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다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걸 장관이라고 해야 할까?”
산처럼 쌓인 마물들의 사체를 보던 그녀가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카나는 어떻게 생각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작품에 담긴 의도는 작가에게 묻는 게 제일 정확하잖아. 멋대로 해석했다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라고 하면 어떡해?”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지 않을까.”
저건 작품이 아니고, 나도 작가가 아닌데 의도는 무슨 의도야.
“애초에 저걸 작품으로 보는 사람이 있긴 해?”
“카나야. 비록 우리 눈에는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 해도, 작가가 그를 통해 시사하려는 바가 있으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작가가 아니라니까.”
시사하려는 바는 무슨.
나처럼 예술 작품과 거리가 한참은 먼 사람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직접 하고 말지, 그런 식으로… 좋게 말하면 교양 있게, 나쁘게 말하면 답답하게 전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닌걸.
같은 맥락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취향이 아니고
언제였더라…?
아, 생각났다. 한 귀족의 연회에 초대되어서 갔을 때였지.
‘제가 자랑하는 작품이랍니다.’
‘음….’
‘이걸 구하기 위해 쓴 금화가 자그마치 백이 넘는답니다!’
‘…그렇게 비싸다고?’
‘예! 무지한 당신이라고 해도 페르난도라는 이름은 들어 보셨겠죠? 이 작품은 바로 그 페르난도 님의 열 번째 걸작이랍니다. 이걸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 에델 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고작 그림 사는 일에 신이 은혜를 내려줄 리가 없잖아.’
‘고작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구요!’
‘…그래,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나를 부른 게 이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
‘그래요. 멋지지 않나요? …흠흠! 마, 만약 당신만 괜찮다면, 특별히 제가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해 드릴 수 있는데요~?’
‘괜찮아. 별로 관심 없거든.’
‘…당신이란 사람은! 흥, 됐어요! 저도 바쁜 몸이거든요?! 기껏 생각해서 시간을 내줬더니…!’
백작가의 여식이었나, 후작가의 여식이었나.
아무튼 내 또래의 귀족이 개최한 연회였는데, 나한테 귀한 명화를 구했다고 자랑했었지.
하지만 페르난도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나에게는 그녀가 떠벌대는 말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시큰둥하게 반응했더니 삐진 건지 울먹이는 건지 모를 얼굴로 도망가더라.
‘도망’이라는 표현이 쓴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걸음걸이는 도망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었는걸.
참고로, 집에 돌아와서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아빠에게 말했더니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좀 섬세해질 필요가 있어.’
그 말과 함께 뭐라 형용하기 힘든 오묘한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내가 그만큼 예술 작품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명검을 가져와서 보여 줬으면 더 격한 반응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일도 있었지.’
짧은 회상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마물의 시체 더미 주위로 마족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하는 것은 마물의 사체에서 마기를 추출하는 일이었다.
나를 비롯한 일행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라서, 우리는 가만히 서서 그들이 마기를 추출하는 걸 지켜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어.
애초에 돌이킬 생각도 없었지만….
비유를 하자면, 그래, 불 위에 고기를 올린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네.
이미 반쯤 익은 고기를 불에서 빼낼 순 없는 노릇이잖아.
“어, 음…. 정말 카나다운 비유네….”
“나다운 비유?”
“다른 비유도 있을 텐데 굳이 고기에 비유하는 거 말이야. 카나가 고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어.”
“…그게 뭐 잘못됐어?”
“잘못된 건 아니구, 그냥 귀여워서 그래.”
“별게 다 귀엽네.”
참 귀여울 것도 많다.
나는 다은의 너스레를 익숙하게 받아넘겼다.
잠시 소강상태에 이른 대화.
아무리 다은이 말이 많다고 해도 24시간 내내 말할 수는 없어서, 당연히 이렇게 대화가 빌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럴 땐 보통 셀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껴들곤 했는데, 오늘은 셀린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슬쩍 본 셀린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긴장돼?”
“…그렇네요. 아무래도 이런 중책을 맡아본 게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실수하면 카나 님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진정이 안 되네요…. 티가 많이 났나요?”
“응, 엄청.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셀린이 의식을 치르는 줄 알겠어.”
“카나는 긴장 안 돼?”
“당연히 긴장되지.”
나도 사람인데 긴장이 안 되겠어?
내 대답을 들은 다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카나도 긴장을 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 왜 물어본 거야?”
“아, 아니… 막상 대답을 들으니 놀라워서….”
“뭐가 그렇게 놀라워?”
“그야, 카나가 긴장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되는걸. 지금도, 긴장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얼굴이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고.”
얼굴이 굳거나, 식은땀을 흘리거나, 가만히 있질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거나.
보통 사람들은 그렇잖아, 라고 다은이 말했다.
그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익숙하니까 이럴 수 있는 거지.”
목숨을 걸고 나서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나도 처음 전장에 나갈 땐 엄청나게 긴장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쩌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일이 몇 번, 몇십 번이고 반복되면 자극에 무뎌질 수밖에 없는걸.
어지간한 일에는 목숨을 위협받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것도 한몫했고.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여기서 죽을 생각 없다고.”
“카나야. 젊은 남자들의 유언 1위가 뭔지 알아? ‘괜찮아, 안 죽어’ 야. 사고로 죽는 사람 중에서 자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고라는 건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거라고.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거야!”
“…으, 잔소리.”
쫑알쫑알.
조심해야 하는 걸 누가 모른다고, 다 아는 얘기를 시끄럽게 떠들기는.
다은의 말이 끝날 때쯤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뗐다.
“누가 보면 엄마인 줄 알겠어.”
“…카나 같은 귀여운 딸이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지만, 지금은 그냥 언니라고 해주면 안 될까? 장성한 딸이 있다고 하면 내 나이가 너무 많은 것처럼 들리잖아!”
“장성….”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뭐야, 뭐야? 장성했다는 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아니야.”
“아니기는. 입꼬리가 아주 귀에 걸렸구만.”
“…!”
나는 반사적으로 입에 손을 올렸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일자를 그리고 있는 입가.
거울을 본 게 아니니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내 입꼬리가 다은이 말한 것처럼 높게 올라가 있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는 말은 그만큼 크게 웃고 있다는 뜻이잖아.
샐쭉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다은이 방실 웃었다.
“봐봐, 마음에 든 거 맞잖아. 찔리는 게 없었다면 확인하지도 않았겠지. 딱 걸렸어!”
“찔려서 확인한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확인한 거야. 내가 그 정도로 크게 웃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카나가 크게 웃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긴 하네. 미소 짓거나 가벼운 웃음 정도는 드물게 봤지만. 셀린은 본 적 있어요?”
“아뇨. 저니 님도 못 보신 걸 제가 봤을 리가요.”
“흐음….”
“…왜 그렇게 봐.”
“가끔씩 웃는 걸 보면 웃을 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치유 성법을 써볼까요?”
“오, 좋은 생각이네요!”
“…?”
어라.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왠지 모르게 토론의 장이 열려버렸다.
농담이 아니었는지 셀린의 신성력이 한차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몸을 감싸는 따스한 느낌이 황당하기 그지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다은과 셀린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어이가 없네.
“꼭 그렇게 웃어야 해? 저니 말대로 아예 안 웃은 것도 아니잖아.”
그럴 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웃지 않은 거지.
“맞는 말이긴 한데… 내가 카나를 처음 만난 것도 벌써 꽤 오래됐잖아. 그 긴 시간 동안 웃을 만한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게 말이 돼?”
“제가 보기엔 카나 님은 감정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높은 것 같아요. 웃는 게 아니더라도, 카나 님이 눈에 띌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 자체를 많이 못 봤어요.”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티가 확 나거든요. 제가 펼치는 검술이 못마땅할 때라던가, 식탁에 야채가 올라왔을 때라던가….”
“아하, 그렇군요. 역시 저니 님은 카나 님에 대해서 저보다 잘 알고 계시네요.”
“흐흥. 함께 한 시간이 있으니까요. 셀린도 조금 더 노력하면 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카나는 은근히 단순하거든요.”
“네에. 힘내야겠네요.”
“…저기, 내가 듣고 있는 건 알고 있는 거지?”
내가 길가에 있는 나무도 아니고, 다 듣고 있는데 저런 말을 하는 게 맞아?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입을 여니, 다은이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안 듣는 곳에서 하면 험담이 되잖아. 험담은 나쁜 거라구.”
“와. 이렇게 정론으로 들리지 않는 정론은 처음이야.”
다은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헛소리로 들리게 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도, 다은이 하면 한 번 정도는 의심할 것 같아.
“사실 카나의 감정을 읽는 건 딱히 어렵지 않긴 한데….”
“…?”
“그…런가요?”
“은근히 보이거든요. ‘지금은 기분이 좋구나’, ‘지금은 기분이 안 좋으니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이런 식으로요. 참고로 지금은 어이없어하긴 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네요.”
“진짜 어이없네.”
“좋아! 결심했어!”
다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부터 내 목표는 카나를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거야!”
“드디어 음유시인으로 직업을 바꿀 마음이 생겼구나. 잘 생각했어.”
자신이 나아갈 길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고 해도, 재능을 낭비하는 걸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순 있는 거잖아.
그렇기에 나는 자신의 적성을 깨달은 다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엥? 음유시인? 그게 무슨-”
“만담은 거기까지 하고.”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다은의 말을 끊었다.
시종일관 바쁘게 움직이던 유스티나가 우리의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추출 작업이 끝났느니라.”
“꽤 빨리 됐네.”
“이제 결계를 회수하기만 하면 끝이니라. 그렇게 하면 더는 되돌릴 수 없으니, 만약 번복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 말하거라.”
번복이라.
별안간 다은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에 올린 그녀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을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
의식을 치르는 주역은 나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더 긴장하는 거람.
하지만 다은은 알까.
“없어.”
그 잔떨림이 오히려 마음을 확고하게 굳히는 데 일조했다는 것을.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뒤로 물러날 순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