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은혜를 지은 이에게 냉정하게 굴긴 힘든 법.
하물며 본인도 아니고, 죽고 못 살 정도로 금쪽같이 여기는 아이를 도와준 것이라면 모성애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는 어머니가 아니고서야 절대 냉정하게 굴 수 없을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아티샤와 유스티나가 한 말에 따르면 아르디나 대륙으로 넘어간 마족들은 살기 위해서 락시아를 떠난 것뿐.
그 과정에서 딱히 다른 마족들과 큰 갈등을 빚은 건 아닌 듯했다.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 둥지를 트는 것이니 마찰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마찰이 있었다고 해도 사소한 수준이 아닐까.
그러니, 타지에 있는 일족을 구해준 우리를 곱게 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유스티나가 한층 나긋해진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난동을 부린 이유가 무엇이더냐? 분명 바라는 게 있으니 그런 짓을 했을 터.”
“말하면 들어줄 거야?”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느니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달라는 게 아니라 들어줄 거냐고 물었는데.”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냥 ‘이 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들어주겠느니라’라고 해도 되잖아.”
“이 몸을 따라한 것이더냐? 제법 귀여운 짓도 할 줄 아는구나.”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다은이 발동 걸렸잖아.
나는 입을 틀어막고 눈을 반짝이는 다은을 애써 무시했다.
“알고 있느냐? 같은 말이라도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니라. 이 몸처럼 남들의 위에 선 이의 말은 천금보다 중한 무게가 있으니,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느냐?”
“아, 그래.”
맞는 말이긴 해.
평범한 이라면 어떤 말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과 피해를 오롯이 혼자 짊어지면 되지만.
혼자만 피해 보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길게 생각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면 과연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를 수 있을까.
나도 단장 시절엔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도 꾹 참았는걸.
만약 에런처럼,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이 방금 내 말을 들었다면 ‘그게 참은 거라고?’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난 당당해.
왕이 멍청한 짓을 하는 것도, 왕자가 껄떡대는 것도, 공작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것도….
그 외에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수두룩했지만, 그때마다 깽판을 치진 않았잖아.
내가 얼마나 이성적으로 행동했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처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유스티나는 복 받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난동을 부리지 않았어.”
“…하?”
유스티나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었다는 듯 황당한 음성을 토했다.
“그건 그러니까…. 응, 그냥 노크였어.”
잘잘못을 따지면 문을 만들지 않은 너희가 잘못한 거야.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자 유스티나의 눈에 일순 험악한 빛이 스쳤다.
“애초에 출입을 상정하고 만든 게 아니니 문이 없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그리고 노크를 할 생각이었다면 더 점잖은 방법이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빨랐지?”
“효율적이라는 말은 최선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이 아니니라. 이렇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시 감옥에 가둬 줄 용의도 있느니라.”
“음, 사양할게. 나는 갇히는 것보다 가두는 쪽 입장이라서.”
그보다, 왜 출입구가 없나 했더니 출입을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서 그런 거였어?
그러면 식재료 조달은 어떻게 하고, 바깥에 나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어떡해?
승천 의식에 실패한 사람은 또 어떻게 나가는 거고-
“-그만, 그만.”
유스티나가 손사래를 쳤다.
“용무가 끝나면 사람을 붙여 마을을 안내해 줄 테니 이제 그만 원래 화제로 돌아가지 않겠느냐? 진득하게 기다릴 성미가 없어 문을 두드려 댄 것치고 한가해 보이는구나.”
“아, 맞다.”
툭툭 건드릴 때마다 고풍스러운 말투로 발끈하는 게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승천 의식을 치르러 왔어.”
“…승천 의식 말이더냐?”
“응.”
“그러고 보니, 인간이 승천 의식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는데 이 몸의 이야기를 듣고도 의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지.”
이 몸의 실책이니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스티나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큼 아티샤를 신경 쓴다는 증거 아닐까?”
“…크흠!”
내 말을 들은 유스티나가 헛기침했다.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렇다고 내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티샤가 알려주었느냐?”
“아니. 에델한테도 들었고, 며칠 전에 만난 남자한테도 들었어.”
“남자? …아아, 그런 일이 있었느냐.”
남자라고만 했지만 유스티나는 내가 누구를 말한 건지 눈치챈 것 같았다.
하기야 모를 리가 없겠지.
“그래. 알았느니라.”
“어라. 생각보다 쉽게 수락하네.”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는데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이니 돌아가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 아니더냐. 에델 님이 몸소 말씀하신 거라면 나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닐 테니 거절할 이유가 없느니라.”
“구구절절 설득해야 하나 했는데 그럴 필요 없어서 다행이네. 그러면 지금 바로 시작하자.”
“아니. 그건 안 되느니라.”
“…왜?”
조금 전까지 허락하는 분위기 아니었어?
나는 잘 흘러가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유스티나를 불만스럽게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스티나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그렇게 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느니라.”
“그러니까 왜 안 되는 거냐고 묻는 거잖아. 설마 너도 드래곤을 잡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아니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잡아 와 줄 수 있느냐?”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도 줄 수 있는데.”
-….
힐긋, 그라시드의 가호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분명 대화를 듣고 있을 텐데 잠자는 척 아무 말도 없는 게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럴 때는 꼭 아무 말도 안 하지.
“허풍이 심한 아이로구나.”
유스티나는 나의 진심을 가득 담은 말을 허풍으로 치부했다.
“오해를 하는 듯하여 다시 말하겠느니라. 이 몸이 안 된다고 말한 것은 지금은 불가능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승천 의식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일 줄 아느냐?”
“…아니야?”
“아니니라.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인위적으로 격을 올리고 영혼을 불태우는 정신 나간 짓거리가 가능했을 것 같으냐?”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정신 나간 짓이라는 자각은 있구나.
“네가 알다시피 승천 의식은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마기를 억지로 밀어 넣는 것. 즉, 충분한 양의 마기가 모여야 한다는 말이니라.”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며칠 전에 승천 의식을 치러서 아직 마기가 모이지 않았다는 말이지?”
“말버릇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이해가 빨라서 편하구나.”
“칭찬 고마워. 그런데, 이 정도 마기로는 부족한 거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마기가 묵직하게 나를 내리누르고 있다.
다른 곳보다 압박감이 훨씬 심하긴 하지만, 모든 오염된 마나가 모여드는 곳치고는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승천 의식으로 마기를 중화해서 그렇게 느꼈던 건가?
유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턱없이 부족하느니라.”
“그러면 마기가 다시 모이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
“흠….”
잠시 고민하던 유스티나가 손가락을 쫙 폈다.
“이 정도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그렇게 한쪽 손을 펼친 채로 다른 손을 쥐락펴락하던 그녀는 마음을 굳혔는지 손을 내게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손가락이 다섯 개를 모두 활짝 핀 손을.
“5일? 그 정도면 괜찮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응?”
“당연히 5개월 아니겠느냐.”
“…응?”
“이것도 최소로 잡은 것이니라. 하나의 목숨과 맞바꾸는 행위인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응?”
“…고장 났느냐?”
“그럼 고장 안 나게 생겼어…?”
“카나야. 사람한테는 고장 난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망가졌다고 하는 거야.”
“그것도 이상한 거 같은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길래 당연히 5일이라고 생각했지, 5개월이나 기다려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애초에 그렇게 몇 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락시아에서 버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지겨운 건 둘째 치고, 마기에 중독돼서 시름시름 앓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걸.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었지만 유스티나의 머리가 끄덕여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기야 유스티나를 재촉해서 되는 일도 아니지만….
“일이 복잡해졌네.”
…곤란해.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르디나로 돌아갔다가 5개월 후에 돌아오면 되긴 하지.
그러나 상황은 마기가 차오르는 걸 느긋하게 기다릴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은 아닐지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니까.
짝!
혼자 끙끙 앓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스티나가 별안간 손뼉을 쳤다.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오늘은 여독을 풀고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는 게 어떻겠느냐.”
“유스티나 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며칠간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잖아요. 당장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앗, 그러면 마을 구경을 해도 될까요? 궁금했거든요!”
“…하아.”
유스티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셀린과 다은이 찬성하며 나섰다.
다은이야 원래 놀기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해도, 설마 셀린까지 저럴 줄이야.
하필 나의 건강을 들먹여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알았어. 그렇게 할게.”
끝내 다수결에 못 이겨 찬성의 말을 내뱉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