는 시선을 던지자 다은이 다급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카나와 셀린은 이미 친해진 다음에 알게 됐잖아. 그래서 충격받을 새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시에는 솔직히 실감도 잘 안 났고.”

“흐으으음….”

“그, 그래도 에런 님이랑 대화할 때는 긴장했었어! 조금 다른 의미로 긴장했던 것 같긴 해도…!”

“다른 의미?”

“…앗. 이건 못 들은 걸로 해줘.”

긴장하면 긴장한 거지,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에 연신 캐물었지만 다은은 입을 꾹 닫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미심쩍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추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우리들만 떠들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다 놀았으면 이제 말해도 되겠느냐?”

아니나 다를까.

대화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기 무섭게 유스티나가 끼어들었다.

“인간들은 이 몸을 보고 마왕이라고 한다지? 하던 대로 마왕이라고 불러도 좋고, 유스티나 님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느니라.”

“그, 그러면 유스티나 님이라고 부를게요.”

“응. 유스티나.”

“‘님’ 자는 어디 두고 혼자 왔느냐?”

“아르디나 대륙에.”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나를 보던 유스티나는,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돌렸다.

꼭 ‘앓느니 죽지’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혹.”

유스티나의 입에서 짧은 한 글자가 튀어나왔다.

쉽사리 뒷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무언가 결심했다는 양 눈을 질끈 감았다.

“…급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티샤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들려줄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잘살고 있다는 한마디로는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걸 묻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내 손으로 쫓아낸 아이의 안부를 묻는 건데 어찌 어렵지 않겠느냐. 염치가 있는 이라면 응당 그렇게 생각할 터.”

“앗. 그… 미안.”

…그건 몰랐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자 유스티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과의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니 괜찮으니라. 내 업보이거늘 누구를 탓하겠느냐.”

“아티샤는 제 발로 나온 것처럼 말하던데.”

“그건 그 아이가 남의 허물을 감싸 줄 만큼 상냥하기 때문이니라. …눈치를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듯하구나.”

“솔직히 말하면…. 네, 궁금해요.”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니라.”

유스티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었지만, 우리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아련한 기억 속, 과거에 빠져든 그녀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마족의 전 족장.

그러니까 유스티나의 남편이자 아티샤의 아버지는 승천 의식을 성공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실패자이기도 했다.

한 번의 승천을 더 거친다면 락시아에 만연한 마기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런 기대감을 안고 다시 한번 승천 의식에 도전했던 그는 다량의 마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어 족장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로 유스티나였다.

“그이가 그러했듯, 이 몸도 승천 의식에 도전했었다. 지위에 맞는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역할 아니겠느냐.”

그리고 아티샤는 그런 유스티나의 결정을 못마땅해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아티샤도 한 명의 마족.

유스티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몸이 승천 의식을 치르는 날. 차원수라고 하는 괴물이 나타났느니라.”

“…응?”

잠자코 유스티나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야?”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수십 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니라. 헌데, 그것을 왜 물어보느냐?”

“그냥, 궁금해서.”

아르디나 대륙에 처음으로 차원수가 등장한 건 고작 십수 년 전의 일인데, 수십 년은 지났다니.

시간대가 안 맞지 않아?

‘아르디나 대륙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건가?’

잠시 실없는 생각을 했던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십수 년 전의 차원수가 실리아 세계에 등장한 최초의 차원수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라는 거겠지.

에델에게 따로 들은 바는 없으나, 오염된 마나가 모이는 장소인 만큼 더 취약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유스티나는 내 질문에 잠시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이 몸은 승천 의식을 치르고 있었고, 그런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도 뒤늦게 전해 들었느니라. 만약 그놈이 조금만 더 빨리 나타났거나, 늦게 나타났더라면 이 몸이 직접 나섰을 터인데….”

본래라면 제일 강한 유스티나가 직접 나서서 막았을 테지만, 마치 유스티나가 승천 의식을 치르는 틈을 노린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바람에 그녀는 놈을 미처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유스티나를 대신해서 나선 것이 아티샤였다.

“그 격전 때문에 아티샤는 한쪽 뿔을 잃게 됐느니라. 우리에게 뿔은 생명의 원천이나 다름없는 것. 그런 모습이 됐음에도 아티샤는 이곳에 머무르고자 했지만, 한쪽 뿔만으로 버틸 수 있을 만큼 락시아의 환경은 녹록지 않았느니라.”

때문에 유스티나는 아티샤의 의지를 무시하고 아르디나 대륙으로 내쫓기로 결정했다.

아티샤를 살리기 위해서.

정화자 일족의 족장이기 이전에, 한 명의 어머니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내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어찌 그냥 지켜볼 수 있겠느냐. 이 몸은 차마 그리할 수 없었느니라. 이 몸에게 남은 것은 딸아이밖에 없었으니.”

“그렇구나.”

“반응이 상당히 건조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럼 울기를 바라?”

“…됐느니라. 엎드려 절 받기 아니더냐.”

비단 내 감수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슬픈 일이 아닌데, 덤덤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아티샤는 뿔을 잃은 걸 아쉬워했지만, 자랑스럽다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더냐?”

“말 그대로야.”

강한 적과 싸워 이겨서 일족을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의 부러진 뿔은 그것을 증명하는 훈장이라고 아티샤가 말했다.

“본인이 자랑스럽다고 하는데 슬퍼하면 그게 더 실례 아니야?”

“…내 생각이 짧았구나. 버릇없는 아이야, 네 말이 맞느니라.”

“버릇없는 아이라는 말은 굳이 붙일 필요 없지 않았어?”

“챙겨야 할 것을 놓고 왔다고 하여 내가 구태여 붙여 준 것이니라.”

“…쪼잔해.”

고작 ‘님’이라는 말 하나 안 붙인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

“여하튼, 이 몸의 이야기는 이게 끝이니라.”

무언가를 바라는 눈치.

자기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번엔 내가 이야기하라는 거겠지.

나는 다은의 소매를 쭉 잡아끌었다.

“저니. 네 차례야.”

“…응? 뭐가?”

“아티샤 얘기를 듣고 싶다잖아. 빨리해 줘.”

“내, 내가?”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졸지에 일을 떠넘겨 받은 다은이 난감해했지만, 어서 이야기하라는 듯 유스티나의 재촉하는 눈길을 받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티샤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락시아에 데려다준 것까지.

크루모의 그림자가 습격했던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다은은 그 대수롭지 않은 일도 맛깔나게 꾸며 얘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당시에 자리에 있던 나조차도 흥미롭게 들을 정도로.

저런 게 방송인의 재능이라는 건가?

음유시인을 했다면 대성했으리란 나의 평가가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너무 미화하는 거 아니야?’

나는 떨떠름하게 머리카락을 꼬았다.

날 보고 마을의 영웅이라느니, 몸이 상하는 걸 마다하지 않고 그림자를 물리쳤다느니.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추앙을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렇게 희생정신이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로구나.”

“그럼요. 우리 카나가 얼마나 상냥한데요.”

“아니. 네가 제대로 본 게 맞을걸.”

봐, 유스티나도 저렇게 말하잖아.

난 바보처럼 힘을 과하게 끌어 쓴 거지, 몸을 바쳐 마족들을 구한 게 아닌걸.

정말 몸 바쳐 구한 건 내가 아니라 다은이지.

“아이를 구하겠다고 브레스에 맞서 싸웠으니까.”

“호오….”

“그, 그건 만용이었어….”

“설사 만용이라고 한들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니라.”

다은의 활약상에 이어, 밤낮 가리지 않고 마족들을 돌보던 셀린의 의료 활동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유스티나의 눈빛은 훨씬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낯부끄럽게 얼굴에 금칠을 해댄 게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야.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