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서 십 년을 넘게 산 탓일까, 아니면 하도 많이 구른 탓일까.
이제는 전생의 기억이 많이 흐릿해졌다.
하기야 딱히 기억하려고 애를 쓴 것도 아니고 잊지 않겠다고 어디 써놓은 것도 아닌데 잊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런 걸 기억하려고 애쓸 시간에 생존 수단을 익혔어야 했거든.
그래서인지 나에게 남은 전생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기억나지 않고, 정말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나고.
예를 들면 이런 거.
전생의 나는 등산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종의 이유로 산을 타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겨우겨우 정상에 오르면 차가운 물이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정상까지 올라야 하는 탓인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많이 사 먹진 못했지만, 언젠가 큰맘 먹고 사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래서 갑자기 이걸 왜 말하냐면,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저니를 보니 그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니지. 그보다는 배달 음식에 가까우려나.’
배달 업체가 생긴 것도 모자라서 이 외진 곳까지 배달을 올 줄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 실리아 문명이 많이 발전한 건가?
척.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와 음식을 내미는 저니를 바라봤다.
고작 코카트리스 따위에게 구해줬다고 매일 같이 산을 오른다고?
그것도 매일 다른 음식을 들고?
‘지극정성이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나야 귀찮게 요리할 필요도 없고 정리도 안 해도 돼서 나쁠 건 없거든.
다만,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긴 한데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독이라도 탔나 싶었는데 마나가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독을 탄 것도 아니고, 애초에 독 따위에 당할 몸이었으면 지금까지 숨을 붙이고 있지도 못했을 테고….
‘오늘도 맛은 있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저니가 가져온 음식을 즐기곤 했다.
귀족들의 만찬에 오르는 것들만큼은 아니어도 꽤 맛있었던 터라 내심 기다려질 때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내려놓자 저니는 오늘도 여지없이 아르키쉬로 중얼거렸다.
“진짜 내가 틀린 건가?”
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천에 기름을 먹였다.
관리해서 좋아지기엔 한참 늦었지만 조금 더 버티는 정도는 되겠지.
나에게 도움을 준 대장장이에 대한 나름의 예우였다.
휘익!
“…?”
검을 닦으며 생각에 잠긴 사이 저니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미 내려갔을 시간인데 웬일로 아직 남아있는지는 둘째 치고….
‘…뭐 하는 거지?’
풍요를 기원하는 춤인가? 아니면 춤추는 풍선 인형 흉내?
검을 들고 춤추는 걸 보면 어쩌면 주술적 의미가 담긴 걸지도 몰라.
일단 검술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내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기이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휘적휘적. 그런 의성어가 어울리는 몸짓으로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마침내 우뚝 선 채로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뿌듯한 기색으로 땀을 닦는데….
“조금만 쉬고-”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버렸다.
만약 이걸 노린 거라면 정말 대단한 재능이 아닐 수 없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검을 잡은 이라고 하기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숙련도다.
한 달만 연습해도 저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 말이야.
“휴우….”
뭘 하든 간섭할 생각 없었는데.
눈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니 거슬려서 무시할 수가 없네.
‘밥값… 밥값이라고 생각하자.’
그만큼 얻어먹고 입을 싹 닦는 것도 양심에 찔리니까.
“잘 들어.”
내 검술은 기사들이 배우는 정석적인 검술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게 가르치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어쨌든 나도 처음 검을 잡을 때 정석적인 검술로 익혔고,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잘못된 점은 훤히 보이니까.
지금 가르쳐 주려는 건 검술이 아니라 더 기초적인 영역이기도 하고.
“양손으로 잡지 말고 한손으로 잡아.”
검을 꼭 잡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떼어냈다.
순간적으로 힘을 실으려고 그런 거라면 몰라도 처음부터 양손으로 잡을 거면 그냥 양손검을 쓰지, 뭣하러 한손검을 써?
“잡는 방법도 틀렸어.”
고작 파지법,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검을 배우든 뭘 배우든, 도구 다루는 법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은 파지법이다.
올바르게 잡는 방법을 익혀야 도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으니까.
“이렇게 잡아.”
초보 검사들이 많이 간과하는 건데, 검에 제대로 힘을 싣기 위해서는 손가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것도 중요하다.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손가락을 옮겨 잡았다.
알아들을지는 모르겠다.
못 알아들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 그거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걸.
“자세는 이렇게.”
오므린 다리를 툭 건드리자 저니가 엉거주춤 다리를 벌린다.
자세를 제대로 잡아야 공격이든 방어든 매끄럽게 이을 수 있다.
물론 무엇과 싸우냐에 따라 자세가 달라지긴 해.
인간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검술이 있고 마물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검술이 있으니까, 검술의 기본인 자세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아까 그 자세는 정말 아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몸소 건드리면서 자세를 교정해 주니 아까보단 나은 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베기.”
사실 지적할 게 하나 더 남긴 했다.
검을 다루는 태도. 내가 보기엔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애인처럼 다루라거나 분신처럼 생각하란 얘기는 아니다. 물론 애지중지 다루면 좋기야 하겠지.
하지만 남이 검이랑 연애를 하든 키스를 하든 내 알 바인가.
근데, 본인 검에 본인이 베일까 두려워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상대를 겁줘도 모자랄 판에 자기가 휘두르고 자기가 겁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조심하는 것과 바보 같은 건 다른 얘기고, 이건 명백하게 후자였다.
백날 알려줘도 겁나서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안타깝게도 이건 지금까지 고친 것들과 달리 행동으로 알려줄 수 없는 거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말이 통했다고 해도 당장 고쳐지지도 않을 테고.’
고작 몇 마디 들었다고 해서 벌벌 떨던 사람이 용맹하게 싸울 수 있겠어?
검을 쥐고 시범을 몇 차례 보여준 후 몇 걸음 물러났다.
“이제 해 봐.”
기초 중의 기초만 알려준 거지만, 기초조차 없는 사람에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얼이 빠져서는 멍하니 서 있던 저니가 파뜩 정신을 차렸다.
“에, 그러니까….”
가르쳐준 것을 더듬더듬 되짚으며 자세를 잡는 저니.
이윽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녀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쐐액!
검을 휘적거리며 무언가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르던 때와 명백하게 다른 소리.
여전히 이제 막 검을 익힌 초심자티가 팍팍 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본인도 신기한지 몇 번 더 검을 휘둘러 보더라.
“검술 숙련도가 갑자기 확 올랐는데? 와, 이게 이렇게 오르기도 하구나….”
이 정도면 밥값은 한 거겠지.
“후아암….”
밥 먹고 몸까지 움직이니 좀 졸리네.
늘어지게 하품하며 눈을 비볐다.
남아서 연습을 더 하든 산에서 내려가든 알아서 하겠지.
설령 허튼짓을 한다고 해도 알아챌 수 있으니까 내버려두고 잠이나 한숨 잘까?
음, 고민 되네….
* * *
묘지기에게 검을 배운 이후,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저니의 일상이 조금 달라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방송을 켜고 실리아에 접속한다.
맛있다고 정평이 난 음식을 사서 묘지기가 있는 곳에 가는 것까지는 전과 같은 일상이었지만.
“안녕!”
“안녕, 이 아니라 안녕하세요.”
“안녕… 하? 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바로 산에서 내려갔던 이전과 다르게 이제는 산에 남아 묘지기와 대화하거나 검을 연습하곤 했다.
심경에 변화라도 있었는지 곧잘 말을 섞는 묘지기.
여전히 이름을 알려줄 생각은 없는지 가끔 이름을 물을 때면 입을 꾹 닫긴 해도, 지금처럼 저니가 틀리게 말을 한 경우엔 지적하며 제대로 알려주곤 했다.
“안녕하세요….”
저니는 묘지기가 알려준 말을 나직하게 되새기며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자신이 들인 시간과 노력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음식에 들이는 돈도 수업료라고 생각하니까 별로 아깝지 않….
아깝지… 아깝….
‘…쪼오금, 아주 쪼오금 아깝긴 해.’
아무래도 한두 푼이 아니다 보니 아예 아깝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여태까지 보지 못한 속도로 쑥쑥 오르는 검술 숙련도를 보면 쓰리던 속이 진정되긴 했다.
아무튼 묘지기와 친해진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나.
-달성..인가?
-쓰읍 애매한데..
“이 정도면 친해진 거지! 다른 사람들은 말도 못 붙이고 쫓겨나는데 난 대화도 할 수 있잖아!”
저니가 묘지기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 새로이 산을 오르는 플레이어가 꽤 있었다.
묘지기를 쓰러트리기 위해 오는 게 아니라 말이라도 한 번 섞어보겠다고 오는 플레이어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무너졌다.
[아니 왜 나는 안 됨?]
나도 묘지기랑 얘기해 보고 싶어서 그라닉 공부했는데 왜 쟤는 되고 나는 안 돼?
나도 맛있는 거 갖다줄 수 있는데
나도묘지기가가르쳐주는검배우고나도묘지기랑꽁냥거리고머리도쓰다듬고귀여워해줄수있는데왜어째서나는
[댓글]
-어어 이 새끼 왜 까매지냐
-(무서워요 콘)
-이건 또 무슨 템플릿이냐
저니가 했던 것처럼 말을 걸고 먹을 걸 조공하려고 해도 어째서인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려고 해도 본인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억울한 희생자들은 묘지기와 가까운 사람, 저니의 방송으로 몰려들었다.
-왜 너만 왜 너만 왜 너만 왜 너만 왜 너만
-어떻게 대화했습니까? 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물어봐 주면 안 됨?
하지만 저니라고 해서 묘지기가 왜 그러는지, 왜 자신에겐 관대한 건지 알지 못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지만 답이 돌아오질 않으니 어쩔 수 있나.
저니는 오늘도 여지없이 올라온 채팅창의 질문들을 못 본 척 넘기며 인벤토리를 뒤졌다.
“오늘 준비한 음식은….”
두구두구.
입으로 소리를 내며 저니가 씨익 미소 지었다.
어쩐지 음흉한 느낌이 드는 미소.
이윽고 저니의 손에 새빨간 무언가가 담긴 그릇이 툭 튀어나왔다.
“바로 볼케이노 볶음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