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검날이 빛을 번뜩였다.
검이 부드럽게 가죽을 파고들었다.
마치 푸딩에 포크를 꽂아 넣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결과는 그만큼 평화롭지 않았다.
서걱.
마물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생기를 잃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사방에 피를 흩뿌렸다.
“아.”
실수했다.
당초 계획은 목과 몸통을 깔끔하게 분리하는 거였는데, 자르면서 다른 생각을 했더니 힘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네.
덕분에 몸이 끈적끈적해졌어….
몸에 들러붙은 피를 대충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헉…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카나야…!”
“또 시작이야?”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끼자, 다은이 주머니에서 꺼낸 하얀색 손수건으로 나의 볼을 문질렀다.
문질문질.
조물조물.
“….”
“으흐, 으헤헤….”
“닦아 주려는 거 맞지?”
“…그럼 당연하지! 자아, 다 됐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다은이 내 볼에서 손을 뗐다.
순백색, 까지는 아니어도 새하얗던 손수건은 마물의 피로 인해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탁을 해도 원래 색을 되찾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기야, 마물의 피가 잔뜩 묻었으니 위생 이전에 마기 때문에 근시일 내로는 다시 쓸 수도 없겠지만.
이걸 그대로 아르디나에 있는 인족의 마을에 가져가면 테러범 취급 받지 않을까?
“뽀송뽀송한 카나, 완성!”
“뽀송뽀송? 아직도 끈적거리는데?”
피는 다 닦아냈지만, 피가 남긴 불쾌감과 끈적이는 감촉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로 닦은 것도 아니니 당연하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니까. 세상엔 말이지? 평범하게 말해도 이상한 상상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 정~말로 많거든.”
“…끈적거린다는 말에 이상한 상상을 할 요소가 있어? 애초에 이상한 상상이라는 게 뭔데?”
“…세상엔 모르는 게 좋은 일도 있단다. 난 카나가 때 묻지 않고 지금처럼 순수하게 남아줬으면 좋겠어. 이런 언니 마음, 이해해 주겠니?”
“응. 일단 저니가 그 이상한 사람 중 하나라는 건 알겠어.”
“…카나카나야,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정말 이상한 사람을 안 만나봐서 그래! 나 정도면 정상 축에 속하는 거라구!”
“흐음.”
근데, ‘나 정도면’이라는 말을 하는 거 보면 자기가 이상한 걸 알긴 하나 봐.
정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 그냥 정상이라고 말했지, 저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자신이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을 무시하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몇 마리나 잡았지?”
“이걸로 딱 스무 마리예요.”
“많기도 하네.”
아직도 중얼거리는 다은 대신 셀린이 내 질문에 답했다.
“힘드시면 잠시 쉬었다 하시는 건 어떤가요?”
“힘든 건 아니야. 그냥 지겨운 거지.”
무슨 일이든 똑같은 일을 계속하면 질리잖아.
하물며 복잡하기는커녕 무료하기 짝이 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라면 더 그렇고.
“단순 반복 작업…이군요?”
“그렇지.”
마물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마물이 근처에 오면 목과 몸을 분리해서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
이게 끝인걸.
숨을 쉴 때마다 짙은 마기가 뚝뚝 흐를 정도로 강한 마물이 온다면 나도 이런 한가로운 생각을 할 순 없었겠지만.
의외로, 락시아의 중심부에는 특출나게 강한 마물이 존재하진 않았다.
아르디나 대륙이나 락시아 변방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마물이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내 예상이 보기 좋게 틀린 상황.
내 말을 들은 유스티나가 여상스레 대답했다.
“그러기 위해 만든 결계인데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결계의 역할 중 하나.
중심부에 모인 마기가 대륙 전역에 퍼지지 못하게 막는 것.
그럼에도 일부 마기가 새어나가는 건 막지 못했지만, 결계가 없었다면 락시아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라고 유스티나는 말했다.
“마물의 생명력이자 강함의 원천은 마기에서 오는 것. 고작 이 정도의 마기로 네 녀석을 상대할 만한 마물이 나올 리 없지 않느냐.”
“그 말대로면 결계 안쪽에는 그런 마물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결계 안에서도 못본 것 같은데.”
“모름지기 농사꾼은 밭을 늘 살펴야 하는 법이니라. 해충이 생겼다면 곧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설령 결계 밖에서 잠재력을 타고난 마물이 탄생했다고 해도 다른 마물들의 먹이가 된다.
본능적으로 마기를 꺼리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마물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까.
마물이 발생하기 좋은 락시아의 환경이, 오히려 그들이 지닌 잠재력이 꽃피우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르디나에서 그런 마물이 종종 보였던 건….”
“천적이 없는 탓이겠군요. 유독 강한 마물이 탄생하면 다른 마물들을 잡아먹고 성장할 테니까요.”
“그런 이야기는 됐어. 별로 관심도 없고.”
“…카나가 먼저 시작한 거 아니었어?”
“저니, 모함은 나쁜 거야.”
“아니…! 분명히 그랬잖아…!”
다은이 억울한 듯이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은의 소매를 끌었다.
“그만 해.”
“…!”
다은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걱정해 주는 거야?”
“응.”
저렇게 가슴을 쾅쾅 내리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겠어.
“저니는, 큰 가슴을 좋아하잖아.”
“…어?”
“그렇게 가슴을 쳐대다가 움푹 파여서 작아지면 어떡해.”
“잠깐잠깐잠깐.”
후우-
다은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들이쉰 것보다 빠르게 숨을 내뱉었다.
서너 번 심호흡을 한 다은은 침착하려고 애쓰는 목소리로, 하지만 전혀 침착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일단 이거부터 물어볼게. 그… 큰 가슴을 좋아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야?”
“…?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맨날 셀린을 보고 부러워했잖아. 그래서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데….”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다은이 한층 마음이 놓인 듯한 얼굴을 했다.
“아… 그런 뜻이었어…? 다음부터는 오해의 소지가 없게 말해주면 안 될까?”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있었어?’가 아니라, 차고 넘쳐서 문제였어. 하아… 또 난리 났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고 카나가 직접 말했잖아. 멀쩡한 북극곰 좀 그만 괴롭혀! 북극곰도 생명이야 생명!”
예전 같았으면 알아듣지 못했을 말도 알아들을 수 있다니.
역시 유용한 능력이라니까.
만족감에 젖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이번에는 화살이 내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슴을 내리친다고 해서 가슴이 작아질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리야. 작아지기만 하면 다행이지, 흉곽이 함몰돼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내 흉곽이 함몰될 정도로 세게 내리치는 바보로 보여?”
“….”
“저기요, 카나 양?”
“….”
“야, 대답.”
“으음, 누굴 부르는 걸까.”
다은은 나를 부를 때 ‘카나’, 또는 ‘카나야~’처럼 이름을 붙여 부르곤 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때도 그랬고.
아마 이건 다은의 습관이겠지.
귀가 간지러워질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로 부르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나를 부르는 거라면 이름으로 불렀을 테니 지금 다은이 ‘야’라고 부르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거지.
으음, 그러면 누구를 부르는 걸까?
유스티나에게 그랬을 리는 없으니, 설마 셀린이랑 말을 놓기로 한 건가?
딴청을 피우고 있자 불쑥 뻗어진 다은의 손이 내 허리를 잡았다.
“앗.”
순식간에 높아진 눈높이.
땅에 닿지 않는 발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너요, 너.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해? 이 건방진 꼬맹이 녀석! 벌을 내릴 테니 달게 받아랏…!”
“…흐, 간지러워.”
얼굴은 닦았지만 옷은 아직 피투성이인데.
다은은 제 옷이 더러워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비고, 끌어안고, 간지럽히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온갖 야단을 떨던 다은이 나를 내려놓았다.
얼굴 곳곳에 피가 묻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은은 퍽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후으….”
“반성하는 것 같으니 이번 일은 이쯤에서 봐주지. 앞으로는 착하게 살도록.”
“…반성한 건가요?”
옆에서 지켜보던 셀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요. 카나 표정을 봐봐요. 뉘우치고 있잖아요?”
“그냥 간지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보다 다은 님.”
“네?”
“…그, 음….”
셀린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나는 연신 숨을 내쉬며 가쁜 호흡을 진정시켰다.
마침내 완전히 진정되었을 때.
머뭇거리던 셀린이 입을 열었다.
“가끔씩 시선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부러워하시는 거였군요….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드렸겠지만, 이건 제가 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인지라….”
“…셀린까지 왜 그래요!”
이게 다 카나 때문이야!
다은이 으앙,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일단 내 잘못은 아닌 듯.
나는 모른 척 시선을 돌리며 이쪽을 한심하게 보는 유스티나에게 말을 걸었다.
“장소를 옮겨야겠는데. 이 부근 마물은 다 정리된 것 같아.”
기다리면 언젠가 오긴 하겠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장소를 옮기는 게 나아 보였다.
우리가 결계 밖으로 나와 마물을 잡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결계가 없어졌을 때 혹시나 마물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위험 요소를 미리 제거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계를 회수한다 해도 마기가 부족할지 모르니, 마물의 시체로 부족한 양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말했듯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모이는 마기가 새 발의 피라고 해도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마나를 피워올려 마물을 유혹하고, 끌려온 놈들을 처리하는 간단한 일인걸.
“나도 같은 생각이니라.”
유스티나도 내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이 짓을 얼마나 더 해야 해?”
“한 바퀴는 돌아야 하지 않겠느냐?”
“한 바퀴라는 건….”
“결계 주변을 말한 것이니라.”
“…그렇게 많이?”
마족의 마을…? 도시…?
여하튼, 그곳을 지킴과 동시에 격리한 결계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성국을 감싼 성법만큼은 아니라지만, 결계를 따라 한 바퀴를 쭉 돌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냥 도는 것도 아니고, 마물을 유인해서 죽이고, 다시 자리를 옮기는 걸 반복해야 하니까….
“…빨리 끝내자.”
노숙하고 싶지 않으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유스티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는 동참하겠지만, 인근에 있는 마물을 정리하기 전까진 어림도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있나.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수밖에….
그나저나 저 둘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건지.
행여나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세라, 아웅다웅 다투는 셀린과 다은을 모른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