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스태프가 땅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얀색의 매끄러운 몸체와 각양각색의 보석들이 박힌 장식이 인상적인 스태프는 심미안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무심코 감탄을 흘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그런 물건.
보통 사람 같으면 먼지 한 톨이라도 묻을까, 흠집이라도 날까 두려워서 고이 모셔둘 만한 그런 물건이었으나, 정작 스태프를 쥔 남자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까짓 게 대수라고 말하는 것처럼 연신 스태프 끝으로 땅을 찍던 남자가 복잡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이 남자를 맞이했다.
십이면 십, 백이면 백 좋은 날씨라고 말할 만한 하늘이었으나.
남자에게 날씨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비가 오든, 천둥이 치든, 거센 태풍이 몰아치든… 남자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 남자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날씨가 아니었으니까.
“에델이시여. 당신의 뜻대로 했습니다.”
때론 부딪치고, 때론 얽히고, 때론 유유히 흘러가는 마나의 흐름.
그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흐름이었다.
신비를 탐구하고 기적을 모방하는 마법사라고 해도, 육안으로 마나의 흐름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것을 이토록 세밀하게 본다는 것은, 남자가 이룩한 경지를 말해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토록 높은 경지에 선 남자는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옳은 일을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제가 당신의 뜻을 잘못 읽은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에델이 남자에게 직접 뜻을 전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남자가 한 일은 세계에 흐르는 흐름을 읽어 멋대로 신의 뜻을 짐작하고 벌인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에델의 뜻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파도가 되어 철썩이고 있었다.
“많은 것이 불탈 겁니다. 또한 많은 것이 무너지겠지요.”
언뜻, 규칙 따위 없는 것처럼 보여도 늘 한쪽을 향해 흐르고 있던 마나는 이제 다른 곳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저 하늘 높은 곳 어딘가를 향해.
“그리고 그 재해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제가 몸담은 제국일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남자가 이 일을 감행한 것은 그가 제국에 유감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제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을 뿐.
제가 있는 방을 애지중지 아낀다 한들 집 자체가 무너지면 아무 소용 없지 않은가.
그걸 알고 있기에 내키지 않는 맹약까지 하며 소녀를 보금자리에서 내보내는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남자였지만.
마음속 심란함까지 모조리 지워낼 수는 없었다.
에델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리던 남자가 별안간 미간을 좁혔다.
넓게 펼친 기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쯧, 피라미가.”
굳이 남자가 나서지 않아도 그가 펼친 결계에 막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누군가 접근하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
“운 좋게 힘을 얻었을 뿐인 이방인 주제에 감히 나를 얕보다니.”
그가 펼친 결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곧 그의 마법에 도전한다는 의미.
남자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탁.
콰릉!
스태프를 내려찍는 것과 동시에 우렁찬 천둥소리가 지상을 때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한 차례 지나간 후, 그가 느끼던 인기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이고…. 이런 잡스러운 일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진중하던 말투를 벗어던진 남자가 투덜거렸다.
“친절을 베풀어도 알아줄 사람이 없으니 통탄스럽구나. 이 꼬마는 내가 자길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는 것도 모르겠지.”
눈을 뜨자마자 검을 꼬나쥐고 달려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남자는 발치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피범벅이 된 입가와 창백하기 짝이 없는 안색 때문에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그마한 가슴이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 소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봐, 자네 딸 좀 유순하게 키울 수 없었어? 아주 망나니가 따로 없어. 마주칠 때마다 죽자고 달려드는 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움찔.
“…!”
묘비를 보며 투덜거리던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분홍색 소녀의 손끝이 움직였다.
아주 찰나에 일어난 움직임이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벌써 정신을 차릴 낌새가 보이다니, 난놈은 난놈이야. 하기야, 그렇기에 에델 님의 선택을 받은 거겠지.”
감탄하는 것과 별개로 남자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락시아에 있는 이를 이곳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현존하는 마법사들의 정점에 선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고, 수많은 촉매를 썼고, 대상이 쇠약한 상태에 의식이 없었고, 마법의 행사를 막는 마기도 없었고….
그 외에도 온갖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만약 그것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분신으로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는 본체를 이끌고 이곳에 찾아왔다.
좀스럽게 분신만 보내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라며 짜증 내던 소녀가 본다면 환호성을 지를 만한 일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남자는 서둘러 하산할 준비를 마쳤다.
“….”
결계를 나가기 전.
남자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제 아비를 끔찍이 아끼던 녀석이니 함부로 난동을 부리진 못하겠지.”
이 장소에 애착이 꽤 깊어 보였으니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자제하지 않을까.
가능성은 작지만, 남자는 그 미약한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날 잡아 죽이고 싶어 하는 녀석을 내버려둬야 한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혀를 끌끌 찬 남자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완성된 마법진이 빛을 발했고.
“…이런. 깜박했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를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했던 마법적 처리가 뒤늦게 남자의 머리를 스쳤다.
“하이고… 내 나이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남자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현자라고 불리는 이 치고는 다소 볼품없는 퇴장이었다.
* * *
“끝…난 건가…?”
널브러져 있던 다은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몸을 옥죄던 마기가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락시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체력을 지속적으로 깎아내던 도트뎀도, 능력을 저하시키던 ‘마기 중독’이라는 디버프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인 다은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과연, 다은의 생각대로 매섭게 휘몰아치던 검은 기류가 보이지 않았다.
“성공했구나…!”
만약 카나가 실패했다면 아직 마기가 남아 있을 테니 분명 성공한 것이리라.
다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기가 휘몰아치던 곳.
승천 의식을 치른 자리를 둥글게 둘러싼 사람들을 본 다은이 불안감을 느꼈다.
성공의 기쁨을 만끽해도 모자랄 판에,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셀린?”
고요한 침묵 속, 익숙한 금발을 발견한 다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
“셀린?”
“…아, 저니 님.”
“…왜 그래요?”
늘 온화한 얼굴로 반갑게 대답하던 셀린이었지만, 지금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게, 그러니까….”
셀린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결국 참지 못한 다은이 인파를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인파 끝에, 작은 소녀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지독하리만치 짙은 마기 안에서 어떤 싸움을 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꼭 끌어안으며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으리라.
“잠시만, 으읏, 지나갈게요…!”
인파의 틈바구니를 겨우겨우 헤집은 다은의 눈에 마침내 휑한 공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격한 싸움이었음을 증명하듯 흙바닥에 마기가 할퀴고 간 거친 상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둥글게 원을 그리는 자국을 본 다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만약 아까 카나의 말을 듣지 않고 같이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면 지금 다은은 갈기갈기 갈린 고기 조각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전에 부활 지점에서 부활하겠지만….
어쨌든 그리 좋지만은 않은 최후를 맞이했을 것은 확실했다.
이제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우왓…!”
힘겹게 마지막 열을 비집던 다은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해방감에 몸을 휘청였다.
다은의 코가 땅에 부딪히기 전, 그녀의 몸을 잡는 손이 있었으니.
부드럽게, 그렇지만 단단하게 다은의 팔을 잡은 유스티나가 그녀를 바로 일으켰다.
“조심하거라.”
“휴우, 감사합니다….”
유스티나 덕에 쌍코피를 줄줄 흘리는 꼴사나운 신세를 간신히 면한 다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넘어질 뻔한 땅이 주변과 다른 색을 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스팔트를 부은 것 같은 짙은 검은색.
기이함을 느끼던 다은의 코에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피 냄새?”
어렸을 적 수도 없이 맡았던 바로 그 냄새가 땅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유스티나가 말했다.
“승천 의식은 성공했느니라. 그 녀석의 말대로 락시아를 잠식한 마기가 모두 사라졌느니라.”
사명에서 해방해 주겠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실로 말도 안 되는 업적이니라.”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차례나 확인한 유스티나였지만,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먼 옛날, 정화의 권능이 남아있을 때처럼 깨끗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음을.
그러나 유스티나의 감상은 다은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녀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카나는요?”
“….”
“…아니죠?”
보이지 않는 모습.
주변을 가득 물들인 검은색 액체.
돌아오지 않는 대답.
어딜 봐도 불안감을 증폭하는 요소들뿐이라, 다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 아아….”
털썩!
다은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질척이는 액체가 무릎을 적시고,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렀다.
그 속에서 분홍색 소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죽음은 익숙하다.
실리아 온라인을 시작한 이후 다은이 맞이한 죽음은 두 손으로 셀 수 있는 수를 넘긴 지 오래였다.
“카나야.”
하지만 자신의 죽음에 의연하다고 해서, 타인의 죽음에도 의연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이 좋아해 마지않던 이라면 더더욱.
“카나야….”
죽으면 살아나는 자신과 다르게 카나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러니, 다시 만날 수도 없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다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막혀있던 댐이 터지듯, 무던했던 마음에 거센 물결이 차올랐다….
“자, 잠깐! 무언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하겠느니라. 나는 그 버릇 없는 아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느니라.”
“…에?”
-가, 유스티나의 말에 뚝 멈춰버렸다.
“…죽었다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길 원한 것이더냐?”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다은은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그러면서 슬슬 눈치를 살피는 게, 원하는 바가 뻔히 보여서 유스티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장소를 옮기는 건 어떻겠느냐. 여기는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 같지 않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