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는 눈을 떴다.
…근데, 눈을 뜬다는게 뭐지?
행동의 의미는커녕,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사아아아-
그와 동시에 소녀의 몸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나왔다.
그것은 오염의 기운이요, 생명체에겐 극독이나 다름없는 죽음의 기운이었다.
소녀가 발을 딛고 있는 꽃밭도 안개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삽시간에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린 꽃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녀의 눈에 고개가 꺾인 꽃이 비쳤다.
“….”
마음에 안 들어.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낀 소녀가 팔을 휘둘렀다.
휙.
소녀의 팔이 안개를 갈랐다.
팔이 휘둘러진 경로를 따라 잠시 갈라졌던 안개가 스멀스멀 움직여 몸을 붙였다.
소녀는 안개를 잠시 흩어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완전히 쫓아내진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안개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 소녀의 몸이니 그런 하찮은 몸짓으로 해결이 될 리 없었다.
그러나 상대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건 안개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꽃, 풀, 나무, 작은 벌레까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의 생기를 앗아가는 안개도 제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낼 수는 없었던 건지, 소녀의 팔은 안개에 닿기 전과 아무런 차이도 보이지 않았다.
휘적휘적.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소녀가 양팔을 허우적댔다.
그 모습은 모래사장에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지만, 행동에 따른 여파는 마냥 가볍지 않았다.
소녀가 움직일수록, 소녀의 팔이 안개를 휘저을수록 더 넓게 퍼져 나간 안개가 꽃밭을 잠식했으니.
그쯤 되자 소녀도 이상한 걸 느끼고 안개를 흩트리려는 시도를 멈추었다.
부우-
볼을 부풀린 채 안개를 노려보는 소녀.
타박.
“!”
무심코 발을 딛은 소녀는 제 움직임을 따라 안개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분홍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다닥-!
소녀가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꽃밭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꽃밭 위에서 스멀거리던 안개도 황급히 소녀의 뒤를 쫓아 공터로 나왔다.
꽃밭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새로운 피해를 낳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은 시든 곳보다 멀쩡한 곳이 더 많았다.
흡족하게 꽃밭을 훑던 소녀의 눈이 문득 어딘가에 걸리기라도 한 양 멈췄다.
꽃밭 너머, 깎아지른 벼랑 가까이에 꽂혀 있는 기다란 무언가.
소녀는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색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
소녀는 답답했다.
무심코 가슴팍을 쥐어뜯듯이 잡아도, 소녀가 느끼는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곳으로 가고 싶다.
저곳으로 가면 안 된다.
두 가지의 상반된 본능이 소녀를 사이에 둔 채 치열하게 싸웠고.
끝내 승리한 것은 ‘가면 안 된다’는 본능이었다.
주춤.
소녀는 못내 아쉬운 눈치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충실하게 본능을 따랐다.
거뭇한 자국이 있는 공터를 지나치고, 아담한 크기의 오두막도 지나친 소녀가 꽃밭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콩!
“…?!”
최대한 꽃밭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본능 하나로 움직이던 소녀가 투명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멈춘 소녀가 살짝 붉어진 이마를 문질렀다.
소녀의 눈에 순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무엇이 자신을 막은 걸까.
갸웃거리던 소녀는 그제서야 자신을 가로막은 불투명한 벽을 발견했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히 앞을 가로막은 것 때문은 아니었다.
꽃밭에서 벗어났을 때처럼, 본능이 소녀에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으니.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속삭였던 본능이, 이번에는 당장 없애버리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아.
소녀는 이번에도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우웅-
소녀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분명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한 점의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칠흑의 검 주변으로 불길한 검은 안개가 일렁였다.
만약 소녀가 쥔 칠흑의 검이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이라고 해도, 그리고 좋은 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검사라고 해도 쉽사리 검을 손에 쥘 수 없을 것이다.
칠흑의 검에서 일렁이는 불길함은 이성을 가뿐히 넘어, 본능의 영역을 자극하는 불길함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본능을 이겨내고 검을 쥐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소녀가 들고 있는 칠흑의 검은 소녀를 둘러싼 검은 안개가 형상화된 것이었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손끝이 닿자마자 안개에 먹혀 생명력을 모두 빼앗겨 버릴 것이다.
그런 흉흉한 물건이었지만, 그것을 쥔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소녀는 칠흑의 검을 쥐고 자세를 취했다.
좌측 하단에서부터 우측 상단으로 비스듬하게 올려 베는 검.
검은 뱀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소녀를 가로막은 벽을 향해 돌진했다.
파가가각!
번들거리는 송곳니가 벽에 깊게 박혔다.
검은 뱀은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벽을 물고 잡아 찢을 기세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든 힘을 쏟아부었으나 끝내 벽을 찢는 데 실패한 검은 뱀이 형체를 잃고 서서히 흩어졌다.
남은 것은 오직 검 한 자루가 남긴 흔적이라고 믿기 힘든 거대한 상흔이 새겨진 벽뿐이었다.
“….”
소녀의 눈에 불만이 가득 차올랐다.
말릴 사람도 없지만, 누군가 있었다고 해도 말릴 틈도 없이 소녀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올곧게 앞을 향하던 검 끝이 장벽에 꽂혔다.
파앗!
장벽이 강하게 점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검이 꽂힌 자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장벽을 천천히 잡아먹기 시작하자 강하게 점멸하던 장벽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마침내 장벽이 모두 빛을 잃었을 때, 그곳에는 소녀를 막아선 불투명한 벽이 아닌 검게 물든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무표정으로, 하지만 어딘가 흡족한 눈치로 그것을 올려다보던 소녀가 다시 발을 내디뎠다.
생긴 것만 보면 검은 벽은 오히려 더 강하게 소녀를 막아설 것 같았지만.
소녀의 발이 벽에 닿기 직전, 벽이 스르륵 열렸다.
소녀가 사람 두셋은 너끈히 지나다닐 수 있는 틈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우거진 초목이 소녀를 반겼다.
하늘을 가릴 기세로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들도 검은 안개가 닿자 허리가 구부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소녀의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시들게 하는 소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할 곳도 알지 못하면서, 그저 그래야 한다는 양 산 아래를 향해.
먼 동쪽.
장벽의 원주인이었던 누군가가 이변을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로.
* * *
“…승천 의식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고요?”
“그러하니라. 벌써 세 번째 물은 것이니 그만 물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다은이 침음을 흘렸다.
승천 의식을 주관하던 유스티나는 모든 일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곳에 모인 마기뿐 아니라, 락시아에 있는 모든 마기가 카나에게 빨려 들어갔다.
당연히 그것은 유스티나가 상정한 상황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사태는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스티나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기가 다른 곳으로 튀지 않게 제어하는 것뿐.
천 년과도 같던 수 분이 지나고, 억겁과도 같던 수십 분이 흐른 후에야 카나를 둘러싼 마기의 흐름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카나가 얼마 안 남은 마기까지 모조리 흡수하는 것을 본 유스티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경지가 드높다 하지만, 마족도 아닌 작은 소녀가 어떻게 그 많은 마기를 감당했는가.
아니. 마족이라고 해도 저만한 마기를 담으려고 한다면 진작 몸이 터져버렸을 것이다.
한차례 격의 성장을 이룬 유스티나라 해도, 카나가 받아들인 마기의 반의반조차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위업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놀란 마음을 책무라는 사슬로 억누른 유스티나가 땅에 엎어진 카나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빛무리가 카나의 몸을 휘감더니 강하게 반짝였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유스티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카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마법이었던 것 같으니라.”
“마법….”
대체 누가, 어디로, 무슨 이유로?
카나가 살아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다른 걱정이 생겼다.
“혹시 카나한테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납치한 거라면….”
아니면 카나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변태의 소행이라면….
다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 정도로 많은 피를 쏟았으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닐 텐데.
“또 오해할 수도 있으니 먼저 말해두겠느니라. 그 아이를 납치한 것은 우리의 소행이 아니니라.”
“별로 의심하진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면 의심할 정신도 없었다.
다은의 머릿속은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마법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다은을 깨웠다.
“범인은 상당히 실력 있는 마법사일 거예요.”
“네? 왜요?”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은 쉬이 펼칠 수 있는 마법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카나 님만 특정해서 데려가는 건 더욱이 어렵겠죠.”
“아아….”
듣고 보니 이걸 이제야 떠올린 게 부끄러울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라….”
“아마 아르디나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마법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네요.”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카나를 납치한 걸까요?”
타이밍도 공교롭다.
마치 이때를 노리고 실행한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 아닌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에 다은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쪼록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납치된 게 반쯤 확실해진 이상 다은의 바람은 가능성이 매우 작은 바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은 이 몸대로 사람을 풀어 그 아이를 찾아보겠느니라.”
“도와주시는 거예요?”
“…이 몸을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으로 보는 것이더냐?”
“앗…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는 게 아니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유스티나가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마족들이 일사불란하게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다은과 셀린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찌하겠느냐?”
그녀들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희도 같이 수색할게요.”
“네. 카나 님을 두고 돌아갈 순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람을 붙여주겠느니라. 마기는 사라졌으나 마물은 여전히 잔존해 있을 터이니.”
유스티나는 답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성된 수십 개의 수색조가 락시아를 쥐잡듯이 들쑤시기 시작했으니, 다은은 카나의 행방을 찾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뭐라고?”
다은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카나의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